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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과 위로 [고후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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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고난과 위로 <고후 1:3-9><2003년 11월 9일>


□ 고난과 위로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
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
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
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
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
여 우리가 받는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
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
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
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1:3-9>

어느 교회학교 선생님이 유치반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그 날 공과공부 제목
이 '하늘 나라에 가는 길' 이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만일 집을 팔아서 몽땅 교회에 헌금한다면 천국에 갈 수 있겠지
요?" 라고 묻자, 아이들은 일제히 "아뇨" 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선생님은 "그러면 내가 매일 교회 청소를 하고, 유리창을 닦는다면 천국
에 갈 수 있겠죠?" 라고 하자, 이번에도 아이들은 일제히 "아뇨"라고 대답했습
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죠?" 라고 물었습니
다. 그러자 다섯 살 먹은 사내 녀석이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선생님이 죽어야
돼요"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국민 일보에 실린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철부지가 한 말이지만, 바로 그 말이 진리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모든 것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것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내 겉 사람이 살아서, 이 겉 사람의 속한 모든 것들이 살아서 천국과는
먼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1. 우리의 삶 중에서 무엇이 제일 두려운가? 묻는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예고 없이 닥치는 사고와 죽음일 것입니다.
삶 속에는 행복한 순간들도 있지만, 예기치 않는 사고, 시련, 죽음 등의 환난이
우리들을 항상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신실한 신앙인이라고 해서 <환난>과 <고통>으로 부터 면제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 보다 더 많은 고통(苦痛)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안과 밖에서 오는 고통을 인내해야 했었습니다.
안으로는 이단들의 활동으로 신앙을 와해시키려고 했고, 밖으로는 로마제국의
황제 숭배로 핍박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은 안에서의 배반자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순교의 자리로 끌려가게 되는 것을 보면, 안에서 밀고자들에 의해 저질
러진 일들이었습니다. 왜정치하에 있었을 때 애국지사들이 잡혀 옥고를 치르
게 된 대부분도 안으로 부터의 밀정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그러한 박해와 핍박의 고통은 없어졌어도 타락한 물질문명
의 문화 속에서 믿음대로 살려고 할 때 당하는 고통은 여전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물리적 박해와 핍박에서는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이 더욱 생겼지
만, 이렇게 화려한 물질문명의 풍요로운 세상에서 {가난의 시련}, '생활고에서 오는 차별', 그리고 '신앙으로 인한 따돌림'들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
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대로, 믿음대로, 하나
님 중심으로, 자기를 죽이면서 살고자 하는 삶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요즘도 이
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온다는 말입니다.
이런 고난이 싫어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
니겠습니까? 그래서 술 좌석에도 앉고, 그래서 노름판에도 앉고, 그래서 옳은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 길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
까?

2.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그 고난에는 <위로>가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
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
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
라"(요15:18-19)고....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고통 받는 것이 싫어서 세상과 비슷한 색깔을 택합
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중요직책 100명의 종교 현황을 조사한 것을 보면,
① 기독교 42명, ② 천주교 20명, ③ 불교 9명, ④ 무종교 26명, ⑤ 기타 3명이라
고 합니다. 기독교 42명과 천주교 20명을 합치면 62명이 하나님을 경배하
는 신앙인들입니다. 즉, 우리 나라의 중요한 직책 중 62%가 기독교인들이란 말
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왜 중요직책의 자리에 기독교인들이 들어가 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변화되지 않습니까?
이 문제를 한국 교회는 심각하게 받아들여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바닷물은 염분이 5%만 들어 있어도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님 말씀이,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고 하였습니다. 소금이 소금의 맛을 잃어
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어 버렸으면, 소금은 쓸모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이 사회에서 필요한가? 하는 의문을 일으킵니다.
그러니 사회 법정에 도리어 교회문제를 다루게 되어 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서도 쩍하면,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세상 법정보다 교회의 신앙적 행위가 위에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
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법정에서 시비를 판가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본
말이 전도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이런 삶을 살게 되면 이중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에서
는 하나님의 위로를 전혀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은 위로함이 따릅니다.
주님이 나의 고난과 함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초대교인들이 세상을 이길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지금도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위로의 약속은 함께 하십니다.
3.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면서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합니다.
성도들이 말씀대로 살려다 받는 고난에는 주님의 위로하심이 함께 합니다.
성도들이 고난 중에 있을 때 세상적인 위로를 구한다면, 거기에서는 위로를 받
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을 위로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고난을 몸소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
로하고 계십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그런 고
난을 당해 본 사람이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갖은 멸시
와 천대를 다 받으시고, 죄 없는 몸이 죄인의 형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이상 더 큰 고난을 받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어떤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도 위로할 수 있는 분입니다.
복음성가 중에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 중에서도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고 하고 있습
니다. 사실 고난 중에서라야 하나님의 위로를 가깝게 느끼게 됩니다.

심방 중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내가 시집살이 하는 동안 우리 영감 때문에 그나마 살았답니다.
시어머니가 어찌나 못살게 하던지 도저히 살 수가 없었어요. 치마 뒤집어쓰고
연못에 빠져 죽으려고도 했고, 양잿물 마시고 죽으려고도 했고, 몇 번이나 죽으
려 했지만, 그때마다 남편이 밤에 잠들기 전에 말 없이 제 손을 꼬옥 붙잡아 주
었답니다. 거칠거칠한 손, 고되게 일한 그 큰 손으로 꼬옥 잡아주면... 눈물이
흘러 넘쳤어요. 저는 남편 때문에 그 고된 시집살이를 살았습니다" 라고 했습니
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오늘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려다 보면, 갖은 비난과, 조롱과, 멸시와 천대
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더욱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방해하는 것들
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주님의 손길은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고난이 크고 많을수록 '예비된 위로'도 더욱 풍성합니다. 성경에 보면, 고난과
위로는 항상 붙어다니는 이웃사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이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방관하고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위로함으로 채워 주십니다.
이사야 46:3-4절에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찌어
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
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고 하였습니
다.
오늘도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우리 주님은 위로의 손길로 안아주십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러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고난과 위로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용하고, 또한 위로를 베푸는 데는 분명한 목
적이 있습니다.
① 가장 큰 목적은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바
라보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
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
다. 
성도가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손길을 바라게 하십니다. 사실 보면, 사람이 부족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찾게 되지 않습니다.
찾더라도 형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생이 힘들고 괴로움이 있을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됩니다.

② 또 고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4절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
시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성도가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그만 마주 오는 차와 충돌을 하여 그 자리에서 죽었습
니다. 이쯤 되면 누가 무슨 말로 위로를 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의 위로도, 심방오는 것도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러다 몇 달이 지났습니다.
두문불출하던 그에게 같은 아파트에 사는 가난한 가정의 노(老) 부부의 위로를 듣고 일어났습니다. 이
노(老) 부부의 아들 둘은 모두 특이한 병으로 둘씩이나 먼저 하늘 나라로 보내
는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저 늙은 부부는 아들 둘을 잃고도 사는데....'
세상에는 나보다 더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는 그런 것 때문에 위로를 받고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합니다. 슬픔은 슬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서로 아는 법이란 말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세상에서 제일 천대, 멸시, 조롱, 매맞음, 침 뱉음, 십자가까지 진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 없는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위하여 참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죄 없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십니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십니다.
우리 모두 이 위로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서로 위로하면서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
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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