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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넘치는 감사 (고후 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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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감사 (고린도후서 9:10-15)


지난 7월에는 역무원인 김행균씨가 영등포역 선로(線路)에서 위험에 처해있는 10세 가량의 어린이를 구하고 자신은 피하지 못해서 왼쪽 다리가 절단되었습니다. 봉합수술을 하기는 했지만, 며칠 전에 다시 절단하고 의족을 달기로 했다는 신문보도가 있었습니다. 사고가 난 이후에 그 아이의 보호자를 방송을 통해서 찾았지만 아직도 소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김행균씨의 의로운 희생에 감격해하면서, 자기 아들을 살려준 김행균씨에게 감사의 전화 한마디 안하는 아이의 부모에게 매우 분개(憤慨)하고 있습니다. 감사해야 될 때 감사하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을 이렇게 분노케 만듭니다.

불과 한 보름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지체장애자인 유모씨는 30년 전에,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서 보육원에 맡겨진 핏덩어리 같은 애를 입양해서 키워왔습니다. 아이는 유씨집에서 잘 자라다가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에 자신이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그때부터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버려진 자기를 키워주었으면 낳아서 키워주는 부모보다도 오히려 더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양부모를 폭행했습니다. 특별히 장애자인 부모를 폭행했습니다. 그리고 양부모의 늦둥이 딸을 수년간 성폭행을 해왔습니다. 양부모에게 돈을 주지 않으면 여동생을 납치하겠다고 협박하여서 1억 5천만 원을 뜯어내었습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결국 그는 존속협박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 되고, 30년간의 양자 관계를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은혜를 모르고 살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점점 더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극적인 은혜에 배반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감사거리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모리슨(George Herbert Morrison)이 쓴 「내 마음의 하이웨이」라는 책에는 감사절이 가지고 오는 세 가지 역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추수감사절의 첫 번째 역할은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게 한다. 감사할 마음을 일깨워준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날마다 상호의존(相互依存)되어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다.
세 번째로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완전히 의존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각인(刻印)시켜준다.

1. 당연시한 것 속에서 감사거리를 찾아봅시다.

사실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당연시하며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터널조이(eternaljoy) 영성훈련 때 훈련자 한 분은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폐결핵으로 사경(死境)을 헤맨 적이 있었는데, 기침이 나서 수년 동안 베개를 안고 앉아서 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그때의 간절한 소원은 남들처럼 나도 베개를 한번 베고 평안하게 잠을 자 보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목에 연결되는 신경이 마비되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음식도 넘길 수가 없어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안신경(眼神經)이 마비되니까 눈이 깜빡거리지 않아서 눈이 말라서 고통 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우리가 평안히 누워서 잠자고, 숨쉬고, 물을 마시고, 눈을 깜빡거리며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감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렇게 평소에 감사꺼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평범한 것 속에서 감사를 찾아가면서 감사하는, 감사를 훈련하는 절기입니다.

며칠 전 조선일보에 보니까, 일본에 출장을 갔던 한 직원이 일본방송에서 이북의 그 비참상(悲慘狀)이 방영되는 것을 시청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앞다투어서 북한의 실상을 국민들에게 소상히 알리는데, 당사자인 우리들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심경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을 신문에 기고(寄稿)를 했습니다.
한분이 함경도 온성에 있는 노동단 연대에 생명을 걸고 잠입을 해서 그 실상(實相)을 촬영했습니다. 한 20평 남짓한 공간에 남녀 구별없이 빽빽하게 앉아서 잠을 잡니다. 누워서 잠자는 것이 아니고 앉아서 잠을 자야하고, 아침 6시부터 해질 때까지 죽 한 그릇으로 연명하며 중노동을 하는 모습, 연료가 없어서 어린이 남녀가 자동차를 밀어가는 모습들.
인터뷰의 내용들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이곳은 생지옥입니다. 나는 죽음의 문턱까지 몇 번 갔습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상상이 안 될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서 최근에는 다섯 명이나 목매어 자살을 했습니다. 얼마나 혹독하게 다루는지 일년 안에 폐인이 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증언들을 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배고픔을 걱정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 수 있는 나라가 세계에서 12개 나라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 지구상에는 2백 수십 나라가 있는데, 그 중 배고프지 않고 잠자리에 들 수 있는 나라는 열 두 나라밖에 안 되는데, 그 열두 나라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60년도만 해도 이북이 남한보다도 경제력이 더 나았습니다. 1971년 우리나라 총 수출 규모가 10억 달러였습니다. 일인당 GNP가 2백 8십 9달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만 달러가 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같은 하늘 밑에서, 같은 한반도에서, 한쪽은 이렇게 살고 한쪽은 저렇게 살아가는 이 극명(克明)한 대조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이런 은총을 우리가 누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이 IMF보다도 더 살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 생각하면 우리는 너무도 감사거리가 많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감사절에 이런 감사의 제목들을 찾아가면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신앙인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 지구상에는 신앙생활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라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순교자의 목소리> 미국 부장인 토마스 화이트 씨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지금 이북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중국으로 탈출해 나온 탈북자들이 많이 있는데, 중국에 숨어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기서 성경학교 같은 곳에서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난 다음에 가슴에 불이 붙어서 다른 나라로 탈출할 수 있는데도 사명감을 가지고 이북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가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잡히면 처형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가슴 속에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예수믿는 것이 얼마나 귀한 줄 다시 한번 깨닫고 다시  이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이 돌아가서 발각되면 펄펄 끓는 쇳물을 퍼부어서 죽인답니다. 한 사람은 그 현장을 보고 증언을 하는데, 1백 5십 명이 집단적으로 학살을 당했는데, 그 시신(屍身)들을 과수원 나무 밑에 거름으로 썼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고문을 한답니다. 60㎝ 정도 되는 폭에  1m10㎝ 쯤 되는 감방같은 특수방에다가 사람을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앉을 수도 없고, 설 수도 없고, 그렇게 6일이나 10일 동안 거기 갇혀 있다가 나오면 다리가 구부러지고 폐인(廢人)이 되어서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예수믿는 것 때문에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는 마음껏 예수를 믿을 수 있는 환경에 살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 하나하나를 살펴보세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모두가 감사거리인데, 이 감사의 계절에 하나하나를 감사의 시각을 가지고 내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불평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불평할 권리가 없는 사람들인 줄 알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귀한 삶의 환경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입에서 불평이 나오고, 원망이 나오려고 하면 내 손으로 입을 막아버리고 의도적으로라도 감사하려고 노력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사람들에게 받은 은혜를 감사합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서로 의존되어 있음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어야 됩니다. 선사시대(先史時代)에는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을 위해서 일을 해 왔습니다. 만약에 이런 삶의 방식을 초월하지 못했다고 하면 오늘날의 삶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내가 우물 파서 물마시고, 내가 씨 뿌려서 농사하고, 내가 탈곡하여서 방아 찧고, 내가 밥해서 먹는다고 하면, 내가 길쌈하여서 베 짜고, 내가 나염하여서 옷 만들어 입는다고 하면, 내가 병들면 산채를 다니면서 약초 캐어서 내 질병을 낫게 한다고 하면, 내가 공부하여서 내 자식에게 가르쳐서 사람 만든다고 하면, 내가 나무해서 땔감으로 쓰고, 내가 석탄 파고 내가 석유 파서 쓴다고 하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지치고 괴롭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직접 안해도 우리 집에 물이 들어옵니다. 전기가 들어옵니다. 기름이 들어옵니다. 쌀이 들어옵니다. 채소가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있어서 내가 이렇게 편리하게 살게 된다는 것을 한번 감사해보지 않았습니까? 평소에는 못 깨달아도 이 감사절에는 한번 깨닫고 감사를 훈련해야 되겠습니다.
내 주변에는 감사해야 될 손길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정말 많은 은혜를 내게 주었던 손길, 기도해 주고, 사랑해 준 사람들, 그들 때문에 오늘의 내가 된 줄 알고 이 감사절기에  전화를 해서라도, 글을 써서라도 감사를 표시한다고 하면 인간관계가 얼마나 더 아름다워지겠습니까? 우리의 사회가 얼마나 풍성해지겠습니까?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오늘 내가 여기까지 온 줄 알고, 여기에 오기까지 누군가가 지어준 집에서, 누군가가 중동에서 파서 보내준 기름으로 자동차를 타고, 누군가가 만들어준 옷을 입고,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 때문에 오늘 내가 이곳까지 와서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은혜를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우리가 감사하되, 특별히 감사의 계절에 내게 은혜를 베풀어준 분에 대한 은혜를 다시 한번 깨닫고 감사하여서 ‘아, 내가 은혜를 베풀었더니 이렇게 감사가 돌아오는구나’하고 감동케 하여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은혜를 베풀어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도록 아름다운 분위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뿐만 아니라, 감사절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지난 번 태풍 매미를 통하여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자연의 힘 앞에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리 모아두고 쌓아두어도 하나님이 불어버리면 다 끝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돕지 아니하면 다 끝나는 것이라고 하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는 곳은 상점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농부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공장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불어버리면 공급(供給)이 끊어집니다. 값이 폭등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그것이 내게 순조롭게 올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아무 것도 올 수 없습니다.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금년에도 내가 농사하고, 내가 사업하고, 내가 직장생활해서 얻은 것, 모두 내가 얻은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생명주시고, 건강주시고, 지혜주시고, 하나님이 주신 일터, 하나님이 주신 협력자들을 통하여서 내가 얻게 된 것이지, 나 혼자서 얻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에는 하나님이 다 백그라운드가 되어있고, 하나님께서 주셔서 그들의 손길을 통하여서 내게 오게 된 줄 믿고 하나님 앞에 더 감사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년 한 해 동안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하나 찾아보고 헤아려보고 감사하는 것이  감사절을 지키는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을 볼 때 우리가 분개(憤慨)합니다. 그들에게만 분개하지 말고,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닌가, 내게는 그런 일이 없는가 자신을 한번 살펴보고 감사할 수 있는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해야 할 분들에게 감사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는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성경학자 도날드 반 하우스 목사님이 전도여행에서 돌아올 때에 자동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지나가던 젊은이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친절하게 자동차를 고쳐줍니다. 차를 고치는 동안, 개 한 마리가 청년 주위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청년이 그 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청년이 혼자 등산을 하다가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마침 지나가는 들개가 보여서 손짓을 하고 도와달라고 불렀더니, 놀랍게도 그 개가 와서 청년의 옷자락을 끌어당겨서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청년은 개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사랑으로 길렀습니다. 이제는 한 침대에 잘 정도까지 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반 하우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건져준 이 개를 누가 발길로 걷어차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반쯤 죽여 놓겠습니다.” 그러자 반 하우스 목사님이 또 물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무서운 형벌에서 건져주기 위해서 대신 죽어준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 내가 죽을 마음을 가지고 그에게 감사하겠습니다.” 반 하우스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예수님을 모르는 척 하면, 이게 사람이겠냐고, 그 분을 모르는 척 하면서 살 수 있겠느냐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구원을 어느 정도의 돈과 바꿀 수 있습니까? 구원과 1백조 원과 바꾸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놀라운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가 정말 감사드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금년에 교회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분들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뜨겁게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헌금으로 감사를 표시합시다.

고린도후서 9장에 보면 헌금의 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신앙고백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나는 돈 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드리라>고 11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7절에는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드리라>고 했습니다. 5절에는 <즉흥적으로 드리지 말고 잘 준비했다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헌금(獻金)과 연보(捐補)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헌금과 연보는 다릅니다. 헌금은 돈을 바친다는 의미로 광범위하게 쓰여집니다. 기독교에만 헌금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종교에도 헌금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보((捐補)는 교회에 국한되어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어떤 사람은 연보는 주로 구제(救濟)할 때 쓰는 용어이고, 헌금은 하나님 앞에 바칠 때 쓰는 용어라고 합니다. 상식적으로는 맞는 것 같아도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헌금은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반면에 일반적인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연보는 헌금(獻金)과 현금(現金), 즉 cash와 헌물(獻物), 물질이 합쳐져서 연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연보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는 연보가 원어에는 굉장히 다른 뜻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읽었던 본문 11절과 13절에 보면 연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하플로테스’라고 쓰여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순진하다, 소박하다, 진실하다, 올바르다’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연보를 드린다는 말은, 하나님께 헌금을 한다는 말은 가장 진실한 신앙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신앙이 들어가게 되면 물질로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되는데, 이것은 신앙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물질이 아닙니다. 진실한 신앙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 내 신앙이 진실합니다. 내 신앙이 참됩니다’ 하는 뜻이 이 연보, 헌금 가운데 표시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고린도후서 8장 20절에 보면 또 연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때는 ‘하드로테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짙다, 살찌다, 크다, 성숙하다, 두텁다, 풍성하다, 잘 자란다’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은 두터운 신앙의 표시라는 말입니다. 신앙이 좋다,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신앙이 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가 헌금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그 사람의 신앙의 척도(尺度)가 되어집니다. 얼마의 헌금을 내는가 액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헌금의 비중은 그 사람의 신앙과 정비례합니다. 헌금의 비중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이 잘 자라고 있다’ ‘잘 자라지 못한다’ 신앙이 풍성하게, 질과 양이 성장하고 있다고 하는 하나의 바로미터(barometer)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연보는 9장 5절과 6절에 보면 ‘율로기아’라는 말로 쓰여지는데, 이것은 복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 그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연보는 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5. 헌금으로 심은 자가 누리는 복

고린도 후서 9장 6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아멘.
연보는 하나님 앞에 심는 것입니다. 심으면 반드시 아름다운 결실을 가져옵니다. 심는 것보다도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가져오기 때문에 심는 연보 자체가 하나님 앞에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둡니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둡니다. 안 심으면 거두지 못합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이것은 신앙에도 적용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자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십니다. 이것은 모든 드리는 자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미국의 재무장관을 지냈던 존 와나메이커(John Wanamaker)는 YMCA 창설자입니다. 서울 종로2가에 가면 YMCA 회관이 있는데, 그 건물도 와나메이커가 지어준 건물입니다. 그는 미국역사 가운데 10대 재벌에 들어가는 크리스챤 사업가입니다. 미국 제일의 백화점 왕입니다.
그는 백만 달러를 들여서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 당시 백만 달러는 대단한 가치였습니다. 알래스카를 7백만 불에 살 정도였던 그 시대에 백만 불이었으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그 교회당을 헌당할 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어느 추수감사주일이 다가올 때 나는 너무 가난해서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아버지가 일하는 벽돌공장에 가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벽돌 몇 장을 얻어서 그것을 추수감사주일날 하나님 앞에 드렸다는 것입니다.

드리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가진 모든 물질의 10의 1이 아니고, 10의 9도 아니고, 100의 99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나머지 1%만 가지고라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물질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100의 99를 주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았던 목사님께서 어린 저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30년이 흘러서 이렇게 큰 교회당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습니까?”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 벽돌 몇 장을 심었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안겨 주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겠습니까? ‘하나님, 내가 10의 9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삶을 나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록펠러(Rockefeller)와 같이 하나님 앞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할 사람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헌금은 드리는 자에게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聖幕)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성막의 제일 위의 덮개는 물개가죽으로 덮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막의 모든 재료, 크기, 모양을 다 말씀해 주시면서 물개가죽으로 성막을 덮으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재료는 백성들이 자원하여 즐겁게 내는 것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5장에 보면 백성들이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에게 있는 물건들을  기쁨으로 가지고 옵니다. 그런데 25장 5절에 보면 성막을 덮기 위해서 해달(海獺)의 가죽, 물개가죽을 가지고 와서 성막을 덮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물개가죽을 왜 가지고 나왔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신발을 만들기에 제일 좋은 재료가 소가죽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신고 다니는 대부분의 신발도 소가죽들입니다. 그런데 이 소가죽을 구두만드는 재료 쓰지 아니하는 민족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민족이 인도사람들입니다.

인도사람들은 소가죽으로 절대로 구두를 만들어 신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소가 그들의 신이기 때문에, 소를 잡아서 신을 만들어 신으면 섬기는 신을 자기 발로 밟고 다니는 격이 되기 때문에 절대로 소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느냐하면 물개가죽으로 만들어 신습니다.
애굽사람들도 소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시내산 아래에 왔을 때,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안 내려옵니다.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내라고 하니까 뭘 만들었습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었지요. 왜 금돼지를 안 만들고, 금독수리를 만들지 아니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었겠어요? 애굽사람들이 소를 신으로 섬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애굽사람들도 소를 신으로 섬기기 때문에 소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지 않았어요.

소가죽 다음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기 좋은 가죽이 바로 물개가죽입니다. 그래서 인도사람들이 물개가죽으로 구두를 만들어 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개가죽을 가지고 나온 이유는 광야를 지날 때 사막의 뜨거운 모래밭을 걸어가면서 물개가죽으로 신발 만들어 신기 위하여서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것도 많이 가지고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까지의 거리가 며칠동안 걸어가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40년이나 걸려서 가나안에 갈 것이라고 했으면 아무도 안 나왔을 거예요.
그러니까 신발을 만들어 신기 위해서 약간의 물개가죽을 가지고 나왔어요. 이것을 하나님께 드려서 성막을 덮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신발 만들어 신기 위해서 가지고 나왔던 물개가죽을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아십니까?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에 그의 신과 옷이 해어지지 않았더라, 떨어지지 않았더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쓰려고 준비한 것,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하실 때에 드렸더니, 하나님이 내 생활을 책임져 주시더라.> 이것이 물개가죽의 교훈입니다. 만약에 내가 신겠다고 물개가죽 안 바쳤다면 신발 만들어서 얼마나 오래 신었겠어요? 40년 동안 신었겠습니까? 신발없이 광야를 다녔다고 상상해보세요. 얼마나 고통하며 살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신발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40년 동안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셨다고 했습니다.

연보와 헌금은 그 자체가 이와 같이 축복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면, 심으면, 하나님께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것으로 갚아주는 것이 바로 헌금이기 때문에 오늘 이 성경에서 연보를 <축복>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연보를 고린도전서 16장 3절에는 ‘카리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은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헌금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은혜받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심으면 하나님께서 거두게 하십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게 하십니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둡니다. 안 심으면 거둘 것이 없을 것입니다. 연보, ‘하플로테스’는 신앙의 질이 진실하다는 표현입니다. 연보, ‘하드로테스’는 신앙이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연보, ‘율로기아’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지고 오는 지남철이라는 것입니다. 연보 드리는 그 자체가 ‘카리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추수의 계절에 평범한 생활 속에 감사거리를 찾아가며 감사합시다. 절대로 불평하지 말고, 우리는 불평할 권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할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도움을 주었던 주변의 사람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다시 한번 감사를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들까지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서 감사를 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감사의 표현인 연보도 정성을 다하여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준비하여서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연보를 통하여서 ‘하나님, 내 신앙이 이렇게 진실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 내 신앙이 이렇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심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많이 심어서, 많이 거두며 아름다운 간증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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