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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때 / 욥 14:1 ~ 6, 눅 1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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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

구약의 말씀: 욥기 14: 1 ~ 6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그 사는 날이 짧은데다가, 그 생애마저 괴로움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피었다가 곧 시드는 꽃과 같이, 그림자 같이, 사라져서 멈추어 서지를 못합니다. 주께서는 이렇게 미미한 것을 눈여겨 살피시겠다는 겁니까? 더욱이 저와 같은 것을 심판대로 데리고 가셔서, 심판하시겠다는 겁니까? 그 누가 불결한 것에서, 정결한 것이 나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인생이 살아갈 날 수는 미리 정해져 있고, 그 달 수도, 주께서는 다 헤아리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사람이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한계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셔서 그가 숨을 좀 돌리게 하시고, 자기가 살 남은 시간을 품꾼만큼이라도 한 번 마음껏 살게 해주십시오.

서신서의 말씀: 데살로니카서 5:1 ~ 6

  형제자매 여러분, 그 때와 시기를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 날이 여러분에게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면서, 정신을 차립시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17:20 ~ 24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인자의 날들 가운데서 단 하루라도 보고 싶어할 때가 오겠으나,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더러 말하기를 '보아라, 저기에 있다' 또는 '보아라,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따라 나서지도 말고, 찾아다니지도 말아라. 마치 번개가 하늘 이 끝에서 번쩍하여 하늘 저 끝까지 비치는 것처럼, 인자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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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았던 여러 시대의 중요한 담론,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록, 인물에 관한 이야기, 기쁜 이야기, 슬픈 이야기들이 다 얽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욥기의 말씀에는, 가장 억울한 이야기, 억울한 사람이 내뱉는 분노의 말, 좌절의 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인생은 모두 다 똑같습니다. 사람은 사는 날이 짧고 생애는 괴로움으로 가득합니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꽃과 같고, 그냥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이렇게 비통함과 좌절의 말을 내뱉는 사람은 바로 욥이라는 사람입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욥을 나무랄 데가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왜 욥과 같은 사람을 처참한 지경으로 내치셔서 좌절 가운데 있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그 깊은 섭리를 신앙의 눈으로 잘 살펴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욥이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부자가 됐고 사회적 지위도 얻었고 또 자식들도 많아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완벽했다고 자부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별로 잘못한 것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저한테 보통 사람들의 도를 넘는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주십니까? 차라리 빨리 죽여주시지, 이 엄청난 고통 가운데서 언제까지 이렇게 살라고 하십니까? 빨리 죽여주십시오. 도저히 고통을 견딜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욥이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합니다. “하나님, 저한테 품꾼만큼의 삶을 주십시오.” 욥 당시에 품꾼들은 아침에 고용되어서 일하러 갔다가 저녁에 일 마치면 일당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내일도 부를지 안 부를지는 일당 받을 때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품꾼이란 말 속에는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사람, 내일이 보장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 품꾼만큼의 삶을 달라는 호소는, “오늘 하루만, 내일은 모르겠으니 오늘 하루만 실컷 내 맘대로 살 수 있게 저 좀 놓아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미안하지만 하나님은 욥이 원하는 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이 고통에 대한 답을 수 천 년 뒤에 예수라는 분을 통해서 주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착실하게 살던 모범 신앙인 욥이 분노와 좌절의 나락에 떨어졌는데, 그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하나님은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을 내버려 두는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그 답을 사실 골고다에서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이면서, 인간과 세계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욥이 1세기에도 살아 있었더라면 진정한 답을 받았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핍박을 받는 사람들, 정말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외칩니다. 왜 나한테 하필 이렇게 억울한 고통을 주십니까? 고통 자체의 무게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억울하기 때문에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예수는 세상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지만, 억울하게도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이 잔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도 억울하게 죽어 가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억울한 사람들 가운데 같이 계시면서 동시에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부활의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오늘 욥의 말을 빌리면, 인생은, 여인에게 태어난 자들은 생명의 날도 짧거니와 그 날들도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입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 다 자식들을 낳아보셨죠? 아이들 태어날 때 얼마나 기쁘십니까? 여러분도 태어났고 저도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기는 태어날 때 태어났다는 신호를 보냅니다. 으앙 하고 웁니다. 울음소리가 들리면, 애기가 태어났음을 알게 됩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었다가 드디어 노인이 되고 수명이 다할 때, 조용히 숨을 멈춥니다. 소리 지르며 나왔던 그 인생이 마지막 목숨이 끊어질 때는 아무 소리 없이 조용하게 사라집니다. 이게 인생의 드라마입니다. 소리치고 나왔다가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저는 임종을 여러 번 지켜보았습니다. 생을 마감하는 사람의 얼굴은 여러 가지입니다. 비록 힘이 없어서 소리를 내지는 못하지만, 얼굴 속에 찬양과 기쁨으로 가득하여 주위와 하직하는 분도 있고, 분노와 좌절과 억울함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을 펴지 못하고 그냥 가시는 분도 있습니다. 평가야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즐겁게 준비하고 또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끝내고 가는 분에게는 죽음은 여유로운 눈으로 맞이할 대상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태어날 때는 울면서 태어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제 해석입니다만, 태어날 때 우는 것은, 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이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태어날 때 무엇 때문에 운 것 같습니까? 부모 여러분, 할아버지 할머니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손자 손녀들이 태어날 때 우는 그 울음소리에서 무엇을 들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새로운 생명의 첫 소리에서 기쁜 찬양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당하는 고통을 보면 나는 울면서 태어났을 것이다. 다시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시 태어나도 찬송 부르며 기쁨의 함성을 지르면서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의 마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이란 생의 마감도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마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그렇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언제 이 세상의 마감이 있습니까?” 하고 사람들이 물었더니, 예수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마감하는 시간은 하나님 아버지가 결정하시는 것이니, 마감이 언제 오느냐고 묻지 마라. 하나님이 마감하는 시간은 인간의 시간의 마감이지만, 그것은 하나님 시간의 시작이다. 그 하나님의 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내가 아니다. 단, 그 하나님이 마감하시는 시간에 당신들이 어떤 상태로 살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마감하러 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하는 당신들은 둘 중의 하나에 속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공포 속에서 맞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쁨 가운데서 맞이하는 것이다.”

마감 시간은 하나님이 결정하시지만, 그 마감을 맞이하는 내 모습은, 내 세계는 내가 결정하는 겁니다. 이것이 소위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자유의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어둠의 운명을 주시고, 나에게는 낮의 운명을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시간은 하나님이 결정하시되, 그때의 내 모습은 내가 결정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마감 시간이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에서 마감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마지막 때를 만드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여러분의 가정과 함께, 여러분이 사는 이 세계역사 한복판에서 마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가 낮을 살고 있을 때에 오시기를 바라서 지금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제발 우리가 삶을 대낮처럼 밝게 만들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감이 언제냐를 묻지 마시고, 우리 삶을 낮으로 만들어서 대낮에 하나님 맞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 우리는 종교개혁 주일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뭡니까? 밤의 세계로부터 탈출하여, 완벽하지는 않지만 빛의 세계로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교개혁은 486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끝난 과거의 일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과거완료의 상황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reformed" 라는 과거분사를 쓰는 것입니다. Reformed Church, 이미 개혁된 교회라는 말입니다. 종교개혁은 486년 전에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천년 전에 골고다에서 끝났습니다. 지금은 뭡니까? 역사는 살아 있다? 뭐가 살아 있습니까? 죽은 예수가 살아 있습니까? 십자가 사건이 지금도 살아 있습니까? 486년 전 종교개혁이 지금도 살아 움직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지금 내게 살아 있지 않다면, 역사의 무덤 속으로 들어가서 종교개혁의 역사가 어땠는지, 십자가의 역사가 어땠는지를 묻고 찾아서 뭐 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완결된 개혁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489년 전의 개혁은 지금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호주 교회들이 여러 갈레로 분열된 것을 통합해서 하나의 교회로 만들어 놓고 명칭 문제로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Uniting Church 라고 이해했습니다. 현재 진행형으로 말입니다. 과거분사의 전통을 따라서 United Church 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오늘도 내일도 연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진행형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호주 연합교회의 이름은 현재 진행형으로 쓰는 Uniting Church 입니다. 지금도 연합하는 교회!

그러나 사실 이 생각은 호주교회가 처음 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을 할 때 칼뱅이란 사람이 나와서 “개혁된 교회”라는 말을 라틴어로 “레포르마타”(reformata)라고 표현했습니다. 개혁된 교회! 근데 중요한 것은 개혁은 한번 개혁으로 끝난 게 아니라 계속되어야 하는 진행형의 일이므로 “레포르만다”(reformanda)라고 했습니다. 개혁을 하되 계속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개혁하는 교회, 그 교회가 종교개혁의 참뜻을 잇는 교회입니다. 호주교회가 말하듯 연합은 개혁과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진행되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이천년 전 골고다에서 있었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구원의 사건으로 역사하는 살아 있는 오늘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한테 구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듣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너희들에게 낮에 임하고 싶다. 어둠 속에 묻혀 있을 때 임하고 싶지 않다. 너희 삶을 좀 밝게 낮 비슷하게라도 만들어 다오. 불신과 좌절 속에는 가고 싶지 않다. 조그만 희망과 가능성을 마련한다면 그때 내가 가겠다. 울음 속에는 가고 싶지 않다. 작은 웃음이라도 만들어 다오.”

이것 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마지막 때는 울음의 때가 아니고 웃음의 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항상 개혁하는 사람이 되기를, 또 여러분들의 가정이 항상 개혁하는 가정이 되기를, 온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탄생과 마감을 재해석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찬송 부르며 태어났다. 앞으로 내가 새로 태어난다 해도 찬송 부르며 태어날 것이다. 생을 마감할 때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마감할 것이다.”

사람들이 제게 묻습니다. “경동교회 교인은 얼마나 됩니까?” 제가 묻습니다. “무슨 교인이요?” “아니 뭐 교인 있지 않습니까? 등록된 교인이 얼맙니까?” 5만 명, 10만 명이라고 하는 교회가 적지 않지요? 그러나 실제로 물어보면 출석교인이 5만 명인 교회는  몇 안 됩니다. 그러나 바깥에다 알릴 때는 다 5만 명입니다. 저는 미안합니다만, 솔직히 경동교회의 재적교인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주 출석한 교인의 통계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동의 교인이 몇 명이냐 물으면, 저는 현재진행형으로 답변합니다. 지난주에 몇 명이 나왔다고 답합니다. 다음주에는 또 달라질 것이니까요.

reformed도 중요하지만 reforming이 더 중요합니다. 경동교회에 적을 두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출석한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살아가는 현재가 더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총을 함께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 세상을 움직이는 요인을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전 세계가 무언가 거대한 힘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고 보고, 그것을 세계정신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한 시대를 도도하게 끌고 가는 거대한 물결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시대정신입니다. 또는 우리나라 역사, 반만년의 역사를 움직이는 민족의 혼이 있습니다. 민족혼! 사람에게도 그를 움직이게 하는 인간의 얼이 있습니다. 다 적지 않은 힘으로 민족과 나라와 역사를 끌고 갑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역사를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힘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이름합니까? 그걸 가리켜서 성령이라고 합니다. 세계를 끌고 가고 내 인생을 끌고 가는, 쉼 없이 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힘, 그것이 성령입니다. 그 힘에 이끌리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힘을 골고다 언덕에서 주셨으니, 옛날 역사의 박물관을 뒤지지 말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그분의 역사를 오늘 맛보십시오.

성만찬을 통해서 예배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이 세계의 역사는 계속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항상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때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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