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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디에 앉아 있나? / 행 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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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어디에 앉아 있나?
성경본문 : 사도행전 20장 7~12절


어디에 앉아 있나?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사도행전 20장 7~12절) 
<목회기도>
 
기둥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게 하신 하나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은총을 주셨으니 이 예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오늘, 청년주관주일로 예배드립니다.
청년의 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예배하고 헌신하기 위해 모인 젊은이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기둥교회의 젊은이들이 생명과 구원의 그리스도의 문화를
세상에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일군으로 세워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여 하나님 마음에 합한 청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기 형편과 사정이 다른 사람들이 모였지만
예수님 이름으로 한 맘 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한맘 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옵소서.
하나님, 이 시간 군대에 있는 젊은이들 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어느 곳에 있든지 오늘이 주일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제단에 찾아 나가 예배 드릴 수 없는 형편에 있다 할지라도
저들의 심령은 하나님을 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객지에, 외국에 나가 있는 이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특별히 병상에 누운 환자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고 우리와 마음만 함께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저들에게도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는 복을 누리게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종을 세우셨사오니 악한 마귀 틈타지 않게 하시고
종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주장하여 주실 줄로 믿사옵고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지난주간 범사에 감사하며 사셨습니까?
제가 지난 주간에 여러 사람에게 "[찌라도] 섬에서 사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에 나오신 분들은 [찌라도] 섬이 무슨 뜻인지 알고 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찌라도] 섬을 모르는 분들은 지난 주일에 예배드리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옆의 분들에게 "[찌라도]를 아시나요?"라고 물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지난주일 밤부터 수요일까지는 부흥회로 모였습니다.
저는 참 놀랐습니다. 꼭 참석할 줄 알았던 분들이 참석치 않아 놀랐고
부흥회에 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분들이 참석해서 놀랐습니다.
교회 일에… 은혜 받는 일에… 관심이 없는 분들은
무슨 일에 관심이 있는 지 궁금합니다.
 
※ 매번 부흥회가 끝나면 부탁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① 받은 은혜에 감사하자.
② 받은 은혜를 간직하자.
③ 받은 은혜를 나누자.
④ 은혜 받고 결심한 것을 변치 말자.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청년들이 예배 인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청년주관주일]로 지키며
청년들이 주관하는 낮예배, 청년들이 헌신하는 밤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헌신하는 청년들…
기둥교회에 적을 두고 교회를 사랑하며 봉사하는 멋진 청년들이 있음에
기둥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에 소망이 있습니다.
 
"청년", 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든든하고 보기만 하여도 가슴 설렙니다.
오랜만에 제 총각 때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아주 멋졌습니다. 별로 믿지 않으시는데…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이 청년주일이기 때문에 어제 머리를 자르고 단정하게 하기 전에
대충 풀어헤치고 '청년처럼 보이나'하고 거울을 봤는데…
제가 보기에 아직은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머리를 풀어헤치고 설교를 해볼까 생각했지만 마음에 허락지 않아
다시 단정하게 다듬었습니다.
청년이라는 것은 좋은 때이고, 젊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오늘은 성경 본문에 나오는 한 청년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행20:7~12)  말씀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머물 때 안식 후 첫날(주일 예배)시간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의 설교는
성경에 기록된 설교 중에서 가장 긴 것이었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는데
7, 9, 11절 말씀을 읽어보면 최소한 6시간에서 10시간 정도의 설교였습니다.
- 7절 : 바울이…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 9절 :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 11절 : 떡을 떼어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도 바울이 설교한 때(時)를 보면
바울이 드로아에 머문 지 7일째 되는 날이었으며
그곳을 떠나기 바로 전날이었습니다.
  7절에 "떡을 뗀다"는 말은 고린도전서 10장 16절에 보면 
그들은 예배하려 모여서 주의 만찬(성찬)을 들었습니다.
곧 바울이 설교한 때는
① 교인들이 주일날 떡을 떼려고 모였던 날이고
② 바울이 드로아에 마지막 머무는 날이었습니다. 

 
바울은 이튿날(다음 날) 떠나갈 것이기 때문에
한 말씀이라도 더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설교도 그렇게 길어졌나 봅니다.
 
그런데 바울의 긴 설교 중에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3층 루(樓-다락 루)에서 떨어져 소란을 피웠습니다.
 
소란을 피운 청년 유두고의 문제점을 살펴보면
1. 창에 걸터앉았습니다(9절).
 
▶창은 위험한 곳입니다.
위험한 곳은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은 곳을 말합니다.
물이 깊고 빠른 강에서는 수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교통사고도 사고 다발지역(多發地域)에서 많이 납니다.
안전치 못한, 위험한 곳이니까 많이 나는 것입니다.
뱀이 많은 곳에서는 뱀에 물릴 확률이 많지만
뱀이 없는 곳에서는 물릴 위험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얼마나 위험한 곳이 많은 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조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도 위험한 곳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신앙이 타락되지 않도록,
신앙에 상처를 주는 위험한 곳에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유두고가 창가에 걸터앉은 것은
위험한 곳에, 좋은 자리가 아닌 곳에 앉았던 것입니다.
 
▶창은 안과 밖을 자유롭게 쳐다볼 수 있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의 주변에도 유두고처럼
두리번거리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 드리는 교회 안과, 바깥을 함께 내다봅니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세상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합니다.
 
두리번거릴 수 있다는 것은 자유로워서 좋을 수도 있으나
사실은 문제가 더 많습니다.
교회에서 좋은 일 있으면 참석하고,
다른 교회에서 좋은 일 있다면 거기 참석하고…
여기 저기 떠돌이 엿장수 같이 소속이 불분명한 것은
자유롭기는 하지만 위험한 것입니다.
기도 받는 다는 이유로 여기 저기 기도해 주는 사람을 찾는 사람들…
이곳 저곳 점쟁이를 찾아다니듯 돌아다니는 사람 치고
신앙생활 바르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겉으로는 멀쩡하게 신앙생활 잘 하는 것 같고 은혜로운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은 어느 순간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경제적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적을 둔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하나님이 교회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셨으면
이 세상에 교회를 두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까지 교회를 통하여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안정되지 못한 자리에 있는 사람은
유두고처럼 창가에 걸터앉은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위험한 곳입니까?
그렇다면 안전한 곳으로 옮기십시오.
양다리를 걸친 사람이 있습니다.
이 곳 저 곳에… 교회에, 세상에 마음이 나뉘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지금 창에 걸터앉은 것입니다.
편안하고 안전하게 깊이 있는 은혜 생활을 할 수 있는
한 쪽을 택하며, 성실하게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유두고와 같이 떨어진 후에 후회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도 떨어지고, 영적으로, 경제적으로… 떨어지는
안타까운 순간을 맛보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2. 유두고는 졸았습니다(9절).
 
9절에 보면 유두고는 창에 걸터앉은 것도 문제인데 졸았습니다.
예배 드리면서 은혜 받는 데 방해를 받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애기들이 우는 것도 예배에 방해를 줍니다.
그러므로 애기 엄마들이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예배 시간에 떠들지 않도록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바르게 예배 드리는 태도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예배에 방해를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녀가 귀여우면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을 수 있도록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 드리는 데 방해되는 일은 잡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주보에 애인의 이름을 적고 낙서를 하는 것도 예배에 방해거리입니다.
예배 드리는 데 방해되는 일 가운데 예배 시간에 조는 일이 가장 심각합니다.
존다는 것, 잠자는 것의 3가지 의미는
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② 아무 것도 모른다
③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시편 13편 3절에 "사망의 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물론 의미는 다르지만 설교 중에 자는 잠도 영적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망의 잠에 속할 지도 모릅니다.
 
잠은 자아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예배 드리는 여러분도 지금의 모습과 잠잘 때의 모습이 전혀 다를 것입니다.
아무리 단정하고 정숙하게 보이는 분이라 할지라도
잠잘 때의 상태는 코를 골며, 입을 벌리고,
침도 흘리고 잠자는 모습으로 달라집니다.
그런 분들에게 "왜 잠잘 때 입 벌리고, 코를 골며 자느냐"고 하면
"언제 그랬냐… 그런 일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잠이 들면 자기 자신에 대해 모릅니다.
이처럼 자기를 상실한 상태에서의 육적인 잠도 문제지만
영적인 잠을 자도 이 세상의 삶과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삶, 생(生) 이라는 말은 <소 우(牛), 한 일(一)>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어렵고 조심스럽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살기가 어려운 것이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렵고 조심스런 이 세상을 졸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학교에 가서 존다면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습니다.
직장생활 하는 사람도 직장에 가서 졸고 있다면
그런 사람을 좋아할 동료가 누구며, 상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배 시간에 조는 사람이 제대로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졸면서는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정신 차리세요.
 
☞ 바울은 고린도전서 16장 13절에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16:13) 고 했고 
☞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42~43절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마24:42~43)
☞ 로마서 13장 11절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롬13:11)
 
물론 육체적으로 피곤하면 자야 합니다.
육적으로 피곤치 않기 위해, 졸지 않기 위해 잘 쉬어야 하고
영적으로 낙심치 않기 위해, 졸지 않기 위해 정신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3. 유두고는 떨어졌습니다(9절).
 
은혜의 자리에 깊이 들어오지 않고 바깥 세상 한번, 말씀 전하는 바울 한번
이 일 한번, 저 일 한번… 
소속도 없이 이 교회 한번, 저 교회 한번… 떠돌이 신앙생활하며
위험한 창가에 앉았다가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유두고처럼 문제를,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바울이 최선을 다해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점점 은혜에 휩싸이는 자리에서
3층 창가에 앉았던 유두고가 떨어졌습니다.
은혜의 자리는 금새 근심의 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설교하던 바울이 설교를 멈추고 온 자리가 소란스럽게 되었습니다.
청년 유두고는 문제를 일으키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길을 막는 자가 있고, 길을 여는 자가 있습니다.
건설자가 있는가 하면 파괴자가 있습니다.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깨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도 교회를 평안하게 하는 교인이 있는가 하면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성도들을 싸매는 교인이 있는가 하면
          상처를 내고 가슴 아프게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는 교인이 있는가 하면
      교회 부흥에 방해자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요즘엔 자기가 한없이 높아져
유두고 처럼 높은 창가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교인들이 많습니다.
높은 곳에 있으면 낮은 곳이 잘 보입니다.
장기를 두는 사람들은 앉아서 고민하고 있어도
훈수를 두는 사람들은 장기 두는 사람이 잘 못보는 것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 있어서 장기판을 내려다 보면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창에 앉아 있고, 높은 곳에 있으면 아래 있는 사람들이 잘 보입니다.
그래서 "저 교회는 저렇고, 이 교회는 이렇고,
이 사람은 이러쿵, 저 사람은 저러쿵…"
입으로 문제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유두고처럼 창에 걸터앉은 사람들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보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면 지금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된 날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좋은 시기에 문제를 만드는 자가 아니라
문제가 있어도 해결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4.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했습니다.
 
참 하나님의 자녀는 "화평"을 조성하는 자입니다.
참 하나님의 자녀는 "평안"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 갔을 때 그 사람이 들어선 순간
모였던 사람들이 불안해지고 편안치 않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불안하고 소란스러운 자리에도 어떤 사람이 가면 화목하고 평안을 만듭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약방의 감초는 쓴 것을 제거하고 단 맛을 내게 합니다.
기둥교회 성도들은, 특별히 청년들은
모든 일에 감초 같은 역할을 하시기 바랍니다.
쓴 것은 달게 하고, 안되는 것은 되게 하고, 미움은 사랑으로 변하게 하고
분쟁을 화해로 만들고, 절망을 소망으로 만드는
문제의 해결자가 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 청년들은 매사에 [긍정적 사고 운동가]여야 합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좋은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하는 일에도 동조자로서 통이 크고, 긍정적인 협조자가 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성도들 가운데, 잘못된 청년들 가운데
안티 교회(Anti Church), 안티 크리스챤(Anti Christian),
안티 목사(Anti Pastor)… 모든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충실한 사람은
안티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일에 참여해서
썩은 곳은 썩지 않게 하고, 꺼져 가는 불을 다시 켜는
적극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둥교회 성도들은, 청년들은
모두 '일하는 자리에 있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교회 젊은이들이나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다는 아니지만 심각한 문제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고, 젊은 시절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공부해야 되는 때 공부하지 않고 봉사해야 할 젊은 때에 봉사하지 않습니다.
아펜젤러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때가 27세였습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이 이 땅에 와서 광혜원에서 물리 화학을 가르치고
서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온 때가 26세였습니다.
20대 중반에 꿈을 가지고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 20대들, 이 나라의 20대들은 과연 어떤 꿈을 가지고 있을까요?
 
청년들은 범사에 감사하며, 범사에 진지한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젊음을 가졌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까'를 생각하며 몰두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모든 사람 앞에 예의 바른 사람이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예의가 없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도 할 줄 모르고, 나이든 어른들에게 예를 갖출 줄도 모릅니다.
길거리에서 젊은이들에게 모욕을 당해 본 어르신들도 많을 것입니다.
 
진지한 삶을 사는 사람, 성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예의를 갖추는 사람,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 기둥교회 성도들, 기둥교회 청년들,
범사에 감사하며 진지한 예의 바른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책에 보니까 한 청년이 결혼을 앞두고 목사님께 주례를 부탁하러 왔습니다.
주례를 부탁하려면 신랑, 신부, 부모님과 함께 와서 주례를 부탁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랑 혼자서 와서 목사님께 주례를 부탁하자 목사님이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 젊은이가 목사님께 "주례하시는 사례비는 얼마정도가 좋을까요?"하고 물었습니다.
사례비를 얼마 해야한다고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걸 물었습니다.
[만일 누가 저한테 물어보면 '많이 하면 좋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주례를 할 때 돈을 받고 하는 것이 아니지요.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례를 받은 사람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드리고 감사 인사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괘씸하게 생각한 목사님은 그 신랑에게
"자네 신부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만큼 주게나." 했습니다.
결혼식날 예식이 시작되기 전에 신랑은 목사님께 봉투를 드렸습니다.
봉투를 받은 목사님은 봉투를 확인해 봤더니 100원짜리 동전 하나가 담겨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하지 말던지…
설사, 아무리 예쁘지 않더라도 사랑하여 결혼하는 신부인데...
결혼식이 시작되고 신부의 얼굴이 궁금해진 목사님은
신부의 얼굴을 자세히 보며 주례를 했습니다.
결혼식을 무사히 끝내고 신랑을 불러낸 목사님은 신랑에게 50원을 건네주며
"받아두게, 거스름돈이네. 자네 신부의 미모라면 50원이면 되네…"
 
물론 어떤 사람이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젊은이는 무례하고 째째하고,
주례를 하는 목사님이나 신부를 우습게 여긴 나쁜 녀석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젊은이들, 신앙생활 성도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이 먼저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범사에 진지해야 합니다. 신중해야 합니다.
예의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의 바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의 바른 생활인은 먼저 가정에서 자식으로, 부모로, 형제로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부모에게 함부로 하는 자녀가 나가서 잘 되는 법이 없습니다.
사회에 나가서 일터에서, 예의 바르고 깎듯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이라면 교회에서도 예의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하는 동료들에게, 교회 어른들에게 깎듯한 예의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아무리 동갑내기라 하더라도
"야, 너~"라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입니다.
범사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여러분, 유두고가 창가에서 떨어진 것은 예배에 대해서, 예배를 소홀히 했습니다.
유두고는 예의가 없는 무례한 사람입니다.
말씀 전하는 자리에서 졸고 있다가 떨어졌습니다.
말씀을 듣는 기본 자세, 예배드리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예배"는 예를 갖추어 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깨닫고 사는 비전을 가진 사람은
모든 일에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신중하고 진지하며 예의 바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청년들은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아니냐…,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을 가졌느냐 아니냐'하는 것은
그 인생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야망(ambition)과 비전(vision)은 다릅니다.
야망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 가는 꿈입니다.
신앙적인 의미로 비전은 믿음의 눈이고,
믿음의 눈은 어떤 것이 오기 전에 그것을 미리 보는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꿈꾸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이루어 질 줄로 믿고 보는 것이 비전입니다.
젊은 때에,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의 소망 안에서 비전을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것이고 귀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진지해야 합니다. 범사에 예의 바르고, 범사에 감사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영원한 세계가 없다면 우리는 진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살고, 아무렇게나 재미있게 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기둥교회 성도들은, 기둥교회 젊은이들은 예의를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자가 아니라 해결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쓴 일에 감초같이 달려들어 평안을 만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나…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길을 내신 예수님처럼 범사에 평안케 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일까'를 생각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소망과 사랑으로 천국의 복음을 전할까'를 생각하며…
범사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청년으로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예배의 자리에 있었으나
문제를 일으켰던 유두고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며, 범사에 진지하며, 신중하며
예의 바른 신앙인, 예의 바른 생활인, 예의 바른 젊은이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이라 했는데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앞에서도 무례한 사람이 많습니다.
범사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예의를 갖추며 사는 저희들이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 깨달았으면 말씀대로 살 결단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찬양하는 젊은이들을, 저들의 인생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평생이 되도록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기둥교회에 많은 젊은이들이 있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이들이 꿈꾸고 있는 비전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 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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