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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각자의 사명/고전12: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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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자의 사명

본문: 고전12:12-31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테레사 수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 받은 바 있습니다. 그녀가 재물과 명예, 지위, 학벌 등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도 사랑의 봉사자로서 위대한 일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말했듯이 "사람의 성공 비결은 부귀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 사명을 깨닫는 데 있으며, 그 사명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왜 지금 세상에 살고 있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실존철학의 시조인 키에르케고르는 22 살 대학 시절에 그의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온 세계가 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진리, 내가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진리를 나는 발견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진리요, 나의 주체적 자리요, 실존적 진리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진리를 찾는 것, 이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이런 사명을 붙들고 그 사명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우리의 사명을 일깨워 달라고 간구한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최소한의 사명임을 자각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현대는 이런 사명을 발견하기 위해서 애쓰는 마음이 아쉬운 시대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확신을 가지고 분명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살기는 살지마는, 일을 하기는 하지마는, 무엇을 위해 사는지, 왜 일하는지 모르고 그저 어물어물 살아가고, 그저 일하니까 일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내가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인생의 높은 목표나 이념이나 가치를 우리는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명이 무엇입니까? 글자 뜻대로 하면 '심부름 받은 생명'이란 뜻입니다. 인간은 사명적 존재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사명을 바로 깨달을 때 눈동자가 달라지고, 생을 살아가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저마다 자기의 '위(爲)해서'가 있습니다. '때문에'와 '위해서'의 목표가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분명하면 우리는 삶이 결코 무의미하다거나 허무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생의 뚜렷한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문에'와 '위해서'가 분명히 서지 않을 때 우리의 생은 회의에 빠져 비틀거리거나, 허무에 빠져 허무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위해서'란 말처럼 중요한 말이 없습니다. 현대인의 불행과 비극이 어디에 있습니까? '위해서'의 목표를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또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것이다'라는 확고한 대답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현대인의 고민이 있고, 방황이 있고, 생의 허탈감과 공허감이 있습니다. 그 결과 인생의 사명감을 못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명감이 우리를 성실하게 만들고, 용감하게 만들고, 부지런하게 만들고, 위대하게 만듭니다. 사명은 인간의 위대한 힘의 원천입니다. 위대한 삶을 원합니까?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위대한 죽음을 원하십니까?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인간은 위해서 살고, 위해서 죽는 존재입니다. 여기에 삶의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고, 충실미가 있고, 장엄미가 있습니다. 베토벤은 음악을 위해 살고 음악을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학을 위해서 살고 문학을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대 작가가 되었습니다. 로댕은 조각을 위해서 살고 조각을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대 조각가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살고 복음을 위해 죽었기 때문에 복음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영어로 사명을 'calling'(부름)이나 'mission'(보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심부름에는 심부름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있고, 보낸 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심부름의 목적과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21세기에 한국이란 땅에 심부름하러 보내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이 한국 땅에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라고 보내신 것을 믿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 가장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의 사명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스위스의 사상가 칼 힐티는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는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날이 언제입니까?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당선된 날입니까? 원하던 대학에 합격한 날입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날입니까? 고시에 합격한 날입니까? 최고의 날은 사명을 자각한 날입니다. 아프리카에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리빙스턴은 "사명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실현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거기에 집념이 있고 열의가 있습니다. 이것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와 신념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이루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다는 요지부동한 목적 의식이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의 생애를 보세요. 세상에서 큰 봉사를 한 사람들의 일생을 보세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큰 일을 하게 했습니까? 그들이 큰 업적을 남긴 비결이 무엇입니까? 불타는 사명감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사람과 사명감 없이 하는 사람의 일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벽돌을 한참 쌓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 교회의 목사님이 공사 현장을 돌보기 위해서 나갔다가 벽돌을 쌓고 있는 기술자에게 인사말을 했습니다. "더운 날씨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랬더니 벽돌 쌓는 기사가 하는 말이 "배운 기술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할 수 있어요?"라고 퉁명스럽게 볼멘 대답을 했습니다. 한참 가다가 저 모퉁이에서 똑같이 벽돌 쌓는 일을 하는 기사에게 "더운 날씨에 수고가 많으십니다"라고 인사했더니 조용한 말로 대답했습니다. "벽돌 쌓는 기술 배웠다가 이렇게 내 손으로 예배당 짓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 똑같이 벽돌 쌓는 일을 하지만, 한 사람은 사명감에서 일하고 다른 사람은 사명감 없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벽돌 쌓는 기사뿐만 이 아닙니다. 가령 공장에서 일하는 기사들도 그렇습니다. 어떤 기사는 '나는 한국의 산업을 건설하는 사명이 있다. 내가 만든 상품이 세계 시장으로 나가게 되는데 세계에서 제일 가는 상품으로 만들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입니다. 사명감으로 일하는 기사입니다. 그러나 사명감이 없이 일하는 기사는 일은 같은 일을 하지만, 할 수 없이 일하고 월급날만 기다리고 퇴근 시간만 기다립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보람도 없습니다. 관청에서 일하는 공무원도 그렇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나는 대한민국을 옳게 봉사하겠다. 내 나라가 가장 아름답고, 깨끗하고, 친절하고, 질서 있고, 명랑한 나라가 되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자기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사명감이 없이 일하는 공무원은 삯을 위해서 일합니다. 민원 서류가 들어와도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가 돈 얼마라도 주어야 결재 서류를 돌리는, 이런 공무원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일을 어떻게 해서든지 되게 하려 하지 않고, 무엇 무엇 때문에 안 된다고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일을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쉽습니다. 그러나 안 하려는 공무원이 많으면 그 나라 살림은 말이 아닙니다.
공무원뿐이겠습니까? 가정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가정주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 관리를 내게 맡겨주셨는데, 가족의 건강을 내가 책임지는데, 어떻게 해야 영양에 좋은 음식을 맛있게 해서 잘 먹게 하지?' 하고 늘 생각하고, 빨래를 해도 '우리 식구가 어디 가도 빠지지 않게 깨끗하게 입혀야지' 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하고, 다림질도 성의를 다합니다. 그리고 식구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나가는 것을 보면 그렇게 마음에 대견할 수가 없습니다. 식구들이 밖에 나갔을 때 집안 정돈 다 해놓고 기다리다가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맞아들일 때 얼마나 흐뭇합니까? 그런데 사명감이 없는 주부는 일을 하기는 하면서도 기쁨도, 만족도, 행복도 없습니다. 집에서 밥하는 게 귀찮습니다. 그래서 정성 없이 불평, 불만 속에 하다보니까 밥 태우기가 일쑤고 밥한다는 게 죽을 쑤기 쉽습니다. 딴 생각하며 일하다 보니까 찬을 만들면서 칼로 손가락 베기가 쉽습니다. 밥하기가 귀찮다고 밖에 나가 사먹자 하고, 집에서 짜장면 배달해 먹자고 합니다.
세탁기가 있어도 빨래하는 거 싫다고 세탁소에 맡깁니다. 그러니까 이런 주부는 내가 손질한 옷을 식구들이 입을 때 오는 흐뭇한 마음을 알지도 못합니다. 방 청소는 하지 않아 밖에서 돌아오는 식구들이 짜증을 냅니다. 그리고 시간만 있으면 과외활동 한다고 늘 밖에 나가 있어서, 학생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며 엄마를 찾아도 없으니까 허전해서 밖으로 나갑니다. 집안이 말이 아닙니다. 사명감이 없이 가정생활 하면 가정에 행복이 없습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정치인이 사명감을 가지고 정치하면 국민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정치인에게 사명감이 없으면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국민은 도탄 가운데 빠집니다.
얼마 전에 미국 뉴욕주 라과디아시 재판소에서 재판이 있었습니다. 어떤 노인이 빵가게에서 빵을 훔쳐먹다가 걸려 잡히게 되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피고인은 정말 빵을 사먹을 만한 돈은 없고 배는 고픈데 나도 모르게 그만 빵그릇에 손이 가서 이런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판사는 이 노인의 눈물의 호소를 듣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당신은 남의 빵 가게에서 빵을 훔친 것이 분명하므로 벌금 20불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 판사는 자기 호주머니에서 20불을 내 놓으면서
"저 노인의 벌금은 내가 대신 내 드리겠습니다. 우리 라과디아시에 빵을 훔쳐먹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판사로서 그런 것을 모르고 살았다는 내 책임감을 양심이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신 방청객이 계시다면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하며 모자를 돌렸는데 네 명 앉아 있던 방청객 가운데서 72불이 모아져 그 노인이 받아 가지고 재판소를 떠났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사명 따라 사는 사람은 책임을 느낍니다. 누가 책임을 느낍니까? 주인이 책임의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며 삽니까?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나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책임을 회피하지 맙시다. 이것은 주인의식이 아니라 노예의식에서 사는 삶의 자세입니다. 노예는 책임이 없습니다. 내 가정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내 직장도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내 나라도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여당은 야당에게, 야당은 여당에게 책임 추궁하는 것으로 나라가 바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불타는 사명감으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책임지며 삽시다. 그럴 때 내가 바로 서고, 가정이 바로 서고, 직장이 바로 서고, 교회가 바로 서고, 이 민족이 바로 서게 될 줄 믿습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 보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일하는 사람으로서 가질 태도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는 가장 뛰어난 기능공을 회사의 사장으로 임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겨우 적임자를 찾아 그 사실을 알리자 그 기능공은 "강철 기술 제련에 대해서는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경영은 모릅니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몫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제 일을 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감동 받은 카네기는 "당신은 강철계의 대통령이 분명합니다. 이제부터 대통령의 월급과 같은 액수의 급료를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영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왕자가 사냥을 갔다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습니다. 그러다 왕자는 우연히 제임스라는 목동을 만나 길 안내를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목동은 “안됩니다. 저는 주인집의 양을 치는 목자입니다. 주인의 양떼를 지키는 것이 내 임무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왕자는 많은 돈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목동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왕자는 안내해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목동은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죽을지언정 양들을 돌보겠습니다. 다만 말로 안내해 드리지요. 산을 세 번 넘은 후에 서쪽으로 계곡을 따라 가면 도로가 나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왕자는 할 수 없이 시키는 대로했습니다. 후에 그 왕자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제임스 목동을 불러 재상으로 삼았습니다. 주인에게 충성하는 그 목동을 평생 잊지 못 하였기 때문입니다. 일을 시키면 틀림없이 잘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사명을 우선으로 선택합니다. 이스라엘 국회는 세계적인 석학 아인슈타인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임했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아인슈타인은 정중하게 사양하였습니다. 이유는 "대통령을 할만한 인물은 많이 있으나 물리학을 가르칠 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수장 벤그리온도 어느 날 갑자기 수상직을 사임했습니다. 기자들이 몰려와서 사유를 묻습니다. 그는 "키브츠 농장에서 일할 일꾼이 부족합니다. 수상은 내가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있으나 땅콩 농사는 아무 나 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자기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명을 망각하고 명예만 추구하다 보면 그것을 잡지 못합니다. 명예를 피해 가면 오히려 그것이 따라 온답니다. 감투라고 하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이가 있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사명을 우선으로 선택합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열 손가락에는 엄지, 중지, 무명지, 약지 등이 모두 손가락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꼴과 몫은 다 다릅니다. 중지는 가장 키가 크지만 특별히 쓰이지는 않습니다. 다른 손가락이 세 마디인데 두 마디 밖에 없는 엄지는 가장 단단해 으뜸을 나타냅니다. 가장 약한 약지는 약속 등으로 다른 손가락과 연결할 때 쓰입니다.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검지와 무명지도 각각 어디를 가리키거나 반지를 끼울 때 필요합니다. 이처럼 한 손에 달려있는 손가락은 어느 것도 같은 모습이나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자녀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점차 자라면서 서로 다른 특성을 나타내게 됩니다. 자녀들은 모두 비슷한 얼굴 생김새와 습성을 부모로부터 받긴 했지만, 저마다 관심사와 적성은 모두 다르게 마련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느냐"는 속담처럼 부모의 사랑은 자식들 모두에게 한결같이 쏟아지지만, 자녀들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맹목적인 사랑은 자녀의 마음에 아픈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첫째 아이를 본으로 내세워 형제간을 비교하거나, 늦게 본 자식이라 하여 막내만을 편애할 때 형제간의 우의에 금이 가게 마련입니다. 한 손에 달려있는 엄지와 검지가 서로 다르듯 자녀들의 특성도 서로 다르고, 한 교회내의 성도들의 특성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되새겨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각자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저의 사명은 많은 사람을 옳은 길, 의의 길로 인도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죽고자 힘씁니다.(막8:35) 그러나 모든 분들이 저와 같은 사명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로서의 사명과 일반 성도들의 사명은 다릅니다.
나무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나무에 따라 알맞은 재목이 되어 여러 가지 물건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에게 편리를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제각기 소질과 재주가 달라 여러 분야에서 다르게 일을 하게 됩니다. 나무 중에는 배를 만들면 가라앉아 버리고 관을 만들면 휘고 기둥으로 쓰면 벌레가 먹어 별로 쓰이지 못하는 굴참나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루는 중국의 장자가 명장 목수를 데리고 나무를 구하러 다니는데, 목수가 아름드리 굴참나무 곁을 지날 때 이것은 아무 소용없는 나무라고 하자 장자는 꾸짖어 소를 쉬게 할 수 있으니 어찌 소용없다 하느냐고 하였답니다. 사람들은 제 뜻대로 안 되는 것을 한탄하지만, 적은 노력으로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한숨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맡겨진 직분이 다를 뿐 장자의 말대로 소질과 재능에 따라 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크게 쓰이는가 아닌가는 각자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학교의 성적 평가는 상대 평가와 절대 평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평가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최종 평가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각자 몫의 달성치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자기 몫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너무나 다양하게 만드십니다. 세상에 50억 인구가 산다고 하지만 그 어느 사람도 꼭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선 인간의 음성도 다르기 때문에 음성만 들어도 그가 누구라는 것을 곧 식별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제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는 새대로, 소는 소대로,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자동차는 자동차대로 모두 제 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눈을 감고 들어도 그것은 무슨 소리라는 것을 식별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제 맛과 제 냄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기는 고기대로, 돼지는 돼지대로, 꽃은 꽃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모두 제 냄새를 가지고 있으므로 냄새만 맡아도 어디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대자연속에 만물들은 각기 자기의 소리, 냄새, 맛, 모양을 가지고 있으나 이 모든 것이 창조주가 보시기에 아름답고, 그가 들으시기에 아름다우며, 그가 맡으시기에 향기로운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새가 코끼리의 소리를 내기를 원치 않으시며 파도가 우박의 소리를 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사과는 사과의 맛만 내면 되고 꿀은 단 맛을 내고 그 안에 함유된 성분으로 꿀이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수수떡을 만들어 놓고 인절미 맛이 나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인절미 맛이 나야 맛이 있다고 하나, 그것은 창조의 원리를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주자연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과 사명만 충실히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아들이 있는데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고, 피아노를 아주 멋지게 연주하곤 합니다. 나는 40년을 넘게 살았어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냅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왜 나는 못하지?"하는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재능을 찾아 그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는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의 것은 찾아보지도 않고 남의 것만 부러워한다면 결국 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인 못난 자신을 바라보게 될 뿐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과 몫(일)을 충실히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시골에 가면 잔치집에서 돼지를 잡습니다. 그런데 돼지를 잡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주인이 소를 잡으려고 하니까 소가 하는 말이 '주인님, 내가 죽으면 밭농사는 누가 합니까?'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럴 듯해서, 주인은 개에게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개가 하는 말이 '주인님, 내가 죽으면 집은 누가 지킵니까?' 그 말도 그럴듯해서 주인은 고양이에게 갔습니다. 그랬더니 고양이가 하는 말이 '주인님, 내가 죽으면 쥐는 누가 잡지요?' 그 말도 그럴듯해서 주인은 돼지에게로 갔습니다. 돼지는 말도 없이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인은 잔치를 위해서 사명이 없는 돼지를 잡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살 뻔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고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사람도 있는데, 그 중에서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사람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살아난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이 땅에 왜 있는가? 나는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는가? 자문하시기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다 어디서나 일하는 사람인데, 나는 어떤 일꾼인가 스스로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일꾼입니까? 아니면 삯꾼에 불과합니까? 우리는 불타는 사명으로 일해야 합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 가운데도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명감이 있기는 한데 희미한 사람입니다. 다른 하는 사명감이 불타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명에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 했습니다. 사도행전 21장 13절에 보면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며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이렇게 바울은 불타는 사명으로 살았습니다. 예레미야 20장 9절에 보면 예레미야 선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그의 골수에는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불타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심령 속에 불타는 사명감이 필요합니다. 자동차가 어떻게 움직이고, 비행기가 어떻게 공중으로 날아갑니까? 우주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 속에 불이 있습니다. 이렇게 불타는 사명감이 있어야 무슨 일이나 성공합니다. 오늘 우리나라에는 각 방면에 불타는 사명감으로 일하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불의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는데 "성령은 곧 불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심령 위에는 옛날 갈멜산 위의 엘리야의 제단과 같이 불이 붙어야 합니다. 불타는 사명감으로 내 책임 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민족이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다. 불타는 사명감으로 일하는 사람은 언제나 일을 하면서 기쁨과 감사로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일을 합니다. 일하지 말라고 해도 일을 합니다. 부지런하게 일합니다. 양심적으로 일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일합니다. 자기 것을 희생하면서 일합니다. 그러면서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불평하지 않습니다. 도중 하차하지 않습니다. 죽도록 충성합니다. 그러나 사명감이 없이 일하는 사람들은 하기는 하지만, 그저 마지못해서 합니다. 그러니까 하는 일이 힘이 듭니다. 고역입니다. 빨리 피곤해집니다. 일의 능률이 나지 않습니다. 잘못됩니다. 사고가 납니다. 집에 갈 생각에 시계만 봅니다. 불평합니다. 이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 하나를 그의 크신 경륜에 따라 각각 일터에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가 어디든 그것이 무슨 일이든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있든지 모범적인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양심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창의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협동해서 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된 사명을 주신 것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에게 천국 건설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최후 명령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바로 감당하려면 우리 하나 하나가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데서 나의 재능, 나의 시간, 나의 물질을 바쳐서 교회를 봉사해야 합니다. 특별히 직분 맡으신 분들은 불타는 사명감으로 감당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성령의 불이 뜨겁게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바로 세우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한민국을 자유와 정의와 번영의 나라로 세워나가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명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불타는 사명감으로, 내가 처한 위치에서, 힘써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하겠습니다. 무슨 특별한 것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국민을 마음에 두고 국민의 신뢰를 받게 일해야 합니다. 기업가는 사리사욕을 떠나 국민을 위한 기업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군인은 국토방위에 최선을 다해서 국민들이 마음놓고 살게 해야 합니다. 공무원은 문자 그대로 국민의 공복으로 봉사해야지 관료로 군림하면 안됩니다. 노동자는 받는 만큼 성실하게 일해서 우리 제품이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게 되어야 합니다. 성직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국민을 깨우쳐 교회가 사회의 양심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사도 바울과 같이 불타는 사명감으로 살아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하여,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사명 그리고 각자의 사명을 바로 감당합시다.
/한 태 완 목사(하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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