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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큰 일을 보리라! / 요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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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일을 보리라! 
요한복음 1:43-51

# 1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읽을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해 주는 대목인데요,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어떻게 제자들을 선택하셨을까? 주님의 선택을 받았던 행복한 분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이런 질문들을 마음에 품고, 오늘의 말씀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우선 제자들을 택하시고 부르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은혜가 되는 점은 우리 주님, 거의 예외 없이 약한 사람, 이름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표현으로 어느 각도에서 카메라를 잡아도 도무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격과 모양이 잘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아니, 주님은 저런 오합지졸을 데리고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는 걸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제자로 택하여 새 역사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하여 세상에선 약한 사람이 주 안에서 강한 제자로 거듭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요, 요즘 현대인들을 보면 자꾸만 교회를 떠나려고 합니다. 문제는 교회를 떠난 저 백성들이 교회 대신 찾아가는 곳이 별 볼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찜질 방, 노래방, pc방, 비디오 방, 전화방, 소주 방, 방 방 방, 교회 대신 온갖 방에 들어 앉아 있는 군상들이 많습니다. 볼링장, 수영장, 당구장, 골프장, 장 장 장, 온갖 장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하늘의 복을 받는 곳, 아버지의 집, 거룩한 교회를 떠나 찾아 간 곳이 겨우 그런 곳이라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는 지금 여기 주님의 성전에 나와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주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저들과 우리 사이에 누가 더 행복합니까? 저들과 우리 사이에 누가 더 기쁘고 즐겁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행복한 인생입니다. 우리가 복 받은 인생입니다. 왜?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히 거하고 싶다고 외친 다윗의 고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천하의 다윗 왕이 들어가 자기 한 몸 쉴 만한 집이 없어 아버지의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한 것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집에서 살아본 사람, 그런데 그의 인생을 총 결산하며 마지막으로 선택한 결과는 왕궁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집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거룩한 전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고, 여기 성전에서 영원히 거하며,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천국 기쁨을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디 여기 아버지의 집의 내 자리를 끝까지 지키시기 바랍니다.


# 2

오늘의 주인공은 빌립과 나다나엘입니다. 먼저 빌립을 만나 보실까요? 1장 43절 말씀인데요, / 1:43 / (읽기) / 아하, 이튿날이었군요. 예수님, 갈릴리로 나가시다가 빌립을 만나셨어요. 그럼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죠? 네, 어제는 안드레가 자기 형제 시몬 베드로를 전도하여 주님께 데리고 왔었죠. 그 다음 날, 주님이 또 빌립을 만나신 거네요. 그런데 빌립을 만난 우리 주님, 아주 간단하게 한 말씀하십니다. 43절에 나오지요? “나를 좇으라!”

아무런 설명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를 부르시는 이 중대한 순간에 그 흔한 계약서 한 장 작성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과거는 깨끗한지, 손버릇이 고약하진 않은지, 부채는 없는지,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으십니다. 그저 그에게 하시는 말씀, 나를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빌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무엇도 여쭙지 않습니다. 제가 주님을 따라 가는데 최소한 이런 조건들은 충족시켜 주셔야 한다는 등의 요구가 전혀 없습니다. 요즘 현대인들 같았으면, 나를 따라오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제일 먼저“연봉은 얼만데요?” 반문했을 터이지만, 빌립은 아무 말 없이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그 주님에 그 제자입니다.

그랬습니다. 빌립, 그는 주께서 따라오라 하시니 토 달지 아니하고 그저 따라 갔던 것입니다. 따라오라 하시니 따라간 것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이런 것입니다. 주님과 나의 관계, 이래야 합니다. 전적인 신뢰요. 전적인 의탁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어떤 정치적 계산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그 어떤 이해타산도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오라 하시니 나는 간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께서 오라 하실 때 무조건 아멘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나를 부르실 때 조건 내걸지 마시고 어서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행복한 인생의 지름길입니다. 어떤 이들은 늘 주님과 협상하려고 덤빕니다. 아니오, 그렇게 하는 것 아닙니다. 주님 오라 하실 땐 그저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나의 얄팍한 계산으로 주님의 말씀에 딴지 걸다가 여기서 지체하면 할수록 손해는 내가 본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 이미 순종하고 먼저 따라간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저만치 앞서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들은 주와 함께 하나님 예비하신 복지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데,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주님과 협상하고, 자기 몸값 높이려 하고, 주님과 거래하려는 사람, 정말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 나를 오라 하실 땐 무조건 아멘 하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오라 하실 때, 무조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따라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주님, 분명히 나를 따라오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를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 가운데 오히려 주님 보다 앞서 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골치 아픈 분들입니다. 따라오라 하시면 따라가야지 왜 앞서 가느냐 이 말씀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앞서 가다가 자기가 사고치고는 원망은 주님께 돌린다는 점입니다. 아니, 따라오라 하시는 주님을 따라 갔으면 될 것을, 자기가 앞질러 갔으면 책임도 자기가 질 일이지, 왜 돌아서서 주님을 원망하느냐 이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따라 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내 가슴이 뜨거워도 내가 주님 보다 앞질러 가는 것 아닙니다. 아무리 내 마음이 충만해도 기도 보다 앞질러 가는 것 아닙니다. 김인호 목사님, 늘 가르쳐 주신 말씀, 절대로 기도 보다 앞서 가서는 아니 됩니다.

이 대목에서 베드로가 연상되는군요. 주님 보다 늘 앞질러 뛰어가던 인물이었죠. 그러다가 늘 사고치고 혼나고, 사고치고 야단맞고, 그렇게 살았던 인물이 베드로인데요. 그가 나중에 성령 받고 새 사람 되고 나자, 절대로 주님 보다 앞서가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끝까지 주를 따라 갔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자기 성질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면, 수제자의 자리 벌써 빼앗겼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따르는 자입니다. 해서 주님, 우리를 가리켜 양이라 하셨습니다. 양은 목자를 따르는 법, 양이 목자가 되겠다고 나설 때,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주님의 양입니다. 나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내가 목자가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오라 하실 때 따라만 가도 승리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르며 순종하는 자, 그 길이 즐겁고 복된 길임을 꼭 기억하시고 늘 주님을 따르는 강한 제자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3

1:45 / (읽기) / 여기 보니 주님을 먼저 만난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 가서 만나고 있군요. 가서 무어라 합니까? “그이를 만났다!”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표시하시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내가 그이를 만났다!”여기서 우리는 주님을 먼저 만난 빌립에게 주신 소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나에게 맡기신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에게 가서 그이를 만났다고 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하신 주님, 곧바로 마음에 소명 주시고, 다시 세상으로, 내 친구에게로 파송하십니다. 가서 전하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는 이미 전하는 자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는 이미 친구를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감사한 일은 이렇게 가서 전하는 일, 선택받은 자에게 주신 은혜요 특권이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서 전하는 일은 의무가 아닙니다. 전도는 의무 방어전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요, 나에게 주신 가장 귀한 특권입니다. 왜?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 가서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기다리던 그이를 만났다고 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서 전하고 싶은 마음의 열정, 선택받은 자에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것이 전도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만나는 이 장면에서 전도의 구체적인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크게 보아 두 단계인데요, 하나씩 살펴봅시다. 우선, 주님을 전하는 전도의 첫 단계는 나다나엘을 찾아 나서는 단계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하기 위해서 나 빌립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나다나엘을 찾아 나서는 일입니다. 찾아 나서지 않고서는 나다나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어서 찾아 가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주님을 만나지 못한 내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 가시기 바랍니다. 여기 앉아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주님의 택함 받은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주의 제자가 여기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는 법, 어서 일어나 가서 나다나엘을 찾아 만나시기 바랍니다. 금년 년 초에 아버지 하나님께 서원했던 그 일, 한 손엔 잃어버린 양의 손을, 다른 한 손엔 새 신자의 손을 잡고 주의 전으로 나오겠다던 그 서원을 어서 이루어드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일주일 남았습니다. 나도 한 사람, 전도하는 감사절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전도의 두 번째 단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증언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다나엘을 일단 찾았으면, 그 다음엔 바로 증언을 해야 합니다. 45절 말씀을 다시 보시지요. 지금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무어라 증언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이를 만났다.”참으로 아름답고 문학적인 수사법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나다나엘, 내가 그이를 만났어! 우리가 그 분을 만났단 말이야! 정말이야! 너무 좋아! 어서 가보자! 한번만 와 봐라! 응? 와 보라 말이야!”

그렇습니다. 우리가 친구를 찾아가서 만난 이후에 잡담만 해서는 곤란합니다. 어떤 분은 전도하겠다고 친구 만나러 가서 하루 종일 노닐다가 그냥 돌아옵니다. 와서 보니 그 친구와 나눈 이야기 중에 정작 예수님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건 문제입니다. 전도하기 위해 만났으면 전해야 합니다. 증언해야 합니다. 가서 내가 만난 주님을 간증해야 합니다. 세상 이야기만 잔뜩 해서는 곤란합니다. 그건 전도가 아니라 좋게 말해 사교요 좀 적나라하게 말해 수다일 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한 가지, 가서 전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먼저 증언할 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그이를 만났어!”라는 고백이 가능한 강한 체험이 먼저 내 가슴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신 이후의 내 심경의 변화, 주님 만나기 전과 그 이후의 차이, 주님 만난 이후에 일어난 내 사람의 변화 등을 구체적으로 간증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각오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확실한 간증거리와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간다 해도 나의 간증을 듣는 상대방의 처음 반응은 신통치 않다는 점입니다. 저들의 반응은 일단 시큰둥합니다. 얼마나 마음들이 강퍅한지 잘 들으려고도 하질 않습니다. 빌립의 친구 나다나엘이 그랬습니다. 나다나엘의 시큰둥한 반응을 한번 들어보실까요? / 1:46 / (읽기) / 실컷 전했더니 무어라 합니까? “나사렛 예수라고? 저 요셉의 아들 예수 말이야? 에이, 친구, 잘 생각해 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어?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니야, 나사렛 예수는 아니야!”

아이들 문자로 정말 김이 팍 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빌립을 보십시오. 거기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돌아서지도 않습니다. 대신 사랑하는 친구 나다나엘을 향해 결정적인 한 마디를 전해 줍니다. “와 보라!”46절의 이 위대한 말, 표시하시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와 보라!”이런 말이 생략된 듯싶습니다. “이보게 친구, 내가 지금 만나 뵙고 오는 길이야, 왜 그리 잔소리가 많은가, 잔말 말고 어서 따라오세, 와서 보란 말이야!”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친구에게 그래도 와 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먼저 내 안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확신입니까? 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확신,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 주님을 만나면 문제는 해결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확신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 가슴이 미지근하고 내 머리가 애매모호한데 누구한테 와 보라고 전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 생의 절대적인 가치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판단 기준이요, 진리와 축복의 보고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논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고 따라야 하는 순종의 대상인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몸으로 실천하여 그대로 따라 살면 구원받게 되는 참 이치, 그것이 복음의 진리요 우리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내 이름 불러 주시고, 이 귀한 말씀 내게 주시며, 나를 따라오라 하신 주님의 사랑에 이젠 내가 보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가슴에 안고 어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 가시기 바랍니다. 가서 이렇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친구여, 내가 그이를 만났어요, 어서 와 보세요!”


# 4

자, 그러면 이제 나다나엘을 만나봅시다. 친구를 통해 주님을 만난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꼼꼼하게 살펴봅시다.

1) 선택 이전의 모습 / 46절을 보니, 주님 만나기 전의 그의 모습이 나옵니다. 우선 그는 아주 냉소적인 사람이요, 동시에  자기 아집이 강한 사람입니다. 나사렛에선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선입관에 사로잡힌 모습, 자기 경험의 범주에 갇혀 있는 모습. 해서 새로운 진리가 통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그의 눈에 주님이 보이질 않습니다.

2) 선택 이후의 모습 / 48절을 보니, 나다나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49절을 보니, 또 이렇게 고백하는군요.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냉소가 변하여 고백이 된 모습입니다. 선입관과 편견을 버리고 새로 발견한 진리를 나의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여 거듭난 모습입니다.

여기서 나를 아시나이까? 이 말은 나를 아시는군요! 라는 탄복입니다. “주님, 이미 나를 알고 계셨군요. 제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를 아셨는데도 저를 부르시고 선택해 주셨군요. 나사렛을 깔보고 예수의 이름을 비웃던 나를 아시고도 불러 주셨군요.”그랬습니다. 나다나엘은 주님의 부르심에 감격했던 것입니다.

결국 진심으로 주님을 만나자마자 그의 입에선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놀라운 일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 주님과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나의 임금이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제 내가 믿고 따를 대상이 분명해졌다는 고백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오직 주님만 따라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믿음의 대상이 분명해졌습니다. 따라서 선택의 기준도 분명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모든 일에 주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고, 그 분의 말씀을 나의 선택 기준으로 삼아, 평생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7

마지막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 곧 선택받은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 1:50-51절 / (읽기) / 50절의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51절의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표시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자에게 더 큰일을 보여주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놀라운 장면을 보게 해 주십니다.

여기서 누가 연상되십니까? 야곱입니다. 그는 꿈에 하늘 문이 열리고 사다리가 내려오며, 그 사다리위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 51절에 보니, 사다리 대신 하나님의 사자가 다른 것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군요? 무엇입니까?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아, 인자가 누구십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무슨 뜻입니까? 우리 주님, 당신이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 높이 세워주시고, 그 십자가로 저 하늘나라 올라가는 천국행 사다리를 만들어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참으로 귀한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사다리를 타고 저 천국을 향해 올라가는 것입니다. 해서 십자가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인자가 곧 사다리다! 이 귀한 은혜를 체험한 내가 어찌 그냥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를 타고 저 천국으로 올라가라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어찌 나 홀로 독식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인자 사다리를 보게 된 사람, 어떻게 그냥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해서 먼저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이를 만났다! 와 보라! 우리 같이 인자 사다리 타고 천국가자!

여러분, 이런 은혜와 축복을 받은 나, 주께서 선택해 주신 나에게 부탁하신 작은 소명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이제 너도 세상에 나가 작은 사다리가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 먼저 나를 위해 하늘가는 사다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젠 내가 사다리가 되어야 할 차례입니다. 나도 가서 한 영혼이라도 나를 밟고 저 천국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작은 사다리가 됩시다. 영접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더 큰 일을 보게 해 주신다는 약속, 그 약속 안에서 11월 23일, 추수가사 전도축제에 놀랍고 큰일을 보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주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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