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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길 (행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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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길
행 8: 1-8

  오늘은 사도행전 8장 1절에서 8절까지 있는 말씀가지고 “그리스도인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 속한 예수님의 사람들은 살아가는 길, 혹은 가야하는 길이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좁은 길이 있고 그 끝에는 좁은 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좁은 길과 좁은 문을 찾는 사람은 심히 적고, 반면에 넓은 길과 넓은 문이 있는데 이 것을 찾는 사람은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좁은 길을 통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영생이 있고 큰길을 통해 큰문으로 들어가면 그곳에는 멸망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좁은 길과 좁은 문은 성도들이 가야하는 길을 가리킵니다. 좁은 길을 갈 때에는 조심하지 않으면 부딪히고 넘어지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생활을 할 때에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고 실족합니다. 그리고 좁은 길은 고생스러운 것처럼 믿음생활도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또한 좁은 길을 가려고 하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가야합니다. 우리가 정신 없이 살다보면 믿는 사람의 도리를 저버릴 때가 많습니다. 좁은 문을 통해 가면 우리들에게 영생의 축복이 있는데 반하여 반대로 넓은 길과 넓은 문은 제멋대로 편하게 삽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이요,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이 길을 살아가고 보면 결국은 멸망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하는 길은 좁은 길과 좁은 문입니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본문의 가르침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순교자의 길 (1-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극심했고 주님의 제자로 살아온 지난 3년 간을 헛살았다고 생각에 좌절감으로 가득했습니다. 삼일 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몸, 자도 되고 안 자도 되는 몸, 시간과 공간에 절대로 제한을 받지 않는 몸, 나이가 들지 않고 죽지 않는 몸으로 부활하셔서 그 신령한 몸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고 죽음 후에 펼쳐지는 영생의 길을 알게 되었고 믿음의 자세가 180°바뀌었습니다.

  그리고는 40일만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데 감람산으로 가시는 도중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누가복음 24장 4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은 내가 그동안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한 것, 즉 십자가에 죽으심과 삼일만에 부활한 부활의 사건을 너희들이 다 보지 않았느냐? 분명히 나는 죽었고 또 분명히 살아났을 뿐 아니라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무슨 죄든지 사죄함을 받는다는 사죄의 복음, 이 세 가지를 너희가 증거 하는데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증인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말투스”라고 합니다. 말투스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그대로 따와서 영어로 “순교자”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사실, 복음의 핵심을 증거 하는데는 순교자적인 자세, 즉 목을 내놓고 증거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죽이겠다고 할 때 난 그 사실을 모르겠다고 하면 증인노릇을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었고 다시 살아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고 목숨을 걸고 증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죽음을 각오하고 증거 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증인”과 “순교자”는 같은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목을 내놓고 사는 사람입니다. 목을 내놓고 사는 사람을 누가 당해낼 것입니까? 그 사람들이 가는 곳에 천하가 못 당하고 뒤 업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이 나아가서 일당백을 하고 일당천을 합니다. 죽일 테면 죽여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 것입니까?  아무 죄도 없는데 죽인다고 하면 죽을 죄로 잘못했다고 비는 사람은 마귀가 제일 좋아합니다. 그러나 목을 내놓고 충성하는 사람은 마귀가 제일 무서워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순교자의 자세요, 순교자의 길입니다. 우리가 순교자의 길을 따르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에서 3절을 보면,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간단히 설명 드리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을 내립니다. 하나님께서 안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왜 핍박을 내리셨는가를 아셔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자체교회로서는 부흥이 되는데 지난주는 몇 명 모였고 오늘은 몇 명 모였는지 숫자를 세어가며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교회를 크게 하셨습니까? 복음 들고 세상에 나가라고 하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절대로 복음을 들고 나갈 생각을 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핍박을 허락하시고 대제사장을 시켜 바울에게 지령을 내리고 바울이 패거리를 만들어 교회를 잔해하고 믿는 사람들의 집집에 들어가서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는데 본보기로 한 사람쯤은 죽여야겠다고 계획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목 당한 사람이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불러다가 공회 앞에 세웠습니다. 스데반이 그 자리에서도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울이 저 놈을 죽이라고 하자 끌어내어 사정없이 패고 돌을 던져 죽이고 맙니다. 스데반이 그곳에서 돌에 맞아 죽는 순교를 할지라도 두려움에 떨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자 하늘이 열리는데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돌에 맞고 있지만 하늘의 그 광경을 보고는 얼마나 그가 기뻐하는지 성경은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천사의 얼굴이 따로 있습니까? 그 상황에서 누가 웃을 수 있습니까? 스데반의 웃는 모습이 천사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라고 합니다. 하늘을 보지 못한 사람은 용서 못합니다. 이어서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죽음의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순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을 보았던 사울이 훗날에 회개하고는 스데반을 죽였던 일을 떠올리며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스데반의 기도가 사울에게서 열매맺어 훌륭한 업적을 남겨놓았습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서 기다리고 계실 만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예수님께서 환영하셨습니다. 목을 내놓고 충성하는데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는 항상 목을 내놓고 믿어야 합니다. 스데반의 사적을 가장 먼저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바로 순교자의 길을 걸어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너희 몫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가 죽을 장소까지 지고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2천년전 로마시대 식민지 백성 중에서는 사형선고가 내려진 사람의 죄질에 따라서 흉악하다고 판정된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면 죄인은 내가 못 박혀 죽을 통나무로 된 무거운 십자가를 내가 죽을 장소까지 지고 가야합니다. 거리에 십자가를 지고 로마군병에게 끌려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죽으러 가는 사람입니다. 절대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즉 죽을 각오를 하고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가 여러분을 당해냅니까?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둘째, 전도자의 길 (4-6)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 오셔서 세가지 사역을 했다고 마태복음 4장 23절에 기록합니다. 첫 번째로 주님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두 번째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세 번째로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하였습니다. 가르치셨다는 것은 교육입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하는 것은 전도, 즉 순교입니다. 그리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는 것은 치유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교육, 선교, 치유가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해야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 주님께서 하셨던 사역을 우리가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할 일이고 돌아와서 모이기만 하면 가르치는 것은 제가 할 일입니다. 제가 혼자 다 못 가르치면 부목사님들도 가르치시고 부목사님들도 다 못 가르치면 그동안 양성한 교사들이 가르칩니다. 가르치는 것을 하는 일이 교회가 해야할 일입니다. 세 번째로는 병 고치는 일입니다. 암에 걸렸으면 척척 기도해서 꼭 고쳐줘야 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물론 예수님은 못 고치는 병이 없지만 우리가 문자적으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육신의 병만 병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잘못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삐딱해서 정신이 병든 것입니다. 정신자세가 잘못되었던 남편이 교회에 나오자 고쳐져서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을 잘합니다. 생활이 병든 사람도 있습니다. 수입은 100만원밖에 안되는데 카드는 200만원씩 긁고 쓴 후에 갚을 길이 없자 다른 카드를 만들어서 카드로 빚을 막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활이 병든 것입니다. 누구는 이렇게 살 줄 몰라서 안 사는 것입니까? 살면 안되니까 안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살던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생활이 병든 사람이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이 병든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귀신 믿듯이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도덕을 혼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덕은 도덕이고, 윤리는 윤리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는 것을 하나의 교양으로 삼아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까? 믿음이 병든 사람들입니다. 어느 교회에 나갔다고만 하면 모든 각색 병든 사람들이 모두 고침 받는 치유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교회가 할 일입니다.

  세 가지 사역 중에 오늘은 전도의 사역을 말씀하시니 전도에 대한 부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녀가 시집가서 아기 낳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기 낳는 것은 은사를 받아야만 낳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은사를 못 받아서 전도를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도하는 것이 왜 은사입니까? 시집간 여자가 아기 낳는 것이 사명인 것처럼 믿는 사람들에게는 전도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아기를 낳는 것처럼 아무리 어려워도 전도를 해야 합니다. 절대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아기 낳는 것을 어떤 것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까? 전도하는 것도 다른 것으로 절대 대신할 수 없습니다. 사명을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기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과 5절을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12절을 보면,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은혜가 넘치고 부흥하는데 왜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당하도록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셨습니까? 그 이유는 전도해야 할 사람들이 교회가 자연적으로 증가되는 것만 기뻐했지, 절대로 복음을 들고 나가서 전도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들입니다. 사울을 통해서 핍박을 가하니 걸음아 날 살려라하며 사마리아와 안디옥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도망간 후에 정신차려 보니 전도를 하지 않은 것이 문제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사건의 내용은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열심히 전도한 내용입니다. 열심히 전도했더니 결과가 얼마나 크게 나타났는지, 남녀가 다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마리아가 복음화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면 되는 것을 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도는 안해서 그렇지,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자체를 무서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하루에 백마디, 천마디, 이런 말, 저런 말하면서도 예수 소리는 한 마디도 안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가 텅텅 비어있기 까닭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까닭입니다. 빌립이 나가 복음을 전했더니 사마리아 사람들이 전부 믿고 세례 받고 복음화 되었다는 사건으로 끝났습니까?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해야만 합니다. 주님은 너희도 하라고 하십니다.

  최권능 목사님이라고 말씀을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최봉석 목사님은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하는 말이 길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줄여서 “예수 천당 예수 천당”이라고 말하며 전도하고 다녔습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평양시내에 순사 한 명이 말을 타고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최봉석 목사님이 가만히 가서 말 뒤에서 “예수 천당”이라고 외쳤는데 얼마나 목소리가 큰지 말이 껑충껑충 뛰었습니다. 그 순사가 가만히 둡니까? 붙잡아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조사를 받는데 이름이 뭐냐고 묻자 “예수 천당”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주소가 어디냐고 묻자 “예수 천당”이라고 대답합니다. 몇 살이냐고 묻자 또 “예수 천당”이라고 대답합니다. 무슨 질문을 하던지 모두 “예수 천당”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경찰서에서 그러지 말고 제대로 얘기하자고 하자 최봉석 목사님께서 “나는 목구멍까지 예수로 꽉 차 있으니 날 건드리지 마시오. 건드리면 나는 예수 소리 밖에 나오는 것이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경찰서에서 포기하며 집으로 가라고 하자 나오면서도 큰 소리로 “예수 천당”이라고 외쳤습니다.

  유명한 일화입니다. 예수로 꽉 차있으니 나오는 것은 예수 소리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루에 많은 말을 하면서 왜 한번도 예수 소리는 안합니까? 속에 예수가 들어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로 꽉 차고 복음으로 꽉 차고 말씀으로 꽉 찼다면 복음이 나오게 되어 있고 예수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빌립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입을 열었다 하면 복음이 나오고 예수가 나왔습니다. 우리도 빌립집사처럼 전도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빌립은 집사입니다. 자신의 생업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행전 21장을 보게 되면 “일곱 집사 중에 하나인 전도자 빌립이라”고 분명히 얘기했습니다.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도 전도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와 복음과 말씀으로 꽉 차서 오늘도 내일도 입을 열게 되면 복음을 전하고 증거해서 전도자의 길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큰 기쁨의 길 (7-8)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전도에 성공했습니다. 8장을 계속 보면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블레셋과 통하는 가사라고 하는 광야길로 빨리 가라고 하였습니다. 빌립은 무엇인지도 모르고 빨리 갔습니다. 가니까 병거 하나가 달려가는데 그것은 애굽 밑에 있는 에디오피아라고 하는 나라의 권세 있는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데 마차 속에서 성경을 보고 있는데도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때 빌립이 달려가서 읽는 성경을 알겠냐고 묻자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마차를 같이 타고 가면서 성경을 잘 풀어서 예수를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니 이에 이데오피아 내시가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가다보니 물이 있어서 그 물에서 세례 받기를 원하여 세례 받고 물에서 올라와서 길을 떠나는데 내시가 흔연히 길을 가므로 다시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흔연히 길을 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큰 기쁨입니다. 헬라어로는 “카이로”라고 합니다. 똑같은 뜻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큰 권세를 가지고도 그런 기쁨을 얻지 못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그런 기쁨을 얻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런 기쁨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경공부를 하는 도중에 예수를 발견하게 되고 예수를 영접하고는 큰 기쁨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사람이 그 때 기쁨을 맛보지 못했다면 예루살렘에 공연히 왔다갔다하면서 죽을 고생만 했다며 오히려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공부 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큰 기쁨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에 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며 돌아갔습니다. 옛날 에디오피아 여왕이 솔로몬 때에 와서 유대교를 받아들여서 하나님만 믿다가 내시가 에디오피아를 복음화 시켜서 콥틱(coptic)교회를 세웁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한 사람에게 전도하였는데 이렇게 큰 일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전도 받은 사람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기쁨의 길을 걸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예배하고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큰 기쁨을 가지고 돌아가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6절부터 8절까지를 보면,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말하면 예수 소리만 합니다. 빌립의 말도 듣고, 믿으며 기도하는 병자가 척척 일어나는 능력도 보았는데 이 두 가지를 듣고 본 백성들은 말씀을 좇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을 좇아야 합니다. 말씀은 나 몰라라 하고 병 고치는 기적만 좇지 마십시오. 믿음이 잘못됩니다. 지금까지 걸어본 일이 없는 앉은뱅이 남편, 중풍병에 걸려서 가정의 문제가 되었던 어머니, 귀신들린 딸들이 빌립을 통해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이 나타나자 그 성안에는 내 집, 네 집 할 것 없이 전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믿고 기적이 나타나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서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말씀과 기적이 함께 어우러지는 믿음이 참 믿음이요, 이 기쁨이 참 기쁨이요, 하나님의 기쁨이요, 영원한 기쁨이요, 큰 기쁨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쁨을 가지고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앞으로 평생을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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