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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 다시 돌아보기 (엡 5: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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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에베소서 5장 15~17절 
제목 인생, 다시 돌아보기


하나님을 찾아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리고 좋으신 하나님께 신실하게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세이레 동안 특별기도에 참여하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기도하면 지혜를 주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기도하도록 격려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얻는 지혜는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인생, 다시 돌아보기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삶이란 허비하기에는 너무 소중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우리가 하기 원하시는가?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그것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물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5-17)

지혜로운 자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자세히 주의’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되는대로 살아갑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따라서 움직입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지 마시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셔야만 합니다.

“모든 기회를 충분히 살려서 선한 행동을 하십시오.”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나오신 분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주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혼자서 뒹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지난 세이레 특별기도 기간에 1부에 나오신 분들은 뤽 워렌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40일 가운데서 20일분을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신 중요한 목적 다섯 가지 가운데서 오늘 최소한 세 가지 질문을 다루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한 마디로 삶 전부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모두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6장 13절을 읽어보십시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우리 전부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한 편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내가 지금껏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10%를 원하지 않습니다. 혹시 십일조를 드리다 보니까 십분의 일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십일조는 전체가 다 주님의 것입니다”하는 것을 나타내는 증표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50%를 원하지 않습니다. 90% 쯤이면 하나님이 만족하실까요? 아닙니다. 99%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100%를 원하십니다.

인생을 둘러앉아서 갈라먹는 피자조각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한 조각은 직장생활을 위해서, 다른 조각은 사회생활을 위해서, 또 다른 조각은 가정생활을 위해서, 나머지 조각은 신앙생활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한 조각만 하나님의 것입니까?

피자 전부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두 내꺼야, 나는 전부를 원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길 주저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성경에 분명히 말씀 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라”(신명기 10:12)

마음을 다해서 성품을 다해서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요구 조건입니다. 적당하게 하는 헌신은 헌신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은 “섬겨서 안 된다” 하는 말과는 다릅니다. 섬겨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은 섬길 수도 있는데 그래서 안 된다 이런 이야기고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둘 다 섬기려는 것은 불가능한 시도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는 하나님도 중요하고 돈 버는 것도 중요 합니다” 속지 마세요. 그런건 없습니다. 영화는 “미션 임파서블”이라고 그런게 있더군요. 불가능한 임무가 주어져서 영화니까 멋지게 해 내는 것을 여러분이 보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불가능한 시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인생에는 돈 말고도 하나님을 첫 번째 자리에서 밀어내는 것들이 많습니다. 공부, 사업도 하나님을 첫 째 자리에서 밀어냅니다. 텔레비전도 하나님을 밀쳐내고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설마 주일날 예배 나온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섬길까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생각은 물론 텔레비전을 자기 신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는 짓 보면 틀림없거든요. ‘텔레비전은 나의 목자시니 당신만 있으면 내가 외롭지 아니 하리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적잖게 있습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하루에 한 장 읽을 기회가 없으면서 방에 들어갈 때 마다 리모콘 누르지요? 한 주일 내 30분도 무릎 꿇고 기도할 기회는 없으면서 하루에 30분 아니라 한 시간, 두 시간도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으면 여러분의 신은 여러분의 생각과는 달리 텔레비전입니다.

속지마세요. ‘나는 교회 주일날 나가니까 나는 하나님 백성답게 산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삶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지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정규적으로 규칙적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관계나 운동, 오락이나 취미도 하나님을 밀쳐내고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노후생활, 여행, 가족도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첫 번째 자리에서 밀어내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첫 번째 자리를 무엇이 차지하고 있습니까? 사업의 성공입니까? 가족의 행복입니까? 건강유지입니까? 은퇴 후에 편안한 노후보장입니까?

이 모든 것들이 그 자체가 죄악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하고 좋은 일들은 맞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에 복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정하십니다. 다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경고할  뿐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보다 우리의 삶에 더 중요한 것은 우상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고 명하십니다. 내가 네 인생의 첫째 자리를 차지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루는 청년이 주님 앞에 와서 물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하고 자기 이야기를 해 놓고 “나를 따르라”고 허락했더니 이 청년 말을 들어보십시오.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주님 따르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을 말하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자세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일에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면 여러분의 신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 삶에 첫 번째 두는 사람은 주일에 다른 일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주일마다 예배에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 가장 존귀하신 분과 여러분은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세례 받을 때 주일날 딴 짓하기로 약속하셨어요? 세례 받을 때 주일 지키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주일날 누가 여러분에게 시간을 내어달라고 그러면 “저는 귀하신분과 선약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끊으세요. 그리하면 주일 성수하는 것이 한결 쉬워집니다.

11월은 전교인 출석의 달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첫 번째 자리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1주일에 하루를 주를 위해서 온전히 드립니다. 그럴 때는 다른 것들이 끼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바쁜 일, 친척이 결혼식을 합니까? 그럼 빠집니까? 얼마나 신앙생활이 흐트려  졌는지 모릅니다. 친척 돌보는 것, 관계 맺는 것 중요합니다. 토요일 날 갔다 오세요. 안 그러면 아이들 신행 갔다 오면 가서 축하해 주세요. 주일은 그렇게 여러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날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가장 존귀하신 분이고 그 분과의 약속이 가장 소중하다면 예배에 지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3층이나 4층에 앉아계신 분들을 제가 한번 쳐다봐야 될 것 같아요. 어쩌다가 오늘 늦은 것이면 제가 시비 붙지 않겠습니다. 저도 살다보면 가끔씩 늦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도 15분 지나서 왔고 지난주일도 15분 지나서 왔고 그 지난주일도 15분 지나서 왔고, 아니 9월 달도 15분 지나서 왔고 8월 달도 그렇게 했다면 그런 사람들은 허물어진 제단을 수습하는 심정으로 결단하십시오. 앞 뒤 잘라 버리고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우리의 정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늦게 오시는 분은 새로운 소원과 행동으로 나아갑시다.

여러분은 모두 큰 잔치를 베푼 임금님 이야기를 들어 보셨지요? 이상하게 초대장 받은 사람들이 전체다 임금의 초대장인데 한마디로 거절을 다 하지는 않아요. 어떤 사람은 땅을 샀으니까 내가 지금 바빠서 못갑니다. 소를 샀으니까 내가 지금 몰아봐야 되겠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차 새로 뽑았으니까 오늘 한번 밟아봐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못갑니다. 어떤 사람은 장가를 막 가서 못가겠다고 아내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2천년 세월이 지나가니까 옛날에는 아내 때문에 못 온다고 핑계하더니 이제는 친척 결혼식까지 못 온다고 핑계가 늘어났습니다.

주일날 하늘 잔치에 빠지는 여러분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의 첫 자리에 모시면 그렇게 사셔서는 안 됩니다. 다 맡기시고 아무리 급하고 중요해도 하나님께 맡겨주십시오.

“너희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 6:33) 인생을 향해 가지신 하나님의 목적을 중시하면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주십니다.

열심히 일하는 시간에 복 주실 뿐 아니라 잠자는 시간에도 복을 내려 주십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은 복을 쏟아 부어 주실 것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주일을 지키셔야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한 사람에게도 예외 없이 말씀드립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전부를 드려야 됩니다. 저는 정말 주일 성수에 관해서 고백하시던 집사님 말을 평생 잊어버리지를 못합니다. 그분은 이대에서 옷 장사를 하는데 그분이 그러시더군요. “목사님 주일 지키는 게 참 쉽지를 않습니다. 주말만 되면 고민이 됩니다.” 한 주간 동안 물건이 안 팔리면 주일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 건데 문 열고 팔아서 직원들 월급도 주고 가계세도 내야 되고 이런 것 저런 것 따지다 보면 주일날 문 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는 거예요. 주간에 장사가 잘 될 때는 쉽게 닫는 줄 압니까? 아닙니다. ‘평일에도 이렇게 많이 매상이 오르면 주일날 열면 얼마나 더 팔리겠나.’ 이 생각 하면 주일날 또 열고 싶대요. 그러고 나서 세 번째 나한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런 유혹 앞에서 매 주말마다 고민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한 그 분은 주일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앞에 설교자 세우셔서 말할 때는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여러분 복 받기 원하시지요? 귀담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복의 비결을 말씀하십니다. 복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여러분 인생에 첫 번째 자리에 모시길 바랍니다.

결혼생활에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결혼생활의 첫 번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십시오. 행복한 가정을 바라십니까? 하나님을 여러분의 가정 첫 자리에 모시길 바랍니다.

사업에 성공하기를 원하면 그 사업의 첫 자리에 하나님을 모셔야 됩니다. 공부를 잘 하고 싶습니까? 좋은 학교에 가고 싶습니까? 하나님을 첫 번째 자리로 모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첫 번째 자리에 두지 않으면 복을 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도 수입이 괜찮다고요? 봅시다. 얼마나 괜찮은지 한번 봅시다. 돈 잘 멀면 그것이 복 받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번 돈이 자신과 자녀들을 파멸하는데 얼마든지 쓰이는 것을 여러분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는 당신을 첫째로 모시면 하는 일마다 형통케 하시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2.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번째 우리가 살필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삶 전부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삶 전부를 원하시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말을 여러분이 좋아할 수 있습니다.

별반 인기 없는 단어고 기피하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보다 배제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훈련”이란 단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훈련이야말로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훈계를 지키는 사람은 생명의 길에 이르지만, 책망을 저버리는 사람은 잘못된 길로 들어선다.”(잠언 10:17) 생명에 이르는 훈계, 훈련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훈련받지 않고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두 단어는 함께 갑니다. ‘제자’, ‘훈련’ 같이 갑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는 영적 훈련이 필수적입니다.

서울의 어떤 교회에서 주일날 장로님 서너 분이 울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 총회 올라가니까 총대들이 수군수군 하면서 정근두 목사를 서울 어느 교회에서 오라고 했다는 거예요. 사실은 제가 아니고요 어떤 목사님 한 분이 서울로 올라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했습니다. “저를 꼭 담임목사로 원하시면 장로님들부터 훈련 받으셔야 됩니다.” 그 한마디 하고 나서 한 달 동안 아직도 연락이 없습니다.

집사, 권사, 장로 목사 이런 신분이 우리를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저도 목사 안수 받아봤거든요. 목사 안수 받는데 갑자기 전기가 통하고 제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어제 강도사였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지위가 우리를 영적으로 성숙한 자리에 올려놓지를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막론하고 훈련 받아야만 합니다. 훈련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지 직책이나 세월이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물리치고 경건함에 이르도록 자기를 훈련하라.”(딤전 4:7). 성경은 그렇게 말합니다. 경건의 달음질을 하라는 말입니다. 훈련이라는 말은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지만 만족하는 것을 뒤로 늦추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그 유익을 나중에 맛보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것이나 하고 싶지 않는 것을 먼저 하고 그 열매를 나중에 따는 것입니다.

혹시 훈련이라는 말을 싫어하신다면 다른 단어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훈련 하면 논산 훈련소 지긋지긋 해서 듣기도 싫다 그러면 다른 말로 바꾸십시오. 습관, 습성이라는 말로 대치할 수도 있습니다. 좋든 나쁘든, 하고 싶든 하기 싫든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습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훈련이 중요합니다. 습관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만약 정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여러분은 습관적으로 정직하게 처신해야 됩니다.  달리는 정직한 사람으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정직한 사람은 언제나 정직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배우자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습니까? 그러면 배우자와 더불어서 좋은 시간을 만들어 보십시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다면 하나님과 관계를 세워가는 거룩한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 위에 성품은 만들어져 갑니다. 그러므로 습관이란 중요합니다. 

“경건함에 이르도록 자기를 훈련하십시오.”(딤전4:7, 표준새번역) 시간과 노력을 다해 영적으로 최적의 컨디션을 가지고 달려 나가야 됩니다.

훈련이라고 부르든지 습성이라고 부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 성숙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중요하지 않는 일에서는 손을 떼야 됩니다. 계속해서 일을 추가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이미 힘에 지나도록 많은 일들이 우리에게 실려 있습니다. 더 얹을 수는 없습니다. 얹으면 침몰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새로운 습관, 경건에 이르기를 훈련하기 위해서는 훈련하는 훈련에 필요한 시간을 내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 한 주간을 살면서 168시간 중에서 시간 남았던 사람 있습니까? 남아서 은행에 저축 시킨 사람 있습니까? 다 썼잖아요. 빠듯하게, 바쁘게 눈 코 뜰 새 없이 살아왔습니다.

저는 지난 3주간 동안 열한시에 집에 들어가면 마음이 한결 편했습니다. 저가 11시에 들어가는 것 보고 어떤 집사님 그러데요. “목사님 바쁜 줄 알았는데 이렇게 까지..” 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요. ‘내가 돈 받고 일하면 이렇게 안합니다. 내가 받는 월급 받고 울산광역시에서 이렇게 일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왜 나는 열심히 일합니까?, 나는 돈 보고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구원해주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일합니다.

새로운 습성을 훈련하는 시간을 내기 위해서는 삶을 새로 조정해가야 합니다. 버릴 것을 버려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는 덜 중요한 것은 손을 떼어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영적인 달음질을 방해하는 두 가지 요소를 언급합니다. 하나는 죄악이요 또 하나는 짐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데 안하고 하나님이 하지마라고 그러는데 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럼 무거운 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필연적으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좋은 일들이지만 너무 많이 엮여져 있으면 하나도 제대로 일을 못하잖아요. 그렇죠? 교회 봉사도 마찬가지고 저도 제 수첩에 들어있는 일들이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 많이 걸리면 영적 성장에 방해를 받습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란 무엇입니까? 하라는 것도 안하는 것이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은 무엇입니까? 죄악된 것은 아니지만 영적인 성장속도를 영적인 달음질을 떨어뜨리는 것들입니다. 달리는 사람들 한번 보십시오. 신발을 무엇을 신을 것인지 신발 하나에 몇 천만원, 몇 억씩 투자하잖아요. 최선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악한 것들이 아닙니다. 때로는 차선도 최선의 방해요소일수 있습니다.

영정 성장을 가로막는 그것이 우리 인간관계일수도 있습니다. 인간관계 나쁜 것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를 사람 사이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주일까지 인간관계 이어가겠다고 동분서주 하면 영적 성장에 도움 안됩니다. 여러분의 자신에게도 안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을 끼치지 못합니다. 직업일수도 있습니다. 직업 갖는게 나쁜게 어디있습니까? 먹고 살기위해서 누구나 직업을 가져야지요. 없으면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 직업 주십시오 해서 세이레 간증에는 직업을 새롭게 얻은분 이야기도 실려있습니다. 직업 필요합니다. 그런데 먹고 살기 위해서 주일날도 리어커 밀고 나가는 초신자들 보면 정말 목사 마음이 아픕니다. 집만 큰 것 있으면 그런 사람하고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주일은 내가 먹여줄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살아가는 데는 꼭 나쁘지는 않지만 불필요한 것들도 있습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거절할 줄도 배워야 합니다. 저도 아직 제대로 못배운 것 같습니다. 일들이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는 것 보니까 어떤 일들은 과감하게 좀더 아니라고 대답해야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새로운 영적 습성을 배양하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분들에게는 텔레비전을 보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아침에 신문을 탐독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연속극을 보는 것을 반드시 나쁘다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연속극을 시청하는 한 시간을 우리는 훨씬 더 영적으로 유익하게 보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데요. “목사님 대한민국 연속극은 매일저녁 안 봐도 됩니다. 한 달에 한 두번 보면 어떻게 되는지 안대요.” 워낙 늘어뜨려서 방영을 하니까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 지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요 기도회보다 훨씬 더 열심을 가지고 리모콘을 눌러서 그 시간을 보려고 그러잖아요. 신문 보는 시간을 15분만 줄여도 매일 성경을 세 장씩 읽을 수가 있습니다. 신문 안 오는 날은 다섯 장 읽으면 일 년에 일독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웬만하면 신문을 서서 쭉 훑어보고 세상이 돌아가는지 너무 모르면 안 되니까 말입니다. “목사님 나는 연속극 안보면 못살아요.” 혹시 그만큼 중독된 분 있습니까? 그러고도 영적인 성장을 하려면 시간을 더 내야 됩니다. 아니면 하루 15분만 빨리 일어나든지, 더 늦게 자든지 해야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나지요. 그 시간내에 하고있는 일을 제껴버리던지 대안이 있어야지요.

습관적으로 해오는 일을 잘 살펴보면 안 해도 될 것이 있습니다. 저는 어떤 때 정말 여기 있을 때는 서서라도 봅니다마는 기도원 같은데 들어가면 한 사나흘 없이 살아도 사는데 지장이 없더라고요. 그렇죠? 넘치는 스케줄에 자꾸 새로운 것을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잘라버릴 일은 없는지 점검하십시오. 영원토록 지속될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 한 달만 시간이 흘러도 의미가 없는 일을 제끼는 겁니다.

영적 훈련이란 먼저 할 것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일을 여러분 읽어보셨습니까? 주님이 오시는 일로 인해서 언니 마르다는 몹시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동생 보십시오. 도착한 주님 무릎 앞에 앉아서 주님 말씀 듣는다고 넋을 잃고 있습니다.

게다가 더욱 속상하는 것은 이렇게 바쁜 나를 도와주도록 한 마디 말도 없이 동생을 데리고 대화를 하고 계신 주님도 못마땅해졌습니다. 한 번 누가의 기록을 읽어보십시오.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0-42)

마치 주님은 이렇게 말하는 듯 싶습니다. “내가 너희 집에 들어올 때 음식하는 편을 택하든지 말씀 듣는 편을 택하든지 선택할 수 있다. 음식준비는 간단히 해도 되고 그릇 씻는 것은 나중에 할 수도 있다. 내게 초점을 맞추어서 교제하는 편을 택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마리아는 더 나은 편을 선택했을 뿐이다.”

삶은 선택입니다. 나쁜 것과 좋은 것 사이에 선택뿐만 아니라 좋은 것과 더 좋은 것 사이를 선택해야 되고 더 좋은 것과 가장 좋은 것 사이를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일을 여러분 혼자서 다 할 것처럼 나설 이유는 없습니다. 여러분 혹시 아파서 한 두 주간 입원해 보신적이 있습니까?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한 보름 갔다 오신 적 있습니까? 갔다 와서 여러분 동네에 들어오니까 어때요? 동네 난리 났던가요? 어디를 다녀와도 세상은 돌아가고 있는 것 눈치 못 챘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을 떠나도 이 세상은 또 그렇게 굴러갈 것입니다.

모든 일을 다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압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것을 맡긴 적도 없고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일이 다 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도 아닙니다. 모든 일이 꼭 같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창조하신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이 없이 하루를 지내면 하루를 낭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울산시장 만나는 것보다, 노 대통령 만나는 것보다 중요하게 여기면 여러분은 신앙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론이야 뭐 하나님하고 박시장하고 누가 높냐 하면 거기에 점수 안나올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하나님이 높다 쪽에 동그라미 하죠. 하나님과 노대통령하고 누가 높냐 그러면 여러분은 어느 쪽에? 물론 하나님이 높다 쪽에 동그라미 하시죠. 그런데 시장이 여러분을 열두시에 만나겠다. 그러면 여러분 열두시 15분 20분 되어서 그 문 두드릴 사람 여기 있습니까? 그렇게 한다는 것은 여러분의 생각과는 달리, 여러분의 기대와는 달리, 여러분은 하나님보다 시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 혹시 시장 만날 때는 지각할지 모르지만 예배의 시간에는 지각 안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삶으로 보여줘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못 믿는 거예요. 정말로 하나님이 그렇게 중요한 분인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하나님이 그렇게 중요한 것 같으면 바쁠 때 다 제껴 버리고 나온다는 것이 지각해서 나오고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한님이 존귀하신 분이신지 알아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만나는 일 제쳐두고 중요 인사를 만난다고 젊은 시절을 보내는 사람들은 젊은 때를 허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인생을 가장 잘 사용하는 길은 지속적인 가치가 있는 일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일과표를 작성하면서 이 일이 십년 후에 의미가 있을까? 이십년 후에도 인정을 받을까? 생각해 보면서 영원에는 어떤 의미를 지닐것인지, 가치를 가지는지 생각해 보면서 제낄만한 것을 제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당히 많은 일들을 추려낼 수 있습니다.

일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일을 위해서는 덜 중요한 일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시간을 잘 관리할 수 있을까요? 잠언 10장 27절은 시간관리의 요체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날마다의 시간을 더하는 것입니다.”(리빙바이블) 주님을 잘 섬기게 되면 시간이 여유가 생기게 된다. 이런 이야기지요.

“나를 먼저 너의 하루 계획에 포함시켜라 그리하면 너의 일과를 내가 책임지마.”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버릴 것인지를 결정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할 일을 먼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나머지 일은 하나님께서 맡아주실 것입니다.


3. 왜 우리는 그것을 해야만, 그렇게 살아야만 합니까?

우리의 이러한 노력에는 여러 가지 축복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서도 혜택이 따라갈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이 더 이상 어떤 혜택이라도 더 받을 것이 없다 해도 여러분은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어떻게요?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의 그 죽음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주님이 당신의 삶을 전체다 내어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여러분이 그 주님을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도 주님을 위해서 여러분의 삶을 드릴 차례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을 보십시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주님께서는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를 위해서 살지 말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을 위해서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님을 위해서 살기를 원하셨을까요? 우리 자신을 위한 삶을 궁극적으로 공허하고 무의미하고 열매 없는 삶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 때에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따라서, 그분의 피로 구속 곧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엡 1:7, 표준새번역)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우리를 자녀라 불러주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영광스러운 기업을 보장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우리가 생각할 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그 일만 생각하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 헌신해야 될지 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 세상에 다른 아무도 없었다고 하더라도 예수께서는 여전히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권면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 12:1 표준새번역)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예수님으로 값을 치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의 삶으로 주님을 위해 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결코 시간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온전한 헌신을 하셔야 합니다. 자신을 위한 삶은 잠깐이고 주님을 위한 삶만이 영원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놀라운 삶을 새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진정으로 인생, 다시 돌아보기가 필요합니다.

여기 주를 위해 살 수 있는 삶이 아직도 올해 두 달 남아 있습니다. 남은 날 동안에 하박국 기도가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 잡기를 소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울산교회 설립 50주년이 2년 2개월 남아있습니다. ‘주여 이 일,이년 내에 주님의 일을 부흥시켜 주십시오. 주님의 일을 나타내 주십시오’ 라고 우리 울산교회 교인들 공동 기도제목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삶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올해도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도 떠나지만 정말 젊은 사람들 세상을 떠나는 것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아직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삶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진지하게 인생, 다시 돌아보는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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