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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 사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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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11/09)
본 문 사 2:5~9


  오래됐습니다만 ‘오늘의 문화적 코드를 이해하려면 흥행하는 영화를 보라’는 말에 당시 한 참 유행하던 영화 “다이하드 2”를 본 일이 있습니다. 목사라서 그런지 어쩔 수 없이 이 영화 속에서도 설교를 위한 단서를 찾은 일이 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이 공항에 침투합니다. 끔찍한 항공기 테러를 시도합니다. 공항의 전기를 끊어버려서 갑자기 공항이 암흑천지가 됩니다. 물론 활주로의 안내등도 꺼졌습니다. 마침 공항으로 접근하던 비행기가 착륙하지 못하고 공항 위를 선회합니다. 그런데 마침 비행기의 연료가 떨어져갑니다. 추락 위기에 놓입니다.

  그 때 브루스 윌리스가 열연한 주인공 매클레인 형사가 아내를 마중 나왔다가 이 사건에 뛰어 들게 됩니다. 결국 주인공이. 항공기 기름을 활주로에 붓고 불을 붙입니다. 비행기 조종사가 그 불을 보고 무사히 착륙하게 되고 수많은 비행기 승객들이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빛의 중요성입니다. 빛이 없으니 비행기가 착륙할 수 없었습니다. 활주로도 그대로 있고, 비행기도 아무 이상 없이 작동을 제대로 잘하고 있습니다. 착륙을 여러 가지로 시도해 보지만 빛이 없으니 길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빛이 없으면 살았으나 더 이상 산 것이 아닙니다. 빛이 없어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헤맬 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빛과 관련된 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은 전기를 꺼서 빛을 없애려고 하고 주인공 형사는 불을 켜서 빛을 비추려고 한 바탕 싸움을 벌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시려고 하시고, 반대로 사탄은 그 빛을 없애려고 합니다. 이런 빛과 관련된 영적 전쟁이 우리 주변에 숨막히게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마치 불 꺼진 공항 주변에서 착륙을 위해 몸부림치는 비행기와 같습니다. 본문 당시 상황은 신흥강국 앗수르의 등장으로 크게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디글랏 빌레셋 3세가 주후 735년부터 앗수르 왕으로 등극하면서 본격적인 정복 전쟁을 벌여나갔습니다. 위협을 느낀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람과 동맹을 맺고 앗수르와 대항하고자 했습니다. 이 때 남왕국 유다는 오히려 친앗수르 정책을 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과 아람 동맹군이 남왕국 유다를 침공해 왔습니다. 유다는 앗수르에 도움을 청해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더욱 강성해 진 앗수르는 아람을 정복하고 급기야 주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마저 멸망시켰습니다.

  이 때 바벨론이란 나라가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애굽도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나섰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남왕국 유다는 애굽과 손을 잡고 반앗수르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앗수르의 산헤립이 남왕국 유다를 직접 침공해 와서 예루살렘은 두 차례 심각한 국난을 겪게 됩니다.

  한 마디로 당시의 상황은 나라가 길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앗수르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애굽 편에 설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독자적으로 나라를 지키려고 해야 할 것인가? 도대체 길이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 심각하게 방황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길을 찾지 못하고 공항 주변을 선회하던 비행기처럼 헤매고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세상 의지하지 말고 강대국 눈치 보지 말고 여호와의 백성은 여호와를 의지하고 여호와께서 인도하시는 그 길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빛

  그러면 여호와의 빛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태양 빛이라고 할 때 태양으로부터 비춰진 빛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빛이란 여호와로부터 우리에게 비춰진 빛을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여호와께서 태양이나 형광등처럼 직접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을 비추시는 분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시 43:3에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라고 말씀했습니다. 주의 진리가 곧 주님께서 보내신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시 119:105를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말씀이 곧 여호와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하여 광야로 인도하신 뒤에 시내산에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저들에게 율법을 주신 일입니다. 저들의 심령 속에 빛을 비춰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저들이 영적으로 방황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지만 저들의 속사람이 나아갈 길을 비추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빛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여호와의 빛은 보다 더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비춰집니다. 요 1:9를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와의 빛이 이 세상이 비췄는데, 그 빛이 각 심령 속에 비취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율법을 통해 빛을 비춰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율법을 통해서 제대로 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참된 빛, 더 강력한 빛을 이 세상에 비추신 것입니다. 그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주님께서 요 8:12에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로다” 결국 여호와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한 밤 중에는 세상이 정말 깊은 어둠에 잠깁니다. 그러나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면서 이 세상은 빛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심령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면 우리 심령은 빛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가 없는 심령은 깊은 어둠에 잠기게 됩니다.

  창 1:2를 보면 빛이 비취기 전에 어두움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영적 어두움의 상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심령이 혼돈 상태 속에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혼돈이라는 말은 토후(WhTo)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황무지에 아직 길이 나있지 않은 원시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정돈되지 않은 무질서한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심령 속에 들어오시지 않을 때 우리 심령은 뭐하나 정돈된 것이 없습니다. 온통 뒤죽박죽입니다. 그때그때 솟구치는 욕망 따라 살아갑니다. 그래서 앞뒤도 맞지 않고 일관성도 없고 후회투성이고 그래서 엉망입니다. 영적인 어두움의 모습입니다.

  다음으로 심령이 공허합니다. 히브리어로 공허라는 말은 보후(WhBo)라는 말입니다. 텅 빈 상태를 말합니다. 가치 있는 것 쓸만한 것은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심령 속에 들어오시지 않을 때 우리 심령은 너무도 공허합니다. 돈이 많으나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있습니다. 향락을 즐겨보나 그것으로 채울 수 없는 빈 자리가 있습니다. 권력을 잡아보나 또한 그것으로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이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어두움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심령이 흑암 가운데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이 흑암이라는 말은 호쉐크(&v,jo)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밝음의 반대 개념이 아닙니다. 악함과 나아가 죽음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심령 속에 들어오시지 않을 때 우리 심령은 악을 저지릅니다. 악의 꽃은 어둠 속에서 피어납니다. 이런 영적 흑암 속에서 음난이 저질러지고, 살인이 저질러 각종 죄가 독버섯처럼 자라갑니다. 이 또한 영적인 어두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빛이 우리 심령 가운데 비추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심령 속에 들어오시면 이 모든 영적 어두움이 사라집니다. 혼돈이 사라집니다. 공허가 사라집니다. 흑암이 사라집니다.

  찬 488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주 영광 찬란해 이 세상 어떤 빛보다  이 빛 더 빛나네
      주의 영광 빛난 그 빛 내게 비춰주시옵소서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나의 영혼 기쁘다”

내 영혼에 여호와의 빛이 비취면 우리 심령은 참된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여러분의 심령 속에 여호와의 빛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남왕국 유다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고 강력하게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빛에 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올바른 길을 걷는 것을 말합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오라면 그리고 가고 또 저기서 오라면 그리로 갑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남왕국 유다에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 같이 술객이 되며 라고 했습니다. 저 앗수르가 강대국이니 앗수르의 신을 따르는 것이 길인 줄 알고 앗수르의 풍속을 따릅니다. 바벨론이 강해지니 메소포타미아 지방 미신과 우상숭배를 따릅니다. 혹시 가까이 있는 불레셋에 길이 있나 하여 그들의 술객 흉내를 냅니다. 한 마디로 영적인 방황입니다.

  사실 눈은 빛이 있을 때만 필요가 있습니다. 저 깊은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들과 저 깊은 동굴 속에 사는 동물들은 눈이 퇴화했다고 합니다. 아예 눈이 없는 물고기도 있고 박쥐도 있답니다. 도마뱀이 먹이를 찾아 굴속에 들어갔다가 그곳에 먹을 것이 많고 좋아서 정착할 때가 있답니다. 이 도마뱀은 5년 정도 지나면 눈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 여호와의 빛을 보지 못하자 영적인 시각 장애인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방황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심령에 여호와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우리 심령의 눈이 열립니다. 올바른 길이 보입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않습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마치 경주마가 앞만 바라보고 달리는 것처럼 주만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악한 일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악한 마음이 머리를 듭니다. 악한 일을 도모하게 되고 악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말씀했습니다. 남왕국 유다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 손을 잡고 함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악한 일을 벌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화해서 말할 수 없지만 대체로 포식동물들은 밤을 좋아합니다. 약한 동물을 공격하는 동물들은 대개 밤에 활동합니다. 예를 들어 사자는 낮 동안 대개 잠을 잡니다. 그리고 어두움이 초원을 뒤덮으면 사냥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순한 동물들은 대체로 낮에 활동하고 밤에 쉽니다.

  사람들도 대체로 악한 사람들이 밤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악한 마음을 먹은 사람들은 밤이 편합니다. 대체로 술집은 밤에 영업합니다. 룸 싸롱, 캬바레, 나이트 클럽은 해지면 영업 시작하고 해 뜨면 문 닫습니다. 그리고 이런 곳은 대체로 조명이 어둡습니다. 컴컴합니다. 주차장도 가려놓습니다. 컴컴한 마음을 먹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못된 짓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마음에 예수가 들어오시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심령이 늘 백주대낮과 같습니다. 늘 환합니다. 어두운 마음이 찾아들 수 없습니다. 악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곳에서 못된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심령 속에 여호와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갈 5:19-21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의 목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우리는 이런 것들을 털어내야 합니다.


셋째, 적극적으로 빛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엡 5:8에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여호와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심령 속에 임하시자 우리 심령이 밝아진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우리도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 5:14를 보면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물론 여기서 말씀하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여호와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빛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달과 같은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달은 발광체가 아닙니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달이 빛을 비추는 것은 태양 빛을 받아서 우주를 향해 그 빛을 되비추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빛을 받아서 이 세상을 향해 되비추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초창기 정치 지도자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이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 주민을 위해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먹었답니다. 곰곰 생각하다가 어느 날 자기 집 앞에 등을 올려놓을 등대를 만들고는 집안에서 쓰던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올려놓았습니다. 처음에는 동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은 집안에 두는 것이지 왜 쓸데없이 밖에다 걸어둬서 낭비를 하는가?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등이 밤중에 길을 밝히니 밤에도 길을 다닐 수가 있고 멀리서도 방향을 찾을 수가 있고 너무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집 앞에 등을 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온통 길거리가 밝아졌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기원이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아름다운 마음이 세상을 밝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 자기가 있는 곳에서 홀로 빛을 발하면 어느새 마을 전체가 환해지고 사회 전체가 환해지고 세상 전체가 환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여호와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을 그 빛으로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적극적으로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먼저 올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어두운 길을 따르지 말고 밝고 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악한 일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심령 속에 남아있는 어두움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빛의 자녀로 이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창 1:31을 보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말씀하셨습니다. 빛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아름다웠다는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여전히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여호와의 빛에 행해야 합니다.


# 기도/

        여호와의 빛에 행하게 하옵소서.
        여호와의 빛을 받게 하시고.
        빛의 자녀답게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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