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해가 진 자리에서 [창 28:10-19]

  • 잡초 잡초
  • 330
  • 0

첨부 1


Subject  해가 진 자리에서 <창28:10-19>


□ 해가 진 자리에서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 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창세기 28장 10-19절)


오늘 읽은 본문이 주는 교훈은 매우 크다고 봅니다. 야곱이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 형(兄) 에서가 받을 축복을 빼앗아 형의 노여움을 받아 '도망쳐 가던 길'에서 하나님을 만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야곱은 인격적으로 볼 때, <에서>에 비하면 매우 교활하고, 집요한 성취욕에, 강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에게 항상 장자의 기업을 자기 것으로 빼앗으려고 하였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국 그것을 성취하였습니다. 가장 비인격적으로 형과 아버지를 속여 부당한 방법으로 남의 것을 빼앗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비열하고 야비한 수단으로 장자권을 빼앗고, 사기쳐서 장자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형이 얼마나 분하고 원통했는지 성경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27:41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왔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라고, 즉 야곱을 죽이려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형의 노를 피하여 도망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망가던 길에서 노숙(路宿)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야곱이 <브엘세바> (Beersheba)에서 하란(Haran)으로 내려가던 길에서 해가졌다고 하였습니다. <길에서 해가 졌다>는 말에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I.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내려가는 길에 해가 졌습니다.
야곱의 하란 행은 어쩌면 우리 인생 길인지도 모릅니다. 야곱의 하란 행은 우리의 인생 길의 불확실성을 의미합니다. 야곱의 하란 행은 보장된 미래를 가고 있는 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야곱은 어떤 일이 닥칠는지 아무도 모르고 가는 길을 가다가 해가 졌습니다.

① '해가 졌다'는 의미는 이제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의 가는 길에서 해가 질 때가 있습니다. 밤을 맞아 더 나갈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40대에 벌써 해가져 밤을 맞이한 분도 있습니다. 요즘 보니 젊은 사람들이 노숙을 하는 것을 보면 바로 그런 경우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한창 잘 나가던 직장생활에서 해가 저문 분도 있습니다.

② '해가 졌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해가 지면 캄캄한 밤이 오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즉 활동의 정지입니다. 어제 보니 이미경이라는 탤런트가 갑자기 두 주일 전에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아 출연하던 모든 드라마에서 중도하차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인생 길에서 해가 져서 더 나아갈 수 없는 경우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③ '해가 졌다'는 것은 즉 인생황혼을 맞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뜨겁게 열정적인 젊음의 시절이 있었다 해도 연륜의 해는 저물게 마련입니다. 일생 교육에 헌신하던 어느 교장 선생님이 은퇴한 후 아들네가 있는 미국에 가 살다가 요즘 치매에 걸려 요양소에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방문하고 보낸 저의 친구의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황혼을 맞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가 져 밤을 맞이하듯 오늘 우리 주변에는 해가 진 인생의 밤을 맞은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야곱은 할 수 없이 들판에서 돌을 베개로 삼아 하룻밤을 자야 했습니다. 얼마나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까? 인생이 여기에서 끝나면 안되겠습니다. 과연 인생은 이렇게 비관적인 존재란 말인가?  해가 진 그 곳에서 야곱은 인생 일대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II. 야곱은 노숙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보았습니다.
<하늘에 닿은 사다리>라는 말에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지금껏 야곱은 하늘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오직 <땅의 것>만 추구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형에 대한 불만과 장자의 기업을 자기 손아귀에 넣는 일에만 전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간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하여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오는 동안 하늘을 볼 사이도 없었습니다.

요즘도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머리 위에 있는 하늘 한번도 볼 겨를이 없이 땅에서 성공해 보려고, 돈 벌어 보려고, 재산 증식시키려고, 출세해 보려고, 남보다 더 가져 보려고, 땅만 보면서 뛰어온 야곱의 후예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3:2절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였는데, 우리 믿는 성도들도 하늘을 보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윌리암 페더>가 쓴 글 가운데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년시절에 길에서 5달러 짜리 지폐를 주었습니다. 어릴 때 5달러짜리 지폐를 주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 후 부터 길바닥만 들여다보며 다녔습니다. 일생 동안 땅만 보면서 길에서 줍는 일에만 평생을 다 보냈습니다. 그가 주운 물건을 종합해 보니 단추가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 수 천개의 동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을 줍느라고 하늘 한번 쳐다보지 못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로 이렇게 살아온 것이 우리의 삶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야곱은 할 수 없이 도망치는 길에서 자기 의지(意志)와는 완전히 다르게 타의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눕힌 상태에서 하늘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믿음으로 키웠지만 스스로 인간적인 욕망을 달성해 보려고, 하늘을 보지 못한 채 달려오다가 인생의 밤을 맞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 수 없이 강제로 노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노숙하던 그 자리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보았습니다.
오늘의 노숙자들이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열린 하늘>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닿은 사다리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스스로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현실은 밤이지만 그 현실의 자리에서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야곱 기질의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유일의 길입니다. 믿음으로 열린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보아야 합니다. 지금껏 땅만 보면서 살아 온 삶에서 하늘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 열린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너 누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니...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고....

오늘 여기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약속의 하나님이란 것이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나님 당신의 약속은 당신의 주권 속에서 변하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비록 야곱이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라 해도, 그리고 도망치는 현실이라 해도, 한번 약속한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이미 조상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었고, 그 아비 <이삭>에게 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런 약속을 지금 노숙하는 형편에 있는 야곱에게 역시 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당신의 속성으로 보아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III. 그래서 야곱은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말씀을 믿고 제단을 쌓아야 하겠습니다. 오늘까지 보이는 세상의 물질과 명예와 권력이 모두인 줄 알았지만, 노숙으로 하루 밤을 지낸 그 자리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누웠던 <좌절>과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그에게 무릎을 꿇고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언약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지금까지는 나의 인간적인 수법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동행을 믿고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앞으로 남은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그 길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야곱이 보았던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요즘 자신의 처지가 야곱과 같은 처지라고 생각되는 분들이라면, 분명히 들어야 합니다. 야곱이 그 후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가 보았던 하늘에 닿는 사다리를 한번도 지워버리지 아니했습니다. 물론 완전히 변하기까지는 아직도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그래도 야곱의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들려주었던 약속의 말을 잊어버리지 아니했습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네게 모든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그 말씀이었습니다. 문제는 야곱 같은 우리들이 얼마나 이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입니다. 만일 야곱이 마음 속에 이 약속을 등한히 여겼다면 그것을 끝났을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J.Kierkegaard)는 진리에 대하여 무감각해진 현대인들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관객이 초만원을 이룬 어느 극장에서 뒤쪽에서 불이 붙었습니다. 관객들은 연극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데, 불난 사실을 알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극장 주인은 배우들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배우 한 사람을 불러서 사실을 알려주면서 "당신이 관객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잘 설득하여 극장을 빠져나가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배우는 막중한 사명을 띠고 무대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얘기를 했습니다. "이러저러해서 불이 났는데 모두 차례를 지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이것이 연극인 줄 알고 모두들 박수를 치며 아주 재미있어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화염에 휩싸여 모두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노숙의 자리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고, 우리도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설교로만 듣고 마는 오늘의 크리스천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오늘의 해가 진 자리에서, 그리고 노숙하는 형편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입니까? 약속의 하나님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오늘의 밤을 보내고 내일의 아침을 맞게 되기를 바랍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