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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 요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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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15:7 
제목 :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찾아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리고 좋으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나오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간 동안 특별기도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날부터 1000명을 돌파하는 놀라운 기록으로 출발해서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반기 세이레특별기도보다 250명 이상이 더 참여하는 것이고 주일 예배하는 사람들 가운데 둘 중의 한사람은 다 참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울산교회는 한 단계 더 결속되고 부르짖는 자리로 올라섰습니다.

이 하반기 세 이레특별 기도회를 통해서 놀라운 응답을 받는 기도의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홈페이지를 열면 바로 세이레 기도응답 배너가 뜹니다. 거기를 클릭해서 여러분의 기도응답 사연들을 남겨주십시오.

컴퓨터를 못한다고요? 그러면 구역에 있는 젊은 분들에게 부탁하십시오. 아무도 못한다고요? 그럴 때는 지구 담당교역자들이 도와줄 것입니다. 전화나 만나서 이야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여러분 대신 교역자들이 거기에 여러분의 그 은혜의 체험들을 기록해 줄 것입니다. ‘목사님, 문제는 그것이 아니고요, 응답받은 내용이 없습니다.’

예,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서 그 부분을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기도응답을 받으려면?”으로 잡았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일 “그는 기도할 것이라”는 제목으로 기도의 네 가지 목적에 대해서 살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기도응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기도응답의 다섯 가지 조건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목사님, 기도해봤거든요, 그런데 응답이 없어요, 문제가 있어서 기도했습니다. 한동안 기도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아무런 결과를 볼 수 없었거든요, 실망도 되고 정말 기도응답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이제는 의심마저 됩니다.” 혹시 이런 이야기가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는 아닙니까? 아직 그래서 기도의 자리에 발을 내딛고 있지는 못 하는 분 없습니까?

정직하게 분석하면 수천가지 기도는 올라가지만 응답되어 내려오는 기도는 매우 적다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원인이 무얼까요? 기도는 우스꽝스런 코메디입니까? 아니면 미신적인 행동입니까? 아니면 실제로는 응답되지 않지만 되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는 사기극입니까? 도대체 기도란 무엇입니까?

그보다 더 긴급한 질문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누가 무슨 기도를 해도 다 응답해 주기로 약속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의 기도는 듣지도 않고 폐기처분합니다. 후안 카를로스라고 하는 사람은 “당신의 기도는 하늘에서 잡동사니”취급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의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도 응답이 되려면 그 조건에 부합하게 드려야만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부족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긴 하지만 바로 배우고 적용해야 성숙한 신앙의 자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처음 교회에 와서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처음 오면 신앙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어린아이가 처음부터 똥오줌을 가립니까? 못 가려도 부모는 사랑합니다. 다 뒤치다꺼리해서 키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만큼 어른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돌도 지나고 나이가 먹어 가는데도 계속 그 상태에 남아 있으면 부모가 사랑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 아이는 결코 부모의 기쁨이 될 수는 없습니다.

기도가 응답되려면 첫 째로, 반드시 하나님과 정직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아름다운 약속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모든 약속처럼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달리 말해서 “너희가 나하고 정직한 관계를 맺는다면”이런 단서가 붙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바로 이어 나오는 구절이 설명합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기 전에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부모자식간에도 그렇지요? 요즘은 부모에게 막 대드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조금 질서가 잡힌 집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자녀들도 부모님께 말씀 드리기도 하지만 일단 부모가 말씀할 땐 조용해 지는게 아닙니까? 부모 말 먼저 들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안 듣고 하나님보고 “내 말 들으시오 내말 들으시오” 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을 무시하면 하나님이 우리 말에 왜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하나님과 정직한 관계를 맺는 것이 응답 받는 기도의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배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목사님 그러면 성경을 배우지 않으면 기도응답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혹시 여러분이 그렇게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앞서 말한 것처럼 때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중얼거려도 하나님께서 알아듣고 도와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리면 더 효율적인 기도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정직한 관계를 가졌는지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첫째로 요한일서 1장에서는 지난 잘못을 인정하느냐 않느냐를 살핍니다.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진솔한 관계를 가진 사람은 자기의 옛 잘못에 대해서 계속 변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죄 고백이란 무엇입니까? 죄 고백이란 하나님과 정직한 관계를 회복하는 방편입니다. “하나님 생각해보니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시비하고 고함치고 다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옳습니다. 저는 잘못했습니다. 잘한 게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집니다.

과거뿐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 하라고 하는데 계속 민기적 거리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계속 “안돼” 하는데도 자꾸 “하나님, 하나님 그러면 안 될까요? 한번 더 생각해 주십시오.” 이렇게 설득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선지자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축복 하는 게 옳습니까? 저주 하는 게 옳습니까? 누가 저주하라 그러면 그것 때문에 내가 저주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해야 됩니까? 선지자 같으면,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면 하나님 백성을 저주하라는데 팔려가서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오죽 답답하면 나귀가 입을 열어 선지자보고 야단을 쳤겠습니까? 사람만 속이 터지는게 아닌 모양입니다. 말도 안되는걸 가지고 “하나님 이거 할까요 말까요”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뻔한 일 가지고는 그러는게 아닙니다. 그건 기도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되는데 하나님의 성가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는 거지요. 순종이란 행동이라기보다 마음의 태도일수 있습니다. 바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내가 이제부터는 하나님 한분위해 살겠다. 내가 이제부터는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겠다. 이런 마음의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에게 제 방을 치우라고 하면 그 아이가 얼마나 잘 치울 수 있을까요? 30분 후에 들어가 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손도 대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다 청소가 되어져 있겠습니까? 그럴리 만무합니다. 말하고 나서 30분 후에 들어가 보십시오. 다시 손 될 일 없이 완벽하게 치웠을까요? 엄마 말에 순종해서 청소를 해서 최선을 다해도 그 수준은 아닙니다. 완벽하진 않아도 최선을 다했다면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만약 30분 후에 들어가 보니 방은 손도 안 대고 더 어질어놓고 있으면 그때 야단 맞는거야 누가 말리겠습니까? 완벽을 요구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하면 부모는 만족하며 기뻐합니다.

과거 잘못, 현재 순종 뿐만 아니라 내가 정말 하나님 뜻대로 앞으로 살기를 원하는가.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기도에 관해서 저지르는 큰 실수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제가 구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면 이루어 주십시오.” 그러고 있습니다. 자기 양심이 알잖아요? 산뜻하게 하나님 주셔야 됩니다. 이렇게 나올 수 없는 양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면 도와달라고 자꾸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이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 무엇이 당신의 뜻입니까?”하고 매달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하나님 내 삶 전부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까? 내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 결단의 기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삶이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룬다면 어떻게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게 되어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나서는 마음대로 해라. 마음대로 한다고 어떻게 될까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뜻입니까? 뜻이면 이루어주십시오” 이렇게 애매모호한 기도를 드리지 마십시오. “하나님, 현대차를 구입하는 것이 당신의 뜻입니까? 삼성차를 뽑는 것이 당신의 뜻입니까?” 알아서 하세요 그런것은.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을까요? 돼지갈비를 주문할까요?”그것도 알아서 하세요. 오늘 주일 교회 나가는데 내가 이 옷을 입어야 될지 저 옷을 입어야 될지 그것가지고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알아서 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런 자질구레한 질문하지 마시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의 남은 삶을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중요한 핵심을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됩니다. 그러고 나면 나머지는 무엇을 구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응답의 첫 조건은 하나님과의 정직한 관계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기도응답의 두 번째 조건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막 11:24-25)

기도에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거듭거듭 기도에 관해서 용서를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움과 원한만큼 기도를 쉽게 망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한을 품고 나쁜 감정을 가지면 삶 속에 쓴 뿌리가 자리합니다. 그러면 기도가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서 증오하면서 기도한다고 해도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이 아직도 일말이라도 남아 있으면 기도가 안됩니다. 안돼야 아직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 혹 입으로 했다고 응답 되겠습니까? 절대 그럴리 만무합니다.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예배드리다가도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들을 만한 것이 생각나면 예물을 그 자리에 놓아두고 바로 찾아가서 먼저 화해하고 와서 다시 예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이웃을 미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의 기도가 아무 응답을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미운 감정이 여러분의 마음에 자라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히브리서 12장 15절을 귀담아 들어봅시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미운 감정은 독약과 같습니다. 여러분을 산채로 삼킵니다. 미운 감정을 가지곤 절대로 기도응답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또 베드로전서 3장 7절은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다른 이유를 밝힙니다. 결혼생활이라는 컨텍스트 내에서 기도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독신으로 주를 위해 헌신했던 바울과 베드로는 다르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언제나 아내 된 자매를 데리고 다니면서 사역을 했으니까 말이죠. 어떤 때는 정말 돕는 배필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때는 생각해보면 정말 하나님이 날 도우라고 주셨나 나를 화나게 만들려고 주셨나 이런 생각이 들잖아요? 우리가 미움을 받기 가장 쉬운 대상은 가족입니다. 저는 프랑스 대통령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 사람을 한번도 미워 해본적이 없습니다. 착한사람입니까? 저는 우리 집 저하고 같이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남편으로서는 아내를 사랑하고 아버지로서는 자녀를 사랑하고 이게 제가 해야 되는 일인데 그게 FM이고, 사용설명서 매뉴얼에 나와 있는 방법 아닙니까? 우리가 미움을 갖기 가장 쉬운 대상은 가족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부모는 자식을, 아내는 남편을, 자식은 부모를 상하게 합니다. 미움과 원한은 가족관계 안에서는 너무 쉽게 갖습니다.

베드로가 남편들에게 하는 충고를 들어보십시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장가가려면 여자가 무언지 공부도 좀 하고 가라 이런 이야기죠.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는 말은. 어떤 남자들은 특별히 경상도에 그런 남자들 더러 있는데 자기 아내가 여자인줄 모릅니다. 아니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을 안 합니다.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에어컨이 필요 없이 되는 사실을 생각을 안 해요.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함부로 다루면 안 됩니다. 특별히 말로 함부로 다루면 안 됩니다. 왜? 여자는 귀가 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로 아주 심한 상처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저는 나이가 오십다섯인데 다섯 살 때부터 신앙생활 했습니다. 반세기동안 신앙 좋은 사람이 자기 아내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또 신앙 좋은 아내가 남편 무시하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서 귀히 여기라. 귀히 여기라고 권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열심히 특별기도 참석하시는 것 감사한 일입니다만 특별기도 온다고 식구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이 급히 기도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아직도 아이가 자고 있다고 막 퍼붓지 마세요. 그러면 아이들의 신앙이 헷갈립니다. 저도 어릴 때, 사춘기 때 누나랑 함께 많이 고민했습니다. 어머니가 새벽기도 갔다 와서 늘 했던 이야기는 우리 누나 친구 이름 들면서 “그 아무개는 새벽기도 나왔는데 너는 뭐하고 있느냐?” 그러십니다. 말로는 안했지만 속으로 오늘 새벽기도 뭐하러 갔다오셨을까? 이해가 안되잖아요. 우리는 새벽기도는 못나갔지만 기도하고 온 사람이 자고있는 아이들한테 무차별하게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세월 지나서 어머니께 참 감사하고 그때 어머니가 얼마나 삶이 고달팠으면 기도하고 내려와서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요. 하지만 그때 사춘기로서는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어떻게 새벽기도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그렇게 야단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식구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기도응답이 어려워집니다. 여러분의 배우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자녀를 어떻게 다루는지가 바로 기도 응답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울 때 언제나 복되고 평화로운 가정생활을 하는지 안하는지 알아보도록 합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든지 “자녀들로 하여금 순종케”해야 한다는 것은 복되고 행복한 가정 그것이 우선적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아내와 자녀에게 잘 해야 기도가 응답이 됩니다. 부부 싸움을 하고 나면 기도가 안 됩니다. 저는 장가가서 바로 깨달았던 점이 그 점입니다. 신혼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순조로울 수만은 없지 않아요? 공주, 왕자님 만나서 그 다음 부터 행복했더라. 그것은 동화책 이야기지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티격태격합니다. 문제는 그러고 나면 내 아내의 마음이 상해있으면 하나님이 나한테서 돌아앉는 것 같습니다. 기도가 안 되지요. 설교 준비가 안 되지요. 그러면 사연을 다 묻어놓고 미안하다고 먼저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아마 대체로 제가 늘 잘못했겠지요. 왜냐면 저는 다혈질이니까. 어쨌거나 어떤 때는 내가 잘못한 이유조차 생각이 나지 않아도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한번 두번이 아니라 계속 하다가 생각해보면 어떤 때는 본전생각이 나잖아요? 완전히 예수는 내가 믿고 덕은 우리 집사람만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때가 있습니다.

기도응답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하나님과 정직한 관계요 둘째는 다른 사람을 향한 용서하는 마음가짐입니다.

기도응답의 세 번째 조건은 기도응답으로 받은 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은 것을 거둡니다. 많이 베풀면 많이 받습니다. 하나님의 큰 복을 받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주십시오.

“귀를 막아서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 21:13) 막연한 도덕적인 경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듣지 아니하시겠다는 경고입니다.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이 없어서 그렇게 쩔쩔매는데 보고도 거기에 무감각하면 여러분이 뭐라고 부르짖어도 하나님도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주위에 있는 형제자매의 절박한 삶에 무심하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물질로써 더 축복해 주기를 기다릴 수 있습니까?

요한일서 3장 22절은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우리는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계명입니까?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구체적인 방안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요한은 말합니까?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요일 3:17) 사랑한다는 구체적인방법은 다른 사람들에게 후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복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축복하셔서 쓰고 남는 것이 있도록 하시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필이면 여러분의 삶에 여유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은 여러분의 손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도와주기를 원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이 청지기의 자세 아닙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물질 가운데서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도 돌려드리기도 주저하면서 “사업에 축복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맑은 정신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만큼 준 것 가지고도 아직도 뭔가 하는 게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 보고 무슨 낯으로 하나님 보고 또 더 주십시오. 그렇게 말합니까?

기도응답의 필수적인 조건의 하나는 받은 축복으로 나보다 불우한 사람을,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기꺼이 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에는 가지려고 다투고 싸우지만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된 동기에서 구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동기는 아주 중요합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보다 왜 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같은 것을 놓고도 어떤 사람은 정욕으로 쓰기 위해서 구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복리를 위해서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 삶에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 무엇이든지 다 아뢸 수 있습니다. 문제는 축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고 하는지 자신만 위해 축척하려고 하는지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기적 욕망을 채워 주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기도의 조건들, 하나님과 정직한 관계에 필요합니다. 이웃과의 용서하는 마음, 하나님이 주신 것을 베푸려고 하는 열린 마음, 그것이 응답받는 기도에 필요한 것입니다. 

나누는 일은 돈 벌고 나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속지 마십시오. 3년, 5년 속았으면 되고 10년 20년 속았으면 됐지 우리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 벌면 할 것이라고 하다가 돈 잘 벌때 시간 다 놓치고 뒤늦게 그때 내가 좀 하나님의 일을 후하게 할걸, 선교사나 좀 도우고 시골교회를 좀 도울걸, 다 까먹고 파산되어서 그리고 나서 후회하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 주위에는 없습니까? 저 주위에는 부지기수로 있습니다. 지금 상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나누어드린 하얀 어린 양 얼마나 채웠습니까? 동전으로 이웃을 돕게 되기를 저는 여러분들에게 기대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돈 많이 벌어서 10억, 100억 한자리에 내놓는 것 바라보고 목회하는 사람 아닙니다. 저는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돈 많이 가진 사람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알아서 할 것이고 나는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 나와 같은 사람들, 한평생 벌어야 그런 돈 만져보지 못할 사람들 위해서 목회하는 사람입니다. 너는 동전이 있으면 무조건 집어넣는 것, 그게 제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입니다. 주머니에 있는 대로 다 집어넣어봤는데 아직까지 적자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돈도 어떤 아이의 삶에 있어서는 인생을 바꾸어 놓는 희망이 됩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넣는 동전 하나는 장차 여러분이 드리려고 하는 10억, 100억의 기부금보다 더 의미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장차 그것은 되어야 되는게 아닙니까? 가지면 더 가지고 싶고 더 가지면 더 크게 만들고 싶고 안 하더라고요. 부디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쓰고 남는 것 있으면 그걸 여러분의 손으로 이웃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다행이 여러분들께서 후하게 태풍 헌금해 주셔서 지난 금요일 가덕도에 가서 전달했습니다. 가덕도는 특별한 섬이더군요. 교회가 6개 있는데 기도원 하나까지 일곱 개가 있는데 전체가 다 고신교회더군요. 그래서 어려운 사람들 도울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기도 응답을 받는 네 번째 조건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리라고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믿음대로 되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는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자기에게 부르짖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도와 주실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셨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반드시 그것을 하시리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 따라서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우리의 지혜를 따라서 우리의 재능을 따라서 우리의 수완을 따라서 주신다고 말하지 않고 네 믿음을 따라서 주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머리가 빨리빨리 안돌아가도 희망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조건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응답받는 기도의 다섯 번째 조건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언제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는 것 빼놓고 기도하는 것 봤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여러분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네요.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왜 주님의 이름이 특별합니까? 신비로운 암호입니까? 제가 울산교회 홈페지에서 교적 자료에 접근 하려고 하면 패스워드를 넣어라 그럽니다. 암호를 쳐야 통과합니다.

열심히 기도해놓고 마지막 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엔터.’ 그래야 우리 기도가 하늘로 올라갑니까? 그런 신비로운 주문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께 구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 아닙니까? 명분도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줘야 될 아무런 빛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유일한 조건은 그 아들의 이름으로 우리가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내 점수 가지고 신청하면 축하상품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얻어놓은 포인트로 접근하면 뭐든지 원하는 대로 신청 하십시오 가능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아들의 이름은 만능열쇠입니다. 어느 문이든 열립니다. 구하는 대로 받습니다. “주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왔습니다.”고 말하면 아버지는 항상 응답하십니다.

초등학생 둘을 둔 아빠가 아들 생일이라고 아들 친구들 열 다섯명 데리고 경주월드 가서 자유이용권 사서 한 장씩 나눠줍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튀어나와서 “아저씨 나도 한 장 주세요.”그러면 그 아저씨가 어떤 표정을 짓겠습니까? 당돌 하네 왜 내가 너한테 줘야 되는데? 하고 묻습니다. 그런데 대답이 중요합니다. 자기 아들의 이름을 대면서 철수하고 나하고 친구예요. 이러면 아들체면 봐서 아버지가 한 장 더 사서 주겠지요? 통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입니다. 그분만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유일한 중보요 다리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주님은 아버지께로 가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신용불량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긁어도 현금 인출이 되는 기계가 없습니다. 은행가서 돈을 빌려 달라고 그래도 내어줄 은행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친구 중에서 잘나가는 친구가 있어서 그 사람이 자기 주 거래 은행에 여러분을 데리고 가서 내 통장에서 좀 빼 주세요. 그러면 통해요? 안통해요? 통합니다. 여러분의 이름으로는 한 푼도 빌릴 수 없습니다만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이 아니라 수십억 수백억도 문제없습니다.

자, 이제 복습하고 마칩시다. 응답받는 기도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그동안 여러분이 소홀히 한 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을 가로막고있는 장애였습니다. 혹시 못마땅한 생각, 미워하는 마음, 원망이 자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과거의 잘못을 부인해왔습니까? ‘하나님 나는요’ 하면서 변명해왔습니까?

여러분은 기도하면서 정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리라는 것을 믿습니까? 기도 한 것처럼 생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을 믿지 않으면 기도는 시간낭비입니다. 혹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에 인색했습니까? 십일조는 관두고 수입의 1% 조차도 아까워하지는 않았습니까? 받아 누리는 것을 나누기를 좋아하십시오. 

혹시 주님 말씀 안에 거하는 일에 소홀히 했습니까? 이제부터는 말씀 안에 거하십시오. 성경을 읽고 배우는 일에 동참하십시오. 이제부터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보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의 친구요 주님이며 여러분의 삶의 인도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십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과 정직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인격적으로 알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으로 보내셨고 그 분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배운 바에 따라서 기도하는 세이레 두 번째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부르짖는 여러분들의 모든 소원들이 응답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기도 응답 해 주시면 열심히 기도해서 응답받은 모든 기록을 거기 남겨 주십시오. 때로 이런 생각 들지요. 이것 뭐 응답되었다고 말하기에는 무슨 큰 건도 아니고, 사람들은 달리는 차에서 사람들이 다 죽는 가운데서 살아나면 하나님이 크게 도왔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간증을 위해서 40명 희생시킬 수는 없잖아요? 그보다 더 큰 은혜는 무엇입니까? 모두 다 안전 하게 갈 때 그게 더 큰 은혜 아니겠습니까? 사소한 것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간증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사소해 보이지만 그 사소한 여러분의 이야기가 온 성도들의 가슴에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설 수 있습니다. 온 산을 태우는 산불은 처음 시작할 때는 불씨 하나였습니다. 기록해 주십시오. 저희들은 기다리겠습니다. 그래서 복되고 엄청난 응답의 이야기를 통해서 울산광역시를 새롭게 하는 원동력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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