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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기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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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눅19:1-10)
 
 
  저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한 소위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모태신앙의 장점은 신앙에 있어서 굴곡이 없이 한결같고 꾸준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점은 어떤 특별한 체험이나 계기가 약해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기도도 못해, 전도도 못해, 아무 것도 못해서 ’못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를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은혜를 경험하고 목사가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수련회 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그때 저에게 다가왔던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이나 육정, 즉 부모가 잘 믿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뜻, 즉 교회를 잘 다닌다고 되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주님을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 저는 많이 회개했습니다. 그날 밤새도록 저는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했고, 주의 종이 되어 평생 또 다른 의미에서 교회를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학교에 갔고, 목사가 되어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1987년에 목사안수를 받을 때 저는 처음 은혜 받은 그곳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또 기도했습니다. 꼭 목사가 되어야 하는 지를 물었습니다. 그때에도 역시 하나님은 확신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저는 이 길을 기쁘게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되든지, 아니면 어떤 직업을 갖든지, 우리의 의지를 발동하게 하고,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동기 없이 행동이 유발되지 않습니다. 동기 없는 행동은 형식과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직업에도, 봉사에도, 믿음에도 동기가 있어야 하고, 모든 것에 우리의 행동을 촉진시키는 내적 요인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감사의 달을 맞이하여 감사를 본질적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감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선 순위가 되는 ‘생각’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감사에 있어서의 ‘동기’입니다. 다시 말해 ‘감사’라는 행동을 촉진시키는 내적 요소가 무엇인가, 감사의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감사해야 할까요? 이것을 본문을 통해 찾으려고 합니다.

  본문은 ‘삭개오’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에 사는 사람이었고, 세리장이었으며, 부자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이 자기 마을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그날 삭개오는 생애 큰 전환점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너무도 기뻤고, 정말 감사했습니다. 성경은 그가 진정으로 감사하는 모습을 몇 가지 그의 행동을 통해 잘 보여줍니다.

  우선, 나무에서 내려와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6절에서 그것을 보여 줍니다. 내려왔다, 즐거워했다는 말은 삭개오의 자발적이고 의지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강력한 표현입니다. 특히 ‘급히’ 내려왔다는 말에서 삭개오의 내적 마음과 상태를 더욱 읽을 수가 있습니다. 삭개오는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밖으로 표출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날이 일찍이 없었습니다. 부자라서 기쁜 것이 아니었고, 지위가 높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전에 느끼지 못한 기쁨이요 감사였습니다. 속에서의 즐거움이 밖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또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6절에 ‘영접’했다는 말은 곧 초대를 의미합니다. 당시의 초대는 은혜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행동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종종 어떤 사람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을 때,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있을 때, 그 감사를 정중히 초대해서 마음을 전합니다. 바로 지금 삭개오가 그런 마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의례적인 초대가 아닌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초대였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감사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8절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어떻게 보면, 소유는 그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손가락질 당하는 세리였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자기를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철저히 여리고에서 고립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돈을 쥐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재물을 모았습니다. 성경에서 그를 부자라고 소개할 정도로 인정받는 갑부였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를 위해 구제했습니다. 특히 그의 이런 행동이 보물과 관련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얼마나 감사하는가를 보려면, 얼마나 자기의 아끼는 것을 내놓느냐로 평가합니다. 이것이 절대적이진 않지만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그는 보물처럼 모은 소중한 재산을 바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침없이 말합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감사가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요 행동입니다.

  여러분, 동기가 없이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도대체 삭개오가 이렇게 감사를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일까요? 그로 하여금 의지적이고, 자발적인 행동을 촉진시킨 내적 요인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너무도 분명히 그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날 예수님은 삭개오를 우러러 보셨습니다. 눈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삭개오는 눈에 띄지 않는 한 개인에 불과했습니다. 아무리 그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로 올라간 돌출적인 행동을 해도, 그런 사람이 삭개오만 있었겠습니까? 삭개오처럼 키가 작은 어린아이들은 대부분 나무에 올라갔을 것입니다. 또 호기심이 발동한 어른들이 체면을 무릅쓰고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오직 삭개오의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삭개오는 그의 마음에 큰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 강렬한 눈빛이 삭개오의 마음을 열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아셨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예수님 없이 그의 인생은 껍데기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람에게서 버림받고, 자신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철저한 죄인을 부르신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기쁨, 오직 이것이 삭개오가 감사한 유일한 동기였습니다.

  구약성경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 말을 ‘하나님으로 인하여, 여호와를 인하여’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종종 등장하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 11월의 달력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또 하박국에 우리가 잘 아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여호와로 인하여,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것이 우리가 감사해야 할 유일한 동기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동기는 없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환경 때문에 감사해서는 안됩니다. 환경은 유동적이고,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건 때문에 감사해서는 안됩니다. 조건 때문이라면 그것을 갖출 때가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평생 만족할 수 없고, 감사하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환경이 지금 나아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가 어렵습니다. 한해동안 걸어온 길을 돌아보십시오. 예수 믿고 모든 환경이 한 순간에 바뀐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다 잘되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환경과 여건이 많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기다리고, 인내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을 뿐, 사실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이 계십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합니다. 이젠 식욕도 없고, 의욕도 없고, 사람을 만나기도 싫고, 모든 것이 귀찮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 아직까지 그대로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이런 환경속에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사업과 일터의 환경도 그대로입니다. 꿈과 비전을 갖고 출발한 한해, 올해는 뭔가 될 것 같은 기대감으로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땀을 흘리고, 이리저리 뛰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했습니다. 그러나 별로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환경은 그대로입니다. 아니 더 나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나라 경제가 곤두박질하면서 사업과 일터에 적잖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이요, 우리의 환경입니다.

  문제와 난관이 있습니다. 고민과 걱정도 있습니다. 지치고 힘들기도 합니다. 기도하고 또 간구해도 아직까지 응답이 없습니다. 참고 기다리지만 하나님은 잠잠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환경입니다. 예수 믿고 하루아침에 모든 조건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결코 이런 환경이나 조건이 감사의 동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바로 여호와로 인하여,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나를 우러러 보셨습니다. 그 분이 나를 아십니다. 내 곁에서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계십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는 그 분 때문에 우리가 감사하는 것입니다.

  요즘 장안에 화재가 되는 도서가운데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이지선’이란 한 여대생의 고통스런 이야기입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유아교육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지난 2000년 7월30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함께 승용차로 귀가하던 그녀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술에 만취한 운전자가 신호를 기다리며 서있던 그들의 차를 향해 돌진했던 것입니다. 차 사이에 끼어 상체가 불길에 휩싸인 그녀를 오빠가 구해 줘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전신 55%에 3도 중화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그에게 생겼는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잘 믿는 자매였습니다. 사고가 나던 날도 아침에 예배를 드리고 성가대에서 봉사하고 시험준비를 위해 학교에 갔습니다. 그 후 그녀는 계속된 7개월간의 입원과 일본, 미국의 화상 전문 병원까지 찾아가 받은 11차례의 수술을 받았습니다.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았습니다. 절망과 고통의 순간에, 자기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때, 그는 찬양을 불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그렇게 그는 고통을 이겼고, 믿음으로 잘 극복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사고 나기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려 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했을 때 그녀는 진정한 마음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고난이 가져다준 축복의 보물들을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전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고, 사랑을 맛보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모습이라도 행복하고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사고가 난 후 처음 거울을 보았을 때 받아 드릴 수 없는 현실 앞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예쁘고 아름다운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일그러지고 망가진 그녀의 얼굴을 거울 속에서 보면서 그녀는 말합니다. “지금 이 모습의 저도 지선이고, 예전의 지선이도 접니다. 거울 속의 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을 건넵니다. ‘안녕, 이지선!’ 거울 속의 새 지선이도 인사를 합니다. ‘지선아, 사랑해’ 라고...”

  환경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조건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로 인해,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만큼 내 생애에 소중한 분은 없습니다. 그 분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나를 보시고, 나를 아시고, 나를 만져주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그 분이 감사의 진정한 동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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