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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하필 예수님입니까? (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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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예수님입니까?
(요한복음 3:16)

사람은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무엇인가를 날마다 선택하며 삽니다. 누구나 자기에게 유익을 주거나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TV에 나온 연예인에게 왜 그 남편을 선택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한결같이 성격이 좋다거나, 멋있게 생겼다거나, 여러 조건이 자신과 맞아서 그랬다고 대답한다. 선택한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아침 선택의 갈등을 겪은 후 이 자리에 다 나아왔습니다. ‘교회에 갈 것인가? 그냥 ‘방콕’ 가거나 ‘방글라데시’ 갈 것인가?, 교회에 갈 것인가? 아니면, ‘TV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하며 TV를 목자(牧者) 삼을 것인가?, 교회엘 갈 것인가? 일하러 갈 것인가?’ 다행히 여러분은 교회를 택했기 때문에 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저를 만난 것이 여러분의 일생에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오늘 여러분은 기가 막힌 또 하나의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예수입니까? 세상에 훌륭한 인물이 많고 많은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잘못 선택해 놓으면 일생 그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불행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보다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 훨씬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마11:28)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지금 여러분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로 위대한 철학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남이나 사물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인간관은 「무거운 짐 진 자」입니다. 여러분 중에 짐을 안진 자는 한 분도 없습니다. 이 걸 해결해야 합니다.

1) 석가모니는 인생의 사중고를 말했습니다.

(1) 사는 것 (2) 늙는 것 (3) 병든 것 (4) 죽는 것이 고생이라고 말했습니다.

2)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에도 네 가지 인간의 짐을 말했습니다.

(1) 경제적인 짐입니다. 실직, 빈곤, 굶주림, 헐벗음 등을 말합니다.

(2) 정신적인 짐을 말했습니다. 불안, 초조, 고독, 절망 등의 짐입니다.

(3) 생 자체에 일어나는 짐을 말했습니다. 질병, 이율배반적인 모순, 죄로 인한 죽음, 신음 ,괴로움, 비명(非命) 등의 짐입니다.

(4) 종교적인 짐이 있습니다. 율법적인 행위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3) 실존주자 칼 야스퍼스(K Jaspers)는 극한상황을 말합니다.

인간은 상황적인 존재로 그때그때 대처하지만 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한계상황이라고 합니다. 한계상황은 (1) 죄와 허물 (2) 고통 (3) 병 (4) 우연한 염려 (5) 투쟁과 전쟁 (6) 죽음 등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무거운 짐을 말한 성현, 철인들은 많지만, 해결해 주겠다는 사람은 딱 한 분이 계십니다. 오직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모든 짐을 져줄 테니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으면서 큰소리치면 안 되겠지요? 예수님은 죄 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1) 죄의 해결자

죄 문제로 고민하던 사람이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공자님을 찾아갔습니다. 「획죄어천이면 무소도야라 (獲罪御天 無所陶冶)」 ‘즉 하늘에 죄를 범하면 사함 받을 길이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석가모니에게 갔더니 ‘전생에 죄를 지었으면 이생에서 그 죄의 업보를 받을 것이고 이생에서 죄를 지었으면 내생에 그 업보를 받아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난행고행(難行苦行)으로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오라 우리가 서로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이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이사야1:18)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예수님 앞에 나오면 해결 받을 수가 있습니다. 살인강도가 예수님께 회개하고 낙원에 갔습니다. (요일1:9)에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2) 죽음의 해결자

실존주의 철학자요 신학자인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인간이 불안해하는 것은 죽음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요11:25)에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사는 소망이 있기 까닭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죽음을 호령하였고 성 프랜시스는 죽음을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3:16)에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영생(永生)은 바로 죽음을 정복하며 사는 인생을 말합니다.

자 결단하십시오.

어느 중국 사람이 쓴 글 가운데에 「내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험한 세상을 살다가 실수해서 깊은 우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내려다보고는 “아이고 이 일을 어찌할꼬. 아무래도 당신은 전생에 죄가 컸구먼. 그러니 참회하며 살다가 저승에나 가게나”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이 들여다보고 하는 말이 “사람이란 아차 하면 실수하는 법이니 이번 일을 거울삼아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니 않도록 조심하게” 하면서 지나갔답니다. 지금 죽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사람이 들여다보더니 “이거 큰일 났구나”하고 놀라면서 급히 사다리를 구하여 직접 내려와서 자기를 구해 주고는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비유하기를 첫 번째 사람은 석가모니이고, 둘째 사람은 공자이며, 세 번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높은 보좌에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만 있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살 것이다라고 소리만 지르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왜 잘못했느냐고 비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친히 사람의 몸으로 종의 몸을 입고 구유에 오셔서 섬기시고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여러분,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 예수를 믿고 영접하기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계3:20)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필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까? 누구를 믿어도 선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는 구원과 영생을 줄 분이 없습니다. 예수 믿으라는 얘기는 선해지는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구원과 영생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에 이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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