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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디옥 교회의 부흥 / 행 11: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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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교회의 부흥
사도행전 11:19-30 


안디옥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480 Km(서울-목포보다 먼 곳) 떨어져 있는 지역입니다. 지중해 연안에 자리 잡은 고대 세계의 대 도시인 ①로마와 ②알렉산더 ③다음가는 세 번째의 도시가 안디옥입니다.
로마의 행정구역으로는 수리아의 수도였습니다.
당시 인구 50만이 살던 번화한 도시였습니다.

안디옥 시민들이 주로 섬기는 신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아스탈테(Astarte)였으나, 아폴로 신을 숭배하는 다페네(Daphene) 숭배로 유명했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잡신 숭배가 성행했습니다.
잡신 숭배가 고대 정신문화에 주축이 된 것은 안디옥도 예외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시민들의 생활은 당시로 보아서 부유했습니다. 그래서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로 인한 부도덕이 안디옥 도시의 대명사처럼 되었습니다.
저 유명한 마차 경기로부터 시작해서 미친 듯이 뛰는 스포츠들과 도박, 요사이 말로 나이트클럽 등으로 이 안디옥 도시가 가득 차버렸습니다.

안디옥은 여러 나라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일종의 국제 도시 스타일이 되고 있었던 도시였습니다. 로마인이 살았고, 헬라인이 모였고, 유대인들이 모여들었고, 그리고 시리아 등등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사는 당시의 국제성을 띠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당시의 국제 도시로 이 안디옥은 동서 무역이 활발한 요새지였습니다.

특별히 성경에 안디옥교회가 기록된 중요한 이유는 예루살렘의 유대교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극한의 박해가 있었을 때 이를 피하여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안디옥 지방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도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기독신자들이 신앙생활하기에 들어 난 예루살렘보다도 월등하게 좋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안디옥을 예루살렘 다음가는 세계 선교 기지로 작정했습니다. 알고 보면 안디옥 교회는 이방선교에 센타가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안디옥 교회의 부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1. 첫째 안디옥 교회의 탄생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안디옥교회의 탄생을 우리가 생각하면 은혜가 됩니다.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1:19-21절에 보면 

1) 안디옥 교회의 설립은 핍박의 산물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확실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19-20절에 보면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 순교를 당했습니다(행 7장).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 대대적인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습니다.
그 때 흩어진 사람들이 어디까지 흩어졌습니까? 안디옥까지 흩어졌습니다.
주 예수를 전파한 사람들은! 아마 헬라계 유대인 중에 개종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됩니다.

그 사람들을 가르쳐서 <몇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몇 사람의 그리스도인들의 입에 의하여 안디옥에 그리스도의 축복의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곧 몇 사람들 그리스도인의 입에 의하여 안디옥이라는 도시에 어마어마한 세계적인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 몇 사람 때문에 안디옥 교회는 부흥하게 된 것입니다.

저들 전도의 주제는 예외가 없이 <주 예수>였습니다. 예수는 퀴리오스, 주시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대단히 혁명적인 말이요 대단히 정치적인 색채가 있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 로마가 지배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퀴리오스라는 말은 로마 황제에게 전용되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새로운 퀴리오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퀴리오스라고 한 것은 로마 황제를 향한 반정부사상도 아니고 황제숭배 반대도 아니었지만은 이것이 로마 황제로부터 로마 권력자들로부터 기독교회가 핍박을 당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주시다>. 예수님은 퀴리오스다 이것은 오순절에 예루살렘 전도의 주제였습니다(행 2:36), 가이사랴 오순절의 전도의 주제도 주 예수였습니다(행 10:36).

중대한 사실은 교회가 환난을 당할 때에 그 환난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핍박을 당할 때에 그 핍박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의 산물이 안디옥 교회를 출산시키는 동인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이름으로 당하는 환난과 핍박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결정적인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 때문이 인권이 유린을 당하고, 가정이 탕진을 당하고, 자유가 박탈을 당하고, 고향과 친척들에게서 배척을 당하는 일은 또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수단이 됩니다. 믿기를 축복합니다.

핍박이 오면 올수록 위기가 오면 올수록 복음은 더욱 더 확장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복음을 지켜주시는데 누가 복음을 없앨 수 있습니까?
한사람이라도 더 구원키 위해서 예수님의 재림도 늦춰지고 있는데 어느 세력이 복음을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핍박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위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축복의 기회, 부흥의 기회, 믿음 성장의 기회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수난은 교회탄생의 근원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교회가 이 땅위에 출생했던 것처럼,
예루살렘교회의 수난이 세계적인 안디옥 교회를 출생시킨 것과 직결하고 있습니다.

2) 안디옥 교회의 출생은 주님의 능력의 결과였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설립은 주님의 기적적인 역사입니다.
몇 사람들의 입에 의해서 전달되는 주 예수! 큐리오스가 듣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손이 되어졌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21절에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더라>.
몇 사람들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그 시간에 주님의 손이 그 복음을 듣는 안디옥 사람들 위에 역사 했습니다. 
여기 <주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구약적 표현입니다.
<주님의 손이 역사 했다>는 말은 <성령의 능력 역사를 의인화> 시켜서 한 말입니다.

어린 아이를 아버지 어머니가 손에 손을 붙잡고 길을 인도하듯이,
전도를 듣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 가지고 저들을 주님의 성령이 교회로 예수 앞으로 인도했다고 하는 말을 주님의 손이 더했다고 하는 말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주님의 손이 애굽의 백성들에게 악질 재앙을 더하므로 출애굽의 역사를 나타냈던 사실이라든지(출 9:3)
주님의 손이 불레셋 사람들에게 주님의 손이 더하니까 불레셋 사람들의 다곤의 신들이 넘어지는 것이라든지(삼상 5장)
사도행전은 주님의 손이 더할 때에 병이 나았다 라는 말이든지(행 4:30) 
주님의 손이 사마리아성에 나타난 빌립의 전도에 나타나서 병을 고쳤다든지(행 8:6-7).
주님의 손이 사울을 붙잡을 때에 사울이 회개했다는(행 13:11) 사실을 가르쳐서 이렇게 주님의 손이 더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삶 전체에 주의 손이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기도할 때 주의 손이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전도에, 봉사에, 예배에, 헌금에 주의 손이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능력의 주의 손이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사업에 축복의 주의 손이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에 주의 손이 함께 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사도행전과 같은 부흥의 역사에 주의 손이 함께 하시길 소원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에 주의 손이 함께 하시면 다 성공할 줄 믿습니다. 

<주님의 손이 더하므로 안디옥의 교회가 출생했다> 이 말은 교회는 인적인 산물이 아니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100% 하나님의 산물이다.
교회의 출생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란 사실입니다. 안디옥교회가 그랬습니다. 

2. 둘째 안디옥 교회의 부흥과 성장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서자 마자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11:22-26절에 보면 그 안디옥 교회의 부흥은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첫째는 예루살렘 어머니 교회가 안디옥교회를 지원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어머니 교회(母 敎會)의 따뜻한 지원이 안디옥 교회의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2절에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는 세계 교회의 어머니 노릇을 하게 됩니다.
이미 예루살렘 교회는 사마리아가 복음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 직접 예루살렘 교회에 사역 자였던 베드로와 요한이 좇아 가 가지고 사마리아 전도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해준 일이 있습니다. 직접 가서 지원했습니다(행 8:14-15).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의 수제자 베드로로 하여금 이방 장교 고넬료의 집에 보내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게 하므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을 여는 역사가 있었는데 이는 예루살렘교회의 영적인 지원입니다(행 10장).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급파하였습니다. 바나바는!
① 착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행 11:24).
②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행 11:24).
③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권위자였습니다.
<예수 믿으라>고 권하고 위로하는 권위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소유를 팔아 가지고 연보를 드리므로 사도들이 복음 전파하는데 쓰라고 그렇게 헌신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행 4:36-37).
④바나바가 안디옥 복음 선교의 현장에 왔을 때, 안디옥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다>(행 11:23)고 하였습니다.
⑤이런 믿음직스러운 모범 지도자를 사도들에 안디옥에 보내어서 안디옥에 교회를 자라하는데 수종들게 하였습니다.
⑥그리고 바나바는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했다>(행 11:23)고 하였습니다.
여기 바나바가 가서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큐리오스, 너희들은 큐리오스 주에게 붙어있어라>.
돈에 붙어있지 말고, 이제는 아덴이나 안디옥에 아폴로 신전에 붙어있지 말고, 사탄에게 붙어있지 말고, 물질에 붙어있지 말고, 육신에 붙어있지 말고, 큐리오스= 주 예수님에게 붙어있으라고 전도했습니다.

2) 둘째 안디옥교회의 부흥은 복음운동의 지도자를 등용시키데 있었습니다.

25절에 보니까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기가 막힌 말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와서 실정을 보니까 자기 힘으로 제한을 느꼈습니다. <아 안되겠다 다소에 있는 헬라의 철학자, 이미 주께서 거듭나게 해서 신학자로 만들어놓은 그 지성인, 지장 명장, 영적인 장문이 지적인 장문인 바울을 불러서 안디옥의 지도자로 삼아야 되겠다>. 바나바는 사울의 인물됨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바나바가 이렇게 맘이 탁 터진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몸소 다소까지 가서 바울을 초빙하였습니다. 그리고 안디옥교회에서 함께 동역을 하게 되었습니다(행 11:26).
바나바는 국제도시 안디옥교회에 알맞은 인물로 바울을 지목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이 적격자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불타는 훌륭한 지도자 바울이 왔습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더불어 이 안디옥에서 일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부흥 사경회를 열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 교회는 성장과 부흥의 첩경이 됩니다.
바나바는 이미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사랑과 선행의 모범자로 이름이 높았습니다(행 4:36-37). 그러던 그가 다소의 거인 바울을 직접 찾아가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사역한 것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옳은 지도자 참된 지도자가 교회 부흥의 요인입니다.
나라가 잘되려고 하면 나라의 통치자가 건강해야 됩니다. 그 나라의 지도자가 지도력이 건강하지 못하면 그 나라는 예측하지 못하는 혼란에 빠져 들어갑니다.
가정의 아버지 어머니가 아버지 노릇을, 어머니 노릇을 제대로 못하면 그 아들딸들의 영적인 상태는 말할 수 없는 혼미상태로 빠져 버립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어떤 지도자가 교회를 목회 하느냐?
확실히 천당을 믿느냐? 목사가 확실히 목사가 지옥을 믿는 목사이냐
성경을 그대로 믿는 목사이냐? 그 목사가 장로 시키는 대로, 권사 집사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목사냐? 그 교회는 시끄러운 교회입니다.
성경에 생명을 걸어놓고 성경에 승부를 걸고 목사가 성경에 집착해서 하나님 앞으로 좇아가는데 장로와 집사가 목회에 협력하기 위해서 세움 받은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교회를 목회 했다는 것이 안디옥교회 부흥의 요인입니다.

3) 셋째 성경중심의 교육이 교회 부흥의 요인이었습니다.

26절에 보니까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자기가 초청한 바울과 함께 일했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교회 중심의 모임이었습니다. 1년 간이나 계속되는 모임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일년동안 모여있는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을 위주 하는 이른바 부흥사경회(復興査經會)를 했습니다.
부흥사경회를 성경가지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예언된 매시야 예수를 가르쳤습니다. 구원론적인 교육을 했습니다.

듣고 나가서 전도하고, 듣고 은혜 받고 나가서 또 전도하는 동안 1년 동안에 연속 부흥사경회를 하는 바람에 큰 무리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큰 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바른 지도자의 가르침과 거기에 모인 무리들 결과는 큰 무리 구원받는 숫자가 많아지는 대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교회 부흥의 결과를 맛보게 됩니다. 결국 성경은 교회 부흥의 전부입니다. 성경은 생명의 양식, 구원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4) 넷째 큰 무리의 증가였습니다.

21절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하였습니다.
26절에는 바나바와 바울의 가르침의 사역 결과 <큰 무리>를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신자 수가 많아진다는 것은 교회가 부흥한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주일학생들이 많이 모입니다. 중학생 고등학생이 많이 모입니다.

한국의 여성들이 자기 엔조이하려고 아들 하나 낳고 안 낳는다고 하는데, 그러지 마시고 교인들은 아들딸을 다섯 여섯 많이 낳아야 합니다. 그런 교회라야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전 세계에서 한국의 여인들이 아이 안 낳는 것이 일등입니다. 똑똑합니다. 아이를 안 낳을 바에야 여자가 아닙니다. 여자의 본분이 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나는 넷밖에 안 낳았습니다만, 예수 믿는 신자들은 적어도 여섯씩은 낳아야 되겠습니다. 더 많이 낳은 사람은 더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먹을 것도 없이 아이만 낳아 놓으면 무능한 아버지입니다.
좌우간 신자수가 많아지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왕성을 뜻합니다.
교회의 부흥은 구원인의 증가를 뜻합니다.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신 뜻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왜 안디옥교회가 부흥했습니까?

5) 다섯째 불신 세상 앞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음으로 부흥했습니다

26절에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그리스도인=크리스티아노스(cristianos)이란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의 소유>이란 뜻입니다.
불신자들이 하는 말이 <너희들은 로마 황제의 것이 아니고 너희의 황제는 큐리오스, 그리스도의 것이다>. 이 안디옥에 사는 불신자들이 그렇게 딱 붙여 가지고서 구별시켜 주었습니다. 
믿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자>란 말입니다.
믿는 너희들은 <그리스도 당원>이란 뜻입니다.
믿는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족속>이란 뜻입니다.

예수 믿는 너희들의 말, 너희들의 행동, 너희들의 목적, 너희들의 걸어가는 목적, 너희들의 문화, 생활의 양식은! 안디옥의 살면서도 너희는 우리하고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구나> 안디옥의 불신자들이 이렇게 자기들과 구별시켜 놓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처음 사용된 기독신자들의 이름이었습니다.
이때에 안디옥에서 나오는 이름은 그 때 구별시키는 단순한 이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①본문의 말씀대로 제일 처음 사용한 것은 안디옥에서부터입니다. 
②두 번째는 사도행전 26장 28절에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 도다>라고 한 경우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도할 때에 아그립바 왕이 높은 왕좌에 앉아 가지고, <죽은 다음에 사람이 부활이 있다>는 설교로 전도하는 바울을 볼 때에 기가 찼습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왕이 하는 말이 <네가 작은말로 나를 권하여(되지도 않는 말을 가지고 나를 권해 가지고 이 말입니다, 시시한 말로 나를 권해 가지고) 나를 크리스티아노스가 되기를 원하느냐 할 때는(나도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느냐 할 때는) 아그립바 왕이 바울을 꼬집는(비꼬는) 말로 사용한 경우입니다. 조롱하고 비웃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③셋째 많은 세월이 지나간 다음에, 베드로전서 4장 16절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라고 한 경우입니다.
이때 저 소아시아에 교회가 왕성할 때에, 그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참 안되었다. 너 예수쟁이가 되었냐> 이 말입니다. 요사이 말로 <너 왜 예수쟁이가 됐냐>는 말입니다.
그 때 그리스도인은 죽음의 이름이었습니다. 죽음의 개념으로 썼습니다. <너 죽으려고 낫구나. 너 어쩌다가 그리스도인으로 낳느냐?> 죽음의 대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흩어져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이름이 핍박받는 자의 대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쌓이고 2000년의 기독교 역사가 역사의 한가운데를 흘려올 동안에 오늘 크리스챤, 오늘 우리에게 준 크리스챤은 얼마나 멋진 문화인의 대명사입니까?
크리스챤 하면 얼마나 훌륭하고, 빛나는 지성인의 대명사입니까?
그리스도인 얼마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축복의 대명사가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안디옥에서 사용된 이 이름은 제일 먼저 사용된 이름이었습니다.
㉮ 불신자들에 의해 사용된 이름이었다는 말이 중대합니다. 저들이 우리를 <야아- 우리와 다르구나> 그렇게 살았단 말입니다. 저들이 볼 때 우리가 저들과 같이 사는데 다르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느끼도록 살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믿고 30년 50년 되었는데도 이웃 사람들이 교회 가는 것도 모릅니다. 어쩌다가 목사님이 심방가면은 <아 너 교회 나가냐> 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사 지내고, 이방 풍습 다 하고, 놀러 다니고, 이러니까 <너 교회 나가냐?> 그런 교인, 골란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없기를 바랍니다. 
㉯ 자신들과 구별시키는 무리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소속이 되었다. 이름은 대단히 요긴한 것입니다.
㉰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무리들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보통 안 믿는 유대인들은 예수 믿는 신자들을 <나사렛 사람들, 나사렛 놈들>, <갈릴리 사람들, 갈리리 놈들>(행 24:5, 1:11)이라 불렀습니다.
우리 기독 신자들 간에는 이름을 말할 때에 <형제>,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우리 기독신자들을 말할 때에 <크리스티아노스>로 사용됐습니다.
안디옥에서 믿는 무리의 수가 많아졌을 때, 불신자들이 자기들과 구별시키기 위해서 사용한 <그리스도인>이란 이 말은 2세기에 와서야 교회가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고 보편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황제들의 박해가 작열할 때 예수 믿는 신자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 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종교개혁 때에는 여러분 당시 로마 카톨릭에 의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이름을 천주교회에서 우리에게 붙였습니다.
이 프로테스탄트란 말은 좋게 번역하면 <항의자>지만은 그 당시에 프로테스탄트란 단어의 개념은 <미친개다> 주인에게 돌아서서 주인을 물어뜯는 그런 용어를 두고 항의자 프로테스탄트라고 하였습니다.
로마 천주교 지도자들이 종교개혁자들과 그를 따라가는 신교 교도들을 미친개라고 교회사적인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세요. 지금 프로테스탄트 하면 얼마나 이 이름이 교회사에 빛나는 이름입니까?
프로테스탄트 하면 얼마나 선진 의식을 가진 사람들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역사의 선각자로 이 이름이 성화 되고 있습니다.
좌우간 안디옥에서 불신자들의 도시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불신자들이 호칭은 했다는 사실은 벌써 안디옥에 예수쟁이들의 어떤 물결이 어떤 기독교 문화가 어떤 기독교 영향이 안디옥을 스며들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재력이 없어도 권력이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힘이 있었습니다. 향기가 있었습니다.
안디옥 도시에서 예수 믿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만큼 사회적으로 공인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안디옥 도시에 새로운 기독교 문화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는 사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 부흥의 표적이었습니다.
또 이교회의 부흥은 !

6) 예루살렘 모교회(母敎會)를 위하여 사랑의 구제를 실행함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 본문 27-30절에 보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이 들었을 때에 안디옥교회가 여러분이 함께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연보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연보를 교회가 해 가지고 교회의 지도자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까지 가서 교인들에게 전달하지 아니하고 교회의 대표인 장로들에게 헌금을 전달했습니다.
안디옥의 이방교회가 부흥 발전할 동안에 유대에는 기근이 일어나고 예루살렘 모교회는 곤궁에 빠졌습니다.

이때 안디옥 교회는 구제금을 모아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보내었습니다.
①그것은 유대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안디옥 교회가 형제가 되었다는 웅변적 입증입니다. 연보를 보냈다는 이 말은 국경과 혈통과 문화를 초월하는 동질적인 형제가 되었다, 영적 형제애를 나타내는 표적이 되었습니다.
이방교회가 유대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연보를 보냈다는 말은 !
②유대 기독교회와 이방 기독교회가 하나가 되었다는 웅변적 입증입니다. 이렇게 사랑전달의 매개체인 돈이(연보가) 그렇게 귀중한 역할을 했습니다.
③동시에 이 연보는 바울과 바나바가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람에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을 두 번째 방문하게 되는 큰 의의가 있습니다.
바울이 처음에 은혜 받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는 예루살렘 사도들이 바울을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 <핍박자>라고 뭐 아주 서먹서먹했습니다(행 9:21).
그 때 바나바가 들어 가지고 바울이 은혜 받고 주님을 만난 사람이고 열심히 소개를 해 가지고 겨우 교제가 성립이 되었지만(행 9:27-28).
지금은 이제 바나바가 바울과 함께 연보를 해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이 일로 인해서 예루살렘의 지도자와 이 바울 사이에 새로운 동질형성이 이루어지는 그런 개기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모교회를 향한 안디옥 교회의 구제 연보는!
① 믿는 자들이 믿는 자들에게 보내는 연보였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제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행 11:29).
② 개인적인 특별 연보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각각…> 연보 했다고 하였습니다(행 11:29).
③ 힘대로 하였던 자원의 연보였습니다(행 11:29).
④ 그리고 공동적인 합심의 연보였습니다(행 11:29). <작정>을 하였다함은 공동적인 합의를 뜻하고 있습니다.
⑤ 그리고 그 연보를 전달할 때에는 교회의 대표였던 바나바와 바울에 의해서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에게 공적으로 전달된 일이었습니다(행 11:30). 오늘 우리 교회들에게 공금처리에 큰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는! ①몇 사람의 피난 신자들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습니다. ②안디옥교회는 환난의 산물로 출생했습니다. ③안디옥교회는 주의 권능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크게 부흥하고 성장했습니다.
그 비결은! ①예루살렘 모교회의 영적 지원 때문이었습니다.
②바른 지도자들의 바른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③성경 중심의 교회 교육 때문이었습니다.
④큰 무리의 증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⑤불신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받은 일 때문이었습니다.
⑤뿐 아니라 예루살렘 모교회를 위한 사랑의 연보로 하나 되는 교회 운동을 나타낸 사실 때문입니다. 이는 모두 교회 부흥의 표적들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세워진지도 얼마 안되었지만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구제헌금을 정성껏 보아 보냈다면 !
우리는 한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어려운 교우를 보면서 무관심하고만 있지는 않습니까?
자녀들 학비 때문에 어려운 교우가 있을 것이고
쌀이 없어서 어려운 교우도 있을 것입니다.
병원비가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한 체 병을 키워 가는 교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분들을 볼 때 어떤 느낌이 옵니까? 가슴이 아프지 않습니까? 그들의 어려움이 내 어려움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구제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이 있는 일>입니다.

3. 안디옥 교회 부흥의 의의

안디옥 교회는 세계 선교의 중대한 본이 됩니다. 안디옥교회가 부흥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몇 가지 큰 교훈을 줍니다.

①첫째는 이방에 처음으로 주의 교회가 탄생했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의 복음이 땅 끝까지로 향하는 첫 번째 단계가 되었습니다.
②둘째로 안디옥 교회 설립은 이방 선교의 전략적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는데 두 번째 의의가 잇습니다.
복음이 세계로 향하는데 국제 도시 격인 안디옥은 참으로 적합했습니다.
③셋째로 이방 선교사로 부름 받은 바울의 처음 활동 무대가 되었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④넷째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게 되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 끼치는 새로운 영향력이 어떠했던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것은 사실상 전 세계 기독신자들에게 새로운 신분의 공감대를 이루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⑤다섯째로 복음 운동의 확장을 의미함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① 공간(장소=지역)의 확장입니다.
② 복음 전도 대상의 확장입니다(유대인|+헬라인+로마인+기타).
③ 수적인 증가입니다. 모든 사람, 모든 족속이었습니다.
⑥여섯째로 신자들로 하여금 복음 선교의 의무는 특별하게 부름 받은 지도자 뿐 아니라 평신도들의 의무도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자들은 사도들이 아닌 일반 신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몇 사람의 신자들의 입에 의해서 그렇게 엄청난 세계적인 인디옥교회가 출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디옥교회는 바로 우리 광성교회가 되어야 됩니다. 믿기를 바랍니다.
안디옥 교회의 부흥은 바로 광성교회의 부흥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서 안디옥교회의 부흥을 통하여 우리 광성교회가 얼마나 닮아 가느냐? 얼마나 우리 광성교회가 안디옥교회와 동질성을 가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위대한 복음 운동의 세계 선교 작전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복음이 세계로 가는 하나님의 선교 작전은 예루살렘 교회가 순교의 피를 쏟는 교회의 환난을 통하여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신자들로 하여금 피난을 하게 하고, 피난 갔던 신자들이 예수를 증거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주의 권능의 손이 더하게 하였습니다.
몇 사람의 입술에서 전파된 예수가 마침내 국제 도시 안디옥을 복음화 하여 그리스도인의 도시가 되게 해버렸습니다.
그 확실하고 분명한 이유는 죽음을 통하여 생명이 나오는 위대한 십자가의 진리 때문입니다(요 12: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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