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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전한 믿음을 지키려면 (히 10: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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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온전한 믿음을 지키려면 
본문 : 히브리서 10:19~25 


태국신학교 강의를 잘 마치고 돌아왔다. 머무는 동안에 바다에 가서 물안경을 끼고 바다 속을 볼 수 있는 스노클링을 몇시간 동안하였다. 얼마나 멋있는지 참으로 좋은 시간을 갖을 수 있었다. 스노클링을 하기 위해서는 물안경을 끼고 숨을 쉴 수 있는 호수를 입에 물고 머리를 물 안에 잠그고 바다 속을 본다. 그렇게도 내가 숨 쉬는 소리가 큰지 참으로 신기할 정도이다. 나는 숨 쉬느라고 씩씩데고 있는데 물고기들은 얼마나 활발하게 잘 노는지 모른다. 나는 바다 속의 물고기들을 바라보면서 깨달은 진리가 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고, 사람은 공기를 떠나서 살 수 없고,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물고기가 물 안에서 노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가 공기로 호흡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온 세상은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한 순간도 견딜 수 없다는 존재임을 깨달았을 때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이같이 모든 생명체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데 이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있어야 한다.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나타나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준다. 소풍가는 아이에게 엄마가 정성으로 김밥을 싸서 주었다. 아이가 이 김밥을 보면서 “엄마 이 김밥 안에 독약 넣지 않았지요?”라고 의심스럽게 묻는다면 아무리 농담이라해도 엄마는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학교에도 이러한 글귀를 볼 수가 있다. 선생님은 학생을 사랑하고, 학생들은 선생님을 신뢰한다는 의미의 글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그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반응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방법이다.
이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요, 이렇게 반응할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살 길이 열린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마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믿음 때문에 우리에게는 살 길이 열린다. 나치 수용소의 지하 감옥 벽에서 발견된 글이다.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에도 나는 태양을 믿노라.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사랑을 믿노라.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살 길이 열린다.

이렇게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믿음을 잘 지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온전한 믿음을 지키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다. 길가에 떨어지고, 돌밭에 떨어지고, 가시밭에 떨어진다.

어떤 사람은 믿음 생활을 하는데 길 가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믿음을 지키는 자가 있다. 길 가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이다. 진리가 꼭 성경에만 있는가? 진리가 꼭 예수님에게만 있는가? 정말로 천국과 지옥이 있는가? 길 가에 떨어진 믿음의 씨앗은 온전한 믿음으로 자라기 어렵다. 태국은 완전히 불교 문화권이다. 가는 곳 마다 불상으로 차려 놓았다. 어느 곳에 갔더니 이쪽에는 불상을 앉혀 놓고, 마주보는 반대쪽에는 마리아 상을 세워 놓았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바른 길을 찾지 못한체 진리의 길을 찾지 못한체 혼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길 가에 뿌려진 씨앗은 천국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온전한 믿음을 유지할 수 없다.

두 번째는 돌밭에 뿌려진 믿음의 씨앗이다. 돌밭에는 뿌리가 깊이 내리기 쉽지 않다.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진다.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때에 믿음을 지키기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요즈음에 먹고 살기 얼마나 힘이 드는데 한가하게 믿음 생활하느냐고 말한다. 어떤 교인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사업이 잘 안 된다고 하여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식구들이 병이 걸려서 고통을 받는데 그 병이 낫지 않아서 괴로워하여 종교를 바꾸겠다고 떠나는 사람도 보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환난의 시험이 있을 때에, 박해의 시련이 있을 때에 온전한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일이다.

세 번째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믿음의 씨앗이다.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돌밭이 쓴 맛의 고통이라면, 가시떨기는 단맛의 유혹이다. 단맛의 유혹 때문에 온전한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에 다니라고 하면 세상에 재미있는 것이 그렇게 많은데 무슨 재미로 살라고 교회에 다니느냐고 반문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요즘음에 주5일제가 되어 토요일이면 차가 많이 막힌다. 많은 사람들이 들로 산으로 놀러간다. 단맛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면 우리는 온전한 믿음을 지키기가 어렵다.

이같이 온전한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요소들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온전한 믿음을 지킬 수 있겠는가?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한 말씀을 주신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말씀 속에서 온전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잘 모일 때에 온전한 믿음을 지킬 수 있다.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하셨다. 임금의 아들이 결혼을 한다. 잔치를 벌여 놓고서 사람들을 청했는데 그들이 모이지 않는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일하러가고, 한 사람은 사업하러 가고, 한 사람은 장가가야 한다고 가고, 소를 사러 간다고 간다. 임금이 화가났다. 네거리로 나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데리고 오라.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데로 모두 데리고 들어온다.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하게 모였다. 들어오는 자들에게 예복을 하나씩 입혀 주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쫓겨나게 되었다. 이 잔치를 바라보면서 임금의 흐뭇한 마음을 볼 수 있다.

예복은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상징한다. 예수 보혈의 피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모였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신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한 목사가 교회에 잘 나오지 않는 사람을 찾아갔다. 추운 겨울날이었고, 목사와 그 사람은 난로 앞에 앉아 그저 빨갛게 타오르는 석탄 덩어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석탄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난로는 따뜻했다. 목사는 사람들과의 모임에 더욱 성실하게 참여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 사람은 목사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갑자기 목사는 난로 옆에 있던 집게를 들어 석탄을 흩어 놓기 시작했다. 서로 맞붙은 석탄이 없도록 모두 떼어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조용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석탄들은 모두 식어갔다… 그 사람은 목사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짜피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홀로 살아갈 수가 없다. 함께 살아야 한다. 모이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데 이 세상에는 다양한 모임이 있다. 성경에도 마찬가지이다. 광야를 지날 때에 물이 없어서 모세에게 반항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모두가 좋지 않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모이는 곳에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렇게 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여리고성을 돌며 함성을 지를 때에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렸다. 블레셋 사람들이 미스바에 모였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멸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에 수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외쳤다. 이 모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임이었다. 그러나 몇일 뒤에 이 사람들이 소리쳐 외치기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다. 모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모임인가가 중요하다.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모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임은 우리의 온전한 믿음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이다. 성경에 보니 모인 곳에는 말씀을 듣는 일이 있었다.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찌니라.”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모인 곳에 말씀이 선포되었다.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이것은 곧 온전한 믿음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바다속을 보는 스노클링을 할 때에 바나나를 부숴서 나눠주었다. 수 백마리의 물고기들이 모인다. 바다 속에서 설교 준비했다. 그들이 왜 모이는가? 먹으려고 모인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원리이다. 먹기 위해서 모인다. 먹기 위해서 모일 때에 그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는 주일이면 모인다. 왜 모이는가? 영적인 양식을 먹기 위해서 모인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초이다.

두 사람의 마부가 수레에 짐을 싣고 먼 여행을 떠났다. 한 사람은 주일이 되자 말과 같이 하루를 쉬면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하루를 쉬면 얼마나 손해가 많은가?’라고 생각하고 계속 말을 몰아 목적지를 향하였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주일마다 꼬박꼬박 쉬면서 예배를 드린 믿음을 가진 마부가 목적지에 먼저 도착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 목적지에 도착한 믿지 않는 마부는 말도 없이, 마차도 없이 기진맥진한 빈 몸으로 도착하였다. 이 마부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몰았기에 말도 병이 나고, 마차도 고장 나서 겨우 몸만 도착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온전한 믿음을 지켜야 한다. 가장 중요한 기초가 바로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모여서 말씀을 듣는 일이 온전한 믿음을 지키는 기초임을 분명히 깨닫고 말씀 듣는 모임을 귀하게 여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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