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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마지막을 위하여 / 딤후 4: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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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지막을 위하여
디모데후서 4:9-22


어제는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가을비가 내리는 날 무엇들 하셨나요? 비를 맞고 거리를 방황한 분은 없습니까? 용혜원 시인이 쓴 ‘가을비를 맞으며’ 라는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가을비를 맞으며

촉촉히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얼마만큼의 삶을
내 가슴에 적셔왔는가
생각해 본다

열심히 살아가는 것인가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허전한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훌적 떠날 날이 오면
미련없이 떠나버려도
좋을만큼 살아왔는가

봄비는
가을을 위하여 있다지만
가을비는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일까

싸늘한 감촉이
인생의 끝에서
서성이는 자들에게
가라는 신호인듯 한데

온몸을 적실만큼
가을비를 맞으면
그 때는
무슨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
내일을 가야 하는가
                         

이 시를 읽어보면 가을이라는 계절 자체에 대한 예찬보다는 가을 다음에 올 겨울을 내다보는 한 시인의 초조한 마음, ‘겨울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금년도 어느덧 겨울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앞에 주어진 일들을 쫓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날은 추워지고 아름답게 물들었던 단풍잎도 한 잎 두 잎 떨어져 바람과 함께 거리를 뒹굽니다. 겨울이 오면 나무도 그 활동을 중단하고 앙상한 가지만 드러냅니다. 모든 화려했던 옷을 벗고 앙상함을 드러내는 계절, 지나간 모든 자욱들이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이렇듯 춥고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청년에게도 나이 많은 어른에게도, 부자에게도 가난한 자에게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도, 건강한 사람에게도 아픈 사람에게도, 준비한 사람에게도 준비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이런 겨울이 자연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도 있습니다. 인생의 겨울도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인생의 겨울, 화려하고 아름답던 치장들은 모두 하나둘씩 벗겨져 그동안 감추어 왔던 지난날 삶의 흔적들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때는 더 이상 노래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씨앗을 뿌릴 수도 없습니다. 새로운 기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단지 삶에 대한 평가만이 남을 뿐입니다. 자연에서 겨울은 봄여름 가을 다음 순이지만 인생에서 겨울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닥칠지 예고가 없습니다. 바로 그때를 위하여 우리는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모든 활동이 중단되고 더 이상 인생의 기회가 없는 그 마지막 때를 위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일평생 하나님 뜻을 위해 살았던 사도바울이 자신의 마지막 인생을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그 마지막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이날을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던 사도바울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있기까지 달려온 사도바울 그는 어떻게 준비한 사람이었습니까? 문득 다가온 겨울의 문턱에서 그는 어떻게 정리하고 있습니까?

먼저 바울은 믿음으로 자기 삶을 회고합니다. 바울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스쳐지나간 반면 어떤 사람과는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들이 던진 말 한마디가 따스한 온기가 되어 아직도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는가 하면 그들이 던져준 말 한마디가 냉기가 되어 아직도 가슴에 서러움으로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바울을 떠났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사역을 위해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건과 사람을 정리하는데 한 가지 특징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믿음의 관점에서 삶을 회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여러 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관점에 따라 후회할 것도 자랑할 것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 중 일본 강철 노동조합 총회에서 ‘표준노동자의 생활설계’라는 것이 채택되었다고 하여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18세, 회사 취직. 25세, 22세 여성과 결혼. 27세 득남. 30세 득녀. 60세 퇴직. 75세 세상과 이별. 아내는 77세 까지 산다고 되어있습니다. 또한 몇 가지 사항이 추가되어 있는데 25세 방 하나짜리 아파트, 30세 방 두개짜리 아파트, 35세 세 개짜리 아파트, 40세 자기 주택구입, 한 달에 한번 온 가족이 드라이브, 한 달에 한번 남편의 골프 등입니다. 이러한 관점이 우리 삶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경이 사람의 생애를 기록할 때 취하는 관점은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영웅들을 기록한 히브리서 기자가 가졌던 관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관점에 따라 믿음의 영웅들이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평가합니다. 역사를 쓸 때도 왕정사를 쓸 수 있습니다. 어떤 왕이 무슨 일을 했으며 치적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쓰는 역사를 말합니다. 또 민중사를 쓰기도 합니다. 왕이 누구였느냐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민초들이 겪은 어려움과 그들 의식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에 주인 되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기록된 신정사를 우리는 읽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그렇다면 내 삶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마지막을 주님의 관점으로 조명해 보지 않고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고 사람들이 아무리 찬사를 보낸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상 끝날 심판이 분명히 있다면 심판주되시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기준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즉 믿음의 관점에서 삶을 돌아봅니다. 고린도후서 1: 8~9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음이라” 그 인생은 고달픔과 고통 괴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매로, 태장으로 맞은 것도 여러 번이요 돌멩이로도 맞았습니다. 파선을 당했습니다. 동족에게 배신당했습니다. 굶었습니다. 어딘지 알지 못하는 흑암 중에서 며칠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합니다. 고달픈 인생이었으나 믿음의 관점으로 회고해 볼 때 불행이나 실패한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이제는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우승한 사람 승리한 사람 이긴 사람에게 주는 것이 면류관입니다.

고난과 괴로움 가득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오히려 승리한 사람에게만 주는 면류관을 기대하고 있다면, 인생을 살피는 우리 자신들의 관점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자신의 삶이 형통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기준이 또는 관점이 바른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편에서 의미 없다면 각각의 회고록을 다시 써야 되겠습니다. 다시 쓰지 않으면 누구나 한번은 겪을 수밖에 없는 마지막 순간에 다시 고쳐 쓸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다가올 인생의 겨울을 예고나 하듯 한해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계절입니다. 이 때야 말로 우리 모습을 다시 한번 정리할 시기가 아니겠습니까? 겨울이 왔을 때 바울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에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요? 이런 고백을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도바울은 아름다운 마지막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었습니다. 13절 말씀 아들 디모데에게 얘기합니다. “네가 올 때 내가 드로아 가보에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책은 특히 가죽종이에 쓴 것을 가지고 오라” 70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 인생의 문턱을 습기 차고 칙칙한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사도바울은 현재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겨울을 나기 위해 외투 한 벌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무엇이 필요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구약성경은 양가죽의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피가 크고 무거웠습니다. 늘 가지고 다니기에는 힘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회당에 두고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신의 말씀을 별도로 두었습니다. 선교여행으로 정착할 수 없었던 바울은 어느 집에 맡겨두어야만 했습니다. 인생의 겨울이 와 모든 것은 떠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도 없어졌을 때에도 힘과 용기 그리고 소망을 줄 수 있는 마지막 의지,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은 신약성경을 13권이나 기록한 사람이었습니다. 헬라철학에 정통했고 유대역사와 성경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대학자로서 감명 받은 책도 여러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택한 책은 성경이었습니다. 왜일까요?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 속에 자신의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감옥 속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던, 인생에 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혼란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분별할 지혜를 주었던, 즐거울 때 그 즐거움이 교만으로 남거나 타락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던 그 말씀이 마지막 생애에 필요했던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는 시카고대학 병원에서 채플린으로 섬길 때 알게 된 아주 인상 깊은 환자가 있습니다. 자신을 트럭운전사라고 소개한 그 환자는 신장이식수술을 받았는데 5년 만에 재발해서 다시 들어왔습니다. 또 다른 신장기증자를 기다리며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와 상담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님 이 땅을 살아오면서 형제님에게 활력과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었던 일들이 무엇입니까? 지금처럼 가장 어려운 순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한번 이야기해보지 않겠습니까?’ 많은 것이 있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힘과 활력이 되었던 것은 슈퍼볼 게임이었다고 합니다. 슈퍼볼은 미식축구로 1년에 한 차례 있는 결승전을 말합니다. 이 슈퍼볼에 미국사람들은 열광합니다. 한국의 월드컵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슈퍼볼만 보고 나면 활력을 얻었기 때문에 슈퍼볼을 보기 위해 1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 경기에서 넘치는 박진감, 긴장감, 스릴, 서스펜스 그리고 경기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 속에서 인생의 철학과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제가 또 질문 했습니다. ‘지금도 슈퍼볼이 당신에게 힘을 줍니까?’ ‘아니요. 지금 슈퍼볼은 내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죽어가고 있는데 사랑하는 친구들은 함께 슈퍼볼을 보면서 웃고 즐길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을 떠나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 동안 슈퍼볼 때문에 그 친구들은 나를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의 나와 같을 친구들을 생각하니 몹시 고독합니다. 외롭습니다. 가장 활력을 주던 슈퍼볼이 지금은 가장 큰 아픔과 고통을 줍니다.’

위기와 절박한 순간에 도움이 되지 못할 즐거움과 활력의 요소라면 진정 의지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좇아간다면 허영, 허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에게 마지막까지 소중했던 것은 침대 곁에서 귓가에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위로 받고 힘을 얻으며 마지막 순간을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구절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여러분의 삶 속에서 힘과 활력을 주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돈이나 물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문이요 음악이요 가족이요 그리고 술이요 다른 사람들의 찬사요, 사랑일까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당장 죽음의 문턱에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대답할 것입니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힘이 되는 말은 내가 누구이며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길은 없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여러분에게 정말 필요하고 중요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 곰곰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을 가까이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인생의 겨울에 서서도 말씀과 함께 했습니다. 소망의 나라로 인도하실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죽음 앞에 비굴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자기 삶을 아름답게 살았노라고 고백하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오늘 내 고백이 되기를 원한다면 지금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읽으십시오. 묵상하십시오. 이 말씀의 의미를 해석하십시오. 그리고 그에 따라 삶을 다시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사람은 겨울을 준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봄, 여름, 가을에 준비하는 사람은 인생의 겨울을 춥게 지내지 않습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결산을 위해 말씀으로 준비하는 인생을 사십시오.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마지막을 위해 바울은 믿음의 관점과 하나님 말씀에 따라 인간관계를 정리합니다. 바울은 인생의 겨울에 마가와 디모데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일평생 가장 부담되는 사람이 있었다면 누구였을까요? 바나바가 아니었겠습니까? 자신이 다메섹에서 회심하고 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갔을 때 모든 사람이 믿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멀리할 때였습니다. 바나바는 그런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했던 사람입니다. 박해를 받고 고향 다소에 가서 10년간 묻혀 지낼 때 안디옥에 파송되었던 바나바가 다소까지 찾아와 그를 안디옥 교회 지도자로 세운 것도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오늘의 바울은 바나바 없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다투고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원인 제공자는 마가였습니다. 선교여행을 떠날 때 바울은 바나바와 마가와 함께 떠났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마가는 어느 한곳에 머무르는 동안 말라리아에 걸렸다고 합니다. 바울은 선교여행을 잠시 멈추고 마가를 간호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2주간 이상을 머물렀다고 합니다. 극진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병이 나은 마가는 이후에 선교여행을 더 이상 하지 않고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마가를 통해 받은 충격과 실망은 그에게 잊혀지지 않고 남아있었습니다. 그런 바울을 첫 번째 선교여행이 끝나고 두 번째 여행을 계획하고 있을 때 마가가 따라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설득했지만 바울은 끝내 바나바와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울 삶에 큰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요? 선교에 필요 없는 존재, 선교할 자격이 없는 존재라며 마가에게 상처를 준 바울은 마가가 그러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상처를 남긴 존재로써 그에게 기억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가를 데려오도록 부탁하고 있습니다. 마가와 인생의 마지막에 서서 그와 함께 거하며 서로의 가슴에 남은 응어리를 풀고 하나님의 교훈과 사랑으로 그를 다시 한번 사랑할 기회를 갖고자 했습니다.

지난날에 대한 아쉬움이 남습니까? 믿음과 말씀 가운데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인간관계가 아닐까요? 나로 인해서 상처 받은 사람, 고통 받은 사람, 힘들었던 사람들이 받은 상처를 안고 그대로 자기인생을 마감하지 않도록 사랑과 격려의 언어로 위로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마가뿐만이 아니라 디모데에게도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얻었던 주옥같은 생명의 교훈과 말씀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바로 디모데전후서입니다. 자신이 받은 축복이 자기에게서 끝나지 않고 후손과 이웃에게 계속 증거되기 위해서 남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특별한 은혜와 풍요로움을 주셨다면 받은 풍요로움이 오늘 내 것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옆으로 아래로 나누어야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주옥같은 진리의 말씀을 디모데에게 전하고 전한 말씀으로 인하여 디모데가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이번 수능시험을 치르는 딸을 생각하며 엄마로서 딸을 위해 그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또 딸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고민했던 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집사님은 하나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죽음과 멸망의 걸음을 걷던 집사님 삶 속에 우연히 찾아오신 아니 ‘우연’이 우연히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딸도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인생의 괘도를 바꿔주시고 기쁨과 삶의 가치, 소망이 무엇인지 찾아와 가르쳐 주셨기에 고난 가운데서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하신 그 주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그 딸이 살아갈 시대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험악하고 더 어려운 시대가 될지라도 물들지 않고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수능을 불과 50일 앞두고 집사님은 결심했습니다. 딸을 생각하며 말씀을 읽고 이 딸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리라, 창세기 1장 1절부터 50일 만에 성경전권을 다 읽었습니다. 읽을 때마다 딸을 위해 조목조목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능을 마치는 날 딸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딸 지형아*◑*

네가 엄마의 딸로 벌써 20년이네
긴 시간인 것 같은데
헤아려 보면 단숨에 흘러 간 것 같구나
참 많은 우여 곡절이 있어지?! 그렇지
그러나
우린 망할 수가 없단다 망한 것 까지도 승리의 노래로
만드시는 우리들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란다
지난 일년 아니 고등학교 3년과 지난 1년 4년인가?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도전한 시간이구나
엄만 너와나의 생애 기간 중 아니 우리 가족의 시간들 중에 이기간은
특히 작년과 올해가 가장 힘들었으며 아름다웠던 시간이라고
생각 된단다 고3의 시간이 없었으면 재수의 시간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엄만 그래 정말로 문제아는 없고 문제 부모만 있다는 것
엄마의 잘못된 가치관과 욕심, 죄로 인해서 널 인격자로
인격적인 모습으로 양육하고 훈련하지 못했기에 넌 당연히
네 속에 있는 원한과 상처와 치욕과 좌절, 분노를 엄마인
내게 쏟아 내놓아야 된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넌 너로써 존재하기가 어렵다고 엄만 그것을 안단다
그래서 고마워
사실 힘은 들고 참고 견디기 어려웠지만 너로 인해서 날 (엄마를)
생각하는 또 널 돌아보는 아주 훌륭한 훈련기간 이었다는 것을
먼저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너에게도 고맙고
엄마에게 이런 마음을 안 보여주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딸로,
건강해 보이는 딸로
대학이나 사회 속에 또 결혼했으면 어떻게 했겠는가
생각해 보면 정말로 큰 일이 났게구나 생각이 되거든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것이 나오게 되는데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아주 큰 사건이 되고, 화가 되고, 되레 회복의 기회가 되기도 하거든
사람은 그렇단다
가슴 깊이 고맙고 안심이 되는 계기가 되었지 아니
내 사랑하는 딸 지형아!!~~

오늘 드디어 결전의 날이다 그렇지~~~
기도를 해 달라고 다현이에게 까지 말하는 널 보면서
어미인 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나 했는데
널 다시 잉태 할 수는 없어도 말씀으로
기도로 영으로 잉태하기로 50일을 작정하고
성경 전권을 묵상하면서 말씀과 기도로 널 선포하기로 했지
창세기를 통해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날 그의 어미로 널 나의 딸로 만나게 해 주심이 감사하고
구원의 은혜로 홍해바다에서 구원해주시고
광야 같은 인생의 말씀을 주시는 출애굽기를 통해서
고3과 재수의 기간을 특히 재수생의 기간에 축복하심을 보았다
필요하시다면 동풍으로 서풍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역사하시는 만유의 주 전능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시는
우리의 아버지!!!!!
어버지의 자식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며
광야 생활 내내 만나와 메추라기 먹이시는 하나님
그리고 반드시 아버지의 계획과 길이 있으신 식양이 있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단다
어찌 전권을 다 쓸 수 있게니 너 때문에 기도와 말씀은 차고 넘친단다

아마도
하나님이 널 하늘의 창을 내셔서 라도 축복하시길 원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었나 한다
이제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단다
결과는 전적으로 아버지께 맡기고 후회도 아쉬움도
다 뒤로 던져버리고
건강과 감사함으로 남겨진 네 인생의 진로 앞에
묵묵히 아버지의 오묘한
계획 앞으로 순종함으로 달려가자꾸나 딸 지형아!!!
미술을 해야 하는데 학원과 일정이 잘 만나고
순조롭게 진행 되어지도록
기도하면서 기쁨으로 단을 거두자꾸나
엄만 기쁘단다 엄마의 딸로 이지형을 하나님이 주셨어
그것이 가장 감격적인 감사란다 수고했다

2003년11월5일 시험이 끝나가는 시간에 동안교회에서 엄마가 썼단다
(지형아 엄만 볼펜으로 글씨를 쓰면 엉망이라 컴선생의 좌판으로 옮겼다)                                     

여러분 이 편지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이 자기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웃과 자녀에게 더 큰 풍요로움으로 전해질 수 있도록 전달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누릴 수 있는데도 그것으로 어려운 이웃에게 전하는 축복의 통로로서의 삶, 바로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습니다. 많은 것이 남았다고 생각하기에 여러분의 시간과 젊음, 열정을 마음대로 쓸지 모릅니다. 언젠가는 다가올 인생의 마지막 결산의 시간에 아름다운 마지막이 되기 위하여 오늘 준비합시다. 어떻게 준비해야하겠습니까? 이 질문 앞에 다시 서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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