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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문에 들어가는 감사함을 체험하자 ( 시 100:1-5, 롬 16:1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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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에 들어가는 감사함을 체험하자
( 시 100:1-5, 롬 16:17-19 )

 
필수품과 사치품을 구분하는 것은 자신의 잣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필수품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사치품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개인의 절대적 논리로 구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필수품과 사치품이란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사치품이 필수품이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전 미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활조건은 72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절대 필요한 것이 18가지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그것이 496가지로 늘었습니다. 그 중에서 절대 필요한 것은 28가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풍부한 생활을 향락할 줄 알면서도 그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는 감사할 줄 모르고 삽니다. 감사는 풍부와 궁핍의 차이는 아닙니다. 풍부하다고 감사하고 궁핍하다고 감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필수품과 사치품의 차이도 아닙니다. 필수품이 채워졌다고 감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감사의 잣대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차이입니다.

시편 100편은 제목이 감사의 시입니다. 1절에는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 지어다”라고 합니다. “즐거이 부르라”는 것은 ‘크게 외치다’, ‘개가를 올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입성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입성하는 왕을 문에서 만나는 감격이 어떠한지 아시겠습니까? 감사는 여호와를 만나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2절에는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 지어다”고 합니다.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은 ‘마음도 경쾌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며”는 ‘여호와를 예배하며’라는 뜻입니다. 감사는 여호와를 예배하는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는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라고 합니다. 문에 들어오는 설래임, 감사,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갑니다. 그 문에 들어가는 사람은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올해는 이래저래 따져봐도 별로 감사할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태풍 매미 피해로 벼 수확이 23년만에 최저를 기록했습니다. 흉작이어서 농부들이 울상입니다. 경제는 IMF때 보다 더 어렵다고 합니다.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든 나라가 어렵습니다. 또 최근에는 이라크 파병문제로 정부도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최근의 환률도 심상치 않습니다. 극심한 빈부차로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습니다. 서민들은 상대적 박탈감이 최고도로 올라 있습니다. 강남의 아파트 시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올라있습니다. 20평짜리 아파트가 7, 8억이라니 어디 말이 됩니까? 또 로또복권으로 수십억원을 챙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은 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은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조건이 있으면 더 이상 감사가 아닙니다. 파아핀이라는 사람은 세 가지만 있으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일용할 양식이요, 둘째는 몸의 건강이요, 셋째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 가운데 감사치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은 ‘감사’입니다. 일상 용어 가운데 28%가 감사라고 합니다. 우리도 꼼꼼히 감사해야 할 이유를 찾아봅시다. “그 문에 들어가며” 감사합시다. 우리가 그 문에 들어가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 문에 들어가는 감사를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 궁정의 문에 들어간 감사를 드립시다.
4절은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라고 합니다. 궁정의 문에 들어갈만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궁정에 식구가 된 것만도 감사한 일입니다. 궁정의 문을 밟은 것만해도 영광입니다. 궁정에 사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궁정에 삽니다. 왕자가 살고, 공주가 삽니다. 대신들이 드나들고, 여러 신하들이 있습니다. 상궁과 나인과 내관들이 궁정에 삽니다. 여러분은 왜 궁정에 들어갑니까? 여러분의 신분이 무엇이길래 들어갑니까? 어떤 사람은 끝까지 공주인데, 어떤 사람은 하필 내시를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거 고르세요.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간 사람은 엄밀히 말하면 들어간 것이 아니라 거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거기에 살면 거기의 식구이지요. 하나님의 궁정에 살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궁정의 왕자요 공주입니다. 하나님의 궁정의 식구가 된 것만도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만도 감사입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영광입니다. 시편 92:3에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궁정 문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 안에 심기운 사람들입니다. 그 안에 심기운 것은 큰 축복입니다. 궁정에는 아무나 들어갑니까? 엄격한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주와 왕자는 아무 때나 문에 들어가는 권리를 가집니다. 그 문에 아무 때나 들어가는 권리를 가진 이것이 감사의 조건입니다. 시편 84:10은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궁정의 문지기만 되어도 감사가 넘칩니다. 자녀의 권리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양자도 당당한 권리를 가집니다. 집에 살 권리가 있습니다. 주인된 권리가 있습니다. 상속의 권리가 있습니다. 아무 것이나 가질 소유의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 아들은 그 비싼 등록금 고지서도 당당하게 책상 위에 두고 갑니다. 앞으로 갚겠다는 말도 안하고, 미안한 기색도 전혀 없어요. 이게 자녀의 특권입니다. 궁정의 문에 들어간 특권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 특권이 감사입니까? 이 특권과 감사를 누립니까? 당당하게 누리세요. “죄중의 죄는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크리소스톰이 말했습니다. 그 문 안의 식구가 된 것을 감사하세요. 감사할 내용이 큽니다. 여기 들어간 것만 해도 감사입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안에는 풍성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문의 들어간 감사를 드립시다.
요한복음 10:7에는 “나는 양의 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0:3에는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문은 예수님의 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문에 들어가고 그 우리에 들어간 양이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양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문인 그 양의 우리에 들어가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 안에 있는 것이 평안이고 행복입니다. 거기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거기엔 자유와 해방이 있습니다. 거기는 빈약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엔 항상 풍요한 꼴이 있습니다. 거기엔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외로운 곳이 아닙니다. 나를 아시고 이름을 불러 내시는 곳입니다. 우리가 사탄의 손에 들지 않고, 예수님의 문의 우리에 든 것을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일곱 귀신이 들렸던 사람도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귀신의 마음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으면 그 마음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탄의 우리에 들지 않고 예수님의 우리에 있기에 예수님의 마음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문에 들어간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임페리얼 박물관에 유명한 한 특별한 그림이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성당에 들어가려 하는데 주교가 문을 딱 막아선 채 “못 들어갑니다”하고 저지하는 내용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소재가 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후 390년, 데살로니가에서 로마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 1세는 이를 진압한다고 데살로니가 시민을 1,500명이나 학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교회는 로마 황제를 엄히 정죄했습니다. 이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밀라노에 갔다가 성당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당시 밀라노의 사교는 그 유명한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였습니다.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기독교도로 개종시킨 분입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암브로시우스와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성당 정문 앞에 버티고 서서 황제를 단호히 가로막았습니다. “못 들어갑니다.” 서슬이 시퍼렇게 선언합니다. 목숨을 건 암브로시우스의 이러한 태도 앞에서 황제는 얼결에 대꾸합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왕도 죄인이 아닙니까?” 그러니 자기에게도 이렇게까지 냉혹하게 대할 것은 없지 않느냐 하는 뜻의 변명인 셈입니다. “다윗의 죄를 모방하시렵니까?”하고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말문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참회도 모방하셔야지요. 다윗처럼 회개를 하십시오.” 황제는 기가 질려서 땅바닥에 엎드리고 맙니다. 이것이 그림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문에 들어가는 것은 복입니다. 교회의 문은 죄인이 구원받는 문입니다. 회개치 않은 죄인은 들어오지 못하는 문입니다. 우리가 그 문에 들어가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감사의 조건입니다. 이 문에 들어간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셋째, 하늘나라의 문에 들어간 감사를 드립시다.
가장 감사해야 할 문은 하늘 문입니다. 하늘 문에 들어간 것은 감사 중의 감사입니다. 하늘 문은 하나님이 여시는 문입니다. 하늘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문은 누구나 들어가지만 모두가 다 들어가는 문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스데반은 마지막 돌에 맞아 죽기 전에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의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 전도의 문을 열기 전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와 구약에서 먹지 못하게 하신 더러운 짐승이 보자기에 담긴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성경에서 하늘 문을 여신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특별하신 경우에 하늘문을 여시고 하늘을 보여주십니다. 말라기에는 십일조를 하면 “하늘문 열고 복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하늘문을 여시는 은총을 주시는 복입니다. 우리가 들어갈 문은 하나님이 초청하시는 문입니다. 요한계시록 4:1에는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고 하십니다. 열린 하늘 문으로 올라 오라고 하실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이 은총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우리가 이 구원을 받았으며 하늘문을 들어가는 은총을 받았으니 감사해야 합니다. 하늘 문을 무엇으로 엽니까? 열쇠가 있어야 합니다. 브루스 윌킬슨은 영원한 삶에 관련된 모든 것을 결정짓는 두 개의 열쇠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열쇠는 믿음입니다. 이 열쇠는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고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곳을 결정하는 열쇠입니다. 두 번째 열쇠는 행위입니다. 이 열쇠는 상급을 향해 난 문을 열어주고 영원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를 결정하는 열쇠입니다.

결론
성경은 다른 종교의 경전과는 달리 ‘감사’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감사의 종교라고 합니다. 감사란 은혜를 받은 자가 은혜를 베푼 자에게 고마움을 보답하는 뜻으로 마음과 행동, 그리고 입술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사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의 감사의 깊이에 달려 있습니다.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하는 자가 많이 감사합니다. 토마스 머턴은 ‘고독 속의 명상’이란 그의 책에서 “감사와 배은망덕 사이의 중립적 입장은 없다. 감사하지 않는 이들은 곧 모든 것을 불평하기 시작한다.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감사가 아니면 불평입니다. 감사가 아니면 미움입니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감사를 택해야 합니다. 감사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들어와 있는 문을 보세요. 이것이 감사의 조건입니다. 비록 풍요하지 못하는 가을걷이지만 우리가 이 축복의 문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감사의 조건입니다. 우리의 존재, 사람됨이 감사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궁정의 문에 들어온 것을 감사하십시오. 양의 문이신 예수님의 우리에 들어와 있는 양이 된 것을 감사하십시오. 하늘 문으로 들어와 하늘 백성이 된 것을 감사하십시오. 이런 감사가 있다면 세상이 불안하고, 세상이 부족하고, 세상이 어려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이 문에 들어가는 풍성한 감사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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