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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초대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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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초대
(마11:28-30)
 
 
  저는 12년 동안의 외국생활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지낸 세월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많이 배우고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저에게 도움을 주었던 여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 영국사람을 잊지 못합니다. 외국생활을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처음 6개월이 가장 힘듭니다. 언어와 문화와 생활습관이 다른 곳에서 적응하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영국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때였습니다. 그때 왜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나는지, 아마 저에게는 그 때가 향수병의 절정을 이루었던 기간이라고 생각됩니다.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어디 갈곳도 없이 쓸쓸하게 지내야 할 영국에서의 첫 번 크리스마스 날, 저희 가정을 정중하게 초대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저희들이 사는 동네 교회의 집사님이셨습니다. 정성스럽게 카드를 만들어 보냈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즐거워하자는 내용과 함께 꼭 와달라는 부탁을 겸한 초대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와 같은 사람은 관심 밖의 대상인 이방인인데 그 부부는 그 해 크리스마스를 우리와 같이 보내려고 준비했던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파티에 참석했을 때 우리는 더욱 놀랐습니다. 같이 초대되었던 교회 여러 가정이 있었는데, 그날 파티는 처음부터 저희들을 위한 배려로 짜져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외롭게 쓸쓸할 때, 저와 가족의 마음을 훈훈하고 따뜻하게 해주었던 그 초대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본문은 바로 우리 인생에 감동적이고 잊지 못할 초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삶에 지친 사람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 그리고 문제와 염려 속에 있는 사람들을 안식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곳에서도 느끼지 못한 편안함, 세상의 어떤 사람에게서도 듣지 못한 진리의 말씀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를 향해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위로와 힘을 주는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예수님의 초대에는 분명한 대상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초대하고 있을까요?

  첫째는 '수고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우선적으로 '수고하고...' 라고 말씀하시면서 수고하는 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 안식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얻을 첫 번째의 대상은 수고하는 자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수고하는 자가 아니라면 이 초대에 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 가운데 수고하는 자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귀를 막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수고의 삶입니다. 수고하지 않는 것은 인생이 아닙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에게 주어진 결과였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종신토록 수고하며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어려움은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게 가장 힘든 것입니다.

  수고의 인생인 것을 알게 하는 통로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 몸에서 배출되는 3가지의 액체로 압니다. 우선 '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땀을 흘리며 삽니까? 지난 한 주간도 삶의 현장에서 땀을 흘렸습니다. 땀은 수고의 결과입니다. 수고할 때 반드시 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땀은 인생이 수고하며 산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증거해 줍니다.
둘째는 '피'입니다. 피는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입니다. 피는 우리 몸의 내부에서 순환됩니다. 그런데 가끔 피가 밖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보며 많이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우리 몸에서 피가 나오는 것은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수고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수고하다가 결국 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흘리신 피가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수고의 결과입니다. 주님은 피를 흘리시기까지 크게 수고하셨던 것입니다.
셋째는 '눈물'입니다. 눈물은 감정의 표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눈물은 인생의 수고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눈물이 마르지 않는 인생을 삽니다. 아파서 울고, 슬퍼서 울고, 괴로워서 울고, 힘들어서 웁니다. 우리 삶에 잠시라도 눈물이 그치지 않습니다. 바로 수고의 인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면 눈물부터 닦아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물은 수고의 결정체입니다.

  땀과 피와 눈물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렇게 인생은 수고하며 삽니다. 그런 수고하는 자를 지금 주님이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수고하며 살았습니다. 지난주에도 많이 수고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수고하며 살아야 합니다. 땀을 흘려야 하고, 눈물이 그치지 않고, 피를 쏟아야 합니다. 그런 수고하는 인생을 향해 주님이 안식과 평안으로 초대하십니다. 주님 앞으로 달려나와 수고하는 우리를 감싸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위로로 힘을 얻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무거운 짐 진자'입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음성이 어떻게 이어지는 가를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무거운 짐 진자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무거운 짐이 무엇이겠습니까?

  유대인에게 적용할 때 이 짐은 의식과 율법입니다. 율법이 그들에게는 멍에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29절에 멍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처음 율법을 주었을 때의 목적과는 다른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율법은 멍에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감사와 은혜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사람들이 율법을 멍에로 알고 그것을 메고 지고 갔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율법의 짐, 의식의 멍에로 고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고, 그것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이 그들의 멍에요 부담이요 짐이었습니다.

  당시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적용할 때 이 무거운 짐은 고민과 문제, 염려와 걱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를 풀면 또다시 접근하는 문제들, 한 고개를 넘으면 깊은 골짜기가 있는 인생의 염려, 바로 그것이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 문제를 풀고, 그 짐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주변에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난과 억압과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만이 그 무거운 짐을 풀어 주실 수 있는 것을 알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바로 인생의 고민과 염려가 여기서 말하는 무거운 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여기에서 근본적으로 말씀하시는 무거운 짐은 바로 죄입니다. 죄가 사람을 짓누르고, 죄가 인생을 비참하게 합니다. 주님은 지금 죄인을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죄인을 부르십니다. 죄가 우리 인생을 가장 무겁게 하는 짐입니다. 이것이 늘 우리의 부담입니다. 너무도 무거운 짐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 라는 유명한 작가를 아실 것입니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학가입니다. 그가 쓴 소설 중에 '죄와 벌'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어느날 주인공이 자기철학과 관념 속에 빠져 고리대금업자를 살해합니다. 악덕한 사람, 부당한 사람은 죽여도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위는 뜻밖에도 그를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괴로워하는 비참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결국 자기 이론의 추악한 투영을 보고 마침내 자수하여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강조하려는 것은 바로 죄의 짐과 그리스도안에서의 해결입니다. 작가는 젊은 시절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사람입니다. 시베리아로 유배되어 지내는 동안 그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은혜를 알기까지 그를 편치 않게 했던 것이 바로 '죄'였습니다. 그는 죄가 가장 큰짐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이 그것을 풀 수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절대적인 진리 위에 죄와 벌이 쓰여진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무겁고 비참한 것은 죄요, 그 짐을 풀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만이 가능함을 작품을 통해 보여준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가장 무거운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짓누르고, 편치 못하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부담을 안고 삽니다. 업적을 남겨도, 뭔가 큰 일을 해도,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죄의 짐을 벗지 못하면 죄와 벌의 주인공처럼 자기철학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죄의 짐을 지고 가는 인생을 향해 주님이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무거운 죄의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다시 시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모두 다'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초대는 모두 다 부르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여기 '다'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부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보편적인 것입니다. 모두 다 예수님의 초대를 받고, 모두 다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의 초대는 인종을 초월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모두 다 초청합니다. 예수님시대 유대인은 자기만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방인은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방인도 사랑하셨습니다. 사마리아여인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는 인종의 구별이 없었던 것입니다.

  한때 백인은 흑인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링컨이 해방을 선언하기까지 흑인들은 백인의 노예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백인과 흑인의 갈등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습니다. 미국은 인종간이 갈등이 아주 심각한 나라입니다. 겉으로는 모든 인종을 운운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와 성도입니다. 사회가 그렇다고 해도 교회는 성경의 본질과 예수님의 본심을 잘 헤아려 바르게 실천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도 미국에는 여전히 흑인교회가 있고, 백인교회가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 정도인데, 옛날에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예시대 흑인들은 백인과 같이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배당이 아닌 들판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의 서러움과 한을 노래한 것이 흑인영가입니다. 흑인영가는 당시 고통받았던 인종의 갈등을 잘 대변해 줍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계층도 초월합니다. 종이나 주인이나,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어린아이나 성인이나, 모두 다 예수님이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계층이 있습니다. 심하고 아주 노골적입니다. 지방색도 있고, 우열도 있습니다. 상하의 구분이 뚜렷하고, 넘어서지 못할 벽이 장대와 같이 높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계층을 초월합니다. 어느 특별한 계층을 선호하거나 옹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한 자라면 모두를 품어야 합니다. 최근까지 한국교회 안에도 특별한 계층이 모이는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체육인들이 모이는 체육인교회, 연예인이 모이는 연예인교회, 젊은이가 모이는 젊은이교회, 부자들만 모이는 부자교회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교회가 계층을 초월하지 못하고, 보편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교회일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누구에게라도 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문턱이 높지 않아야 합니다.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 다양함 속에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속성이이요,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성별도 초월합니다. 남자나 여자 모두가 초청대상자입니다. 역사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숫자에는 한결같이 여자가 제외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기도문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우리 나라도 오랫동안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남녀평등을 넘어서 여자우월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에는 남자가 여자를 구타하여 문제가 되었는데, 요즘은 여자가 남자를 구타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옛날에는 아내들이 남편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했는데, 이제는 남편이 아내의 눈치를 살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치우친 것입니다. 이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주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입니다. 모두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요, 모두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할 초청대상자입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교회는 모두를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앙의 세계는 치우침이 없어야 합니다. 특별한 의식이나 계층을 형성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 부르십니다. 인종을 넘어, 성별을 떠나, 계층을 지나 모두를 초대하십니다. 이 은혜로운 초대에 우리가 부름을 받은 대상자인 것을 아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본심을 따라 우리도 모두를 수용하고 사랑하고 품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오늘 여러분과 저를 은혜와 안식으로, 구원과 소망으로 초대하십니다. 세상에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이 은혜로운 초대에 모두가 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이 초대장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들을 예수님에게로 이끌어야 합니다. 수고하는 자, 무거운 짐을 진자, 그리고 인종과 성별과 계층을 초월한 모든 자를 부르시는 이 주님의 초대에,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안식과 평안과 구원과 해결을 보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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