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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하는 일군이 됩시다 / 마 9: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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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하는 일군이 됩시다. / 마 9:37,38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7-38)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복음사역의 적극적인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특히 추수할 것은 많되 라고 하시어 구원해야 할 영혼이 많음을 비유로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전도사역을 추수로 전도자를 추수할 일군으로 표현하심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전도를 종말론적 심판과 관련시킵니다. 추수는 마지막으로 거둬들이는 일입니다.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와 알곡이 나눠집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면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의 긴급성을 의미합니다. 추수는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씨 뿌림도 가꿈도 때를 잘 맞춰야 합니다만 추수의 때를 놓치면 씨 뿌림과 가꿈의 모든 수고가 아무 소용없게 됩니다. 신속한 복음화를 위해 이 열려진 추수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익은 곡식 거둘 자가 없는 이때에 누가 가서 거둘까 내가 어찌 게을러서 앉아 있을까 어서 가자 밭으로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제단 숯불 내 입술에 대니 어찌 주저할까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주가 두루 다니시며 일꾼 부르나 따르는 자 적구나 보라 주의 사랑하는 익은 곡식을 어서 거두러 가자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제단 숯불 내 입술에 대니 어찌 주저할까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주가 나를 인도하니 언제 어디나 기뻐 가서 일하리 주가 명령 내리실 때 능력 받아서 기뻐 거두리로다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제단 숯불 내 입술에 대니 어찌 주저할까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271장 1-3절)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주님 나를 보내어 주소서" 할 수 있는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추수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의 추수기에 추수하는 일꾼반열에 심부름꾼으로서 추수하시는 주님의 곁에서 함께 도와 줄 수 있는 자로서의 추수사역자가 되는 일이 진정 영광스러운 일인 줄 믿습니다. 구약 시대의 출애굽과 광야생활을 연상한 감사도 귀합니다. 가나안 입성하여 주신 축복의 감사도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청교도들의 신앙자유를 위한 고난 중에 주신 열매와 풍요의 감사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 영적 추수를 많이 하는 풍작을 위하여 눈물로 많은 씨를 뿌리고 가꾸고 장성시켜 하늘 곡간을 가득 채우는 신령한 추수를 감사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추수감사주일 새생명 대 축제일을 맞으며 추수할 일군이 됩시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추수할 영혼을 바라보는 일군이 됩시다.

예수님이 보실 때는 언제나 추수할 영혼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37절에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보이는 곳마다 추수할 영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 그를 따르는 여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면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하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심이 마땅한 일이나 너희들이 더 문제니 너와 너희 자녀의 영혼을 위해서 울라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영혼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추수해야할 영혼을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는 이 세상이 온통 추수할 곡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위를 신령한 눈으로 바라보면 추수할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아내와 남편 중에도 있습니다. 한 집안에 사는 자녀들이나 부모 형제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많은 시간을 같이 하는 직장 동료들 중에도 있고 학우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가까운 친척 이웃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바라보면 여기 저기 영적으로 추수할 대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추수할 일군에게는 모두가 추수할 대상으로 보입니다. 영적으로 추수할 영혼이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총을 힘입고 성령의 안약을 발라서 추수 할 대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내 영혼이 변화 받고 거듭나서 새로운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을 거닐고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곁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이런 무리들을 볼 때 정치가들은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자기에게 표를 던질 수 있는 한 표로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자기 장사의 대상 자기의 이익을 줄 수 있는 고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 한사람이 작품의 대상일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시고 무리들을 보았을 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고 있는 양들로 보았습니다. 성경이 인간에 관한 여러 가지 아름다운 묘사들을 하는 중에 가장 탁월한 묘사 중에 하나가 양이라는 표현입니다. 인생을 양으로 보시는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 위해서 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들이 주님의 눈에는 목자 없는 양으로 보였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 방황하는 양들로 보시는 예수님처럼 추수할 영혼을 바라보는 일군이 됩시다.

찰스 피니라는 미국의 유명한 부흥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는 어느 날 미국의 시카고 거리에 왔다가 거리의 교차로에서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 지나가는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그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곁에 있는 분이 "목사님 왜 그러세요?" 그는 그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잖아. 복음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고 있잖아."

우리도 지옥갈 영혼을 민망히 여기며 추수하는 일군들이 됩시다.


  유리하는 심령을 민망히 여기는 일군이 됩시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무리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민망히 여기시니 라고 합니다. 여기서 민망하다는 말은 함께 고통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유리하는 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보셨습니다. 양의 방황이 자신의 방황이었습니다. 양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고 양의 눈물이 자신의 눈물입니다. 그들의 방황 두려움 아픔 좌절을 자신의 좌절처럼 아파하십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꾼은 주님과 함께 민망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인줄 믿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는 책에서 예수님을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한다고 합니다. 자신은 건강하고 전혀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접근해 간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오셔서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또 강보에 싸인 아기의 모습으로 오셔서, 이 땅의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시면서 우리처럼 고통당하시고, 아파하시고, 모든 인생의 아픔을 경험하셨기에 우리를 이해할 수 있고 우리를 치료할 수 있는 치유자,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하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바로 그런 상처 입은 치유 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를 인용한다합니다. 어떤 랍비 하나가 우연히 예언자 엘리야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랍비가 예언자 엘리야에게 묻습니다. 메시야는 언제 오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뜻밖에도 엉뚱한 대답을 하는 거예요. 무슨 대답을 하냐면 엘리야가 “가서 직접 물어보세요. 메시야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아니 어디 계신데요?” “아마 저기 성 바깥에 지금 사람들을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아 ~그래요. 내가 어떻게 메시아를 알아 볼 수가 있습니까?” 이때 엘리야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말하기를 이렇게 말을 한다합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도 상처를 입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상처를 풀었다 감았다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상처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두리번거리며 도울 자를 찾고 있는 분이 바로 그 분이 아마도 메시야 일 것입니다.”

  성경에 그려져 있는 메시아에게 상처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상처가 있습니다. 배신 단절 고독 소외가 얼마나 아픈 상처인가를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십자가의 절정에서 외치신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십니까? 라는 단절과 고독과 배신과 상처를 이해하시는 분이시기에 죄인 된 인생을 이해할 수 있는 분이고 우리를 정말 치료 하실 수 있는 그 분이 바로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한다고 합니다. 

추수할 일군은 사람들을 볼 때 민망히 여기며 아픔을 보면 함께  아파하고 좌절할 때 붙들어 주고 낙심할 때 위로하며 버려둘 수 없어 사랑하는 마음으로 접근해 가는 사람이 추수할 일군입니다.

내 상처도 있고 아픔도 있으나 자기 아픔 속에만 빠지지 않고나 내 아픔을 통해서 나보다 더한 아픔 속에 주저앉아 있는 이웃들을 민망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일꾼이 추수할 일군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자신도 상처가 많습니다. 아픔도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상처에 집중하고 있으면 인생은 그냥 자기 상처와 싸우다가 끝납니다. 자신에게도 상처가 있지만 그러나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셨다면 더 깊은 더 예리한 상처 때문에 울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  주변의 사람들 목자 없이 방황하고 예수님이 없이 방황하고 있는 이웃들을 찾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잘 차려 입은 옷이나 악세사리가 근사하고 화려한 머리단장으로 치장을 했다 하여도 그 영혼이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못 만났다면 그 사람은 한없이 불쌍한 존재요 유리하는 양입니다. 인간적으로 잘해주고 친하게 지내는 부모 형제 부부 자식 친구가 있다 할지라도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못 만났으면 그 사람은 고생하며 유리 하는 영혼입니다.

이 모습을 바로 보는 심령이라면 울 수밖에 없습니다. 눈물로 기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리방황하는 불쌍한 영혼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에 눈물 지울 수밖에 없습니다.

중병이 들어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일이 귀한 일입니다. 빚을 지고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면서 기도하는 일도 귀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목자를 만나지 못하여 고생하며 유리 하는 모습을 보고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눈물과 금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욱 귀한 일인 줄 믿습니다.

예수 믿고 죽는 것은 영적인 면에서는 하나도 불쌍한 것이 없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예수 믿고 죽는 것은 최고의 복입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며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도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23)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안타깝게 여기고 기도해야할 대상은 예수 믿지 않고 방황하는 영혼입니다. 우리 육신은 살아도 얼마 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라고 합니다.

육신보다는 영혼이 귀중합니다. 그 영혼을 끌어안고 기도해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 한 번 의미 있게 살고 싶습니다. 무의미하게 그냥 내 일생의 상처 붙들고 몸부림치다가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쓰임을 받는 인생이 되기 원합니다. 추수할 일꾼으로 쓰임 받는 인생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원하시면 저를 쓰실 수가 있사오니 저를 사용해 주시옵소서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도 중국의 수많은 영혼들이 예수 알지 못하고 죽어 가는 영혼을 생각하며 절규했다 합니다.

하나님이여! 저 죽어 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추수하는 일군으로서 이런 영혼을 위한 애정 어린 절규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참된 추수하는 일군인 줄 믿습니다.

바울처럼 형제 골육 친척이 구원받는다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구원 받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모세처럼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진다 하여도 자기 백성들이 멸망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선택하겠다는 마음을 품는 것이 진짜 추수하는 일군의 마음인줄 믿습니다.

유리하는 영혼을 민망히 여기는 일군이 됩시다.


  복음 전파를 위해 쓰임 받는 일군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잘 익은 고구마처럼 예수 믿기 위해 잘 준비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덜 익은 고구마처럼 아직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생고구마처럼 아예 젓가락도 안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합니다. 그러나 전도란 하나님이 하시는 것으로 우리가 할 일은 마치 젓가락을 가지고 고구마가 잘 익었는지 찔러보는 것처럼 말로 그분이 잘 준비된 영혼인지 알아보는 일이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믿으십니까?"라는 질문을 해보고 안 믿는다고 하면 "그래도 믿어보세요. 참 좋습니다"라고 해서 다음에 잘 익을 때까지 기다리며 그 다음에 만나서는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더 익을 때까지 기다린다 합니다. 그러면 이들 중 하나님의 방법으로 익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생긴다 합니다. (고구마 전도왕 전도이야기).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마다 애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 웨슬레가 한번은 그의 시대에 효과적인 세계복음화의 전략을 위해서 동료 지도자들과 모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들이 토의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웨슬레가 일어나더니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방법이요? 우리에게 방법이 있다면 단 한 가지의 방법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만약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죄만을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100명만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금년이 지나가기 전에 이 세상을 뒤집어 놓겠습니다."

세계 기독교 교회사를 기술한 학자 가운데 라토렛이라는 학자가 1세기의 초대교회를 기록하면서 "초대교회 역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힌바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스토리"라고  기록하였다 합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우리 주변에서 아무나 볼 수 있는, 우리가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서 세상을 바꾸고 있는 삶의 이야기가 초대 교회사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지식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프로그램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조직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후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만 성령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교회는 프로그램도, 지식도, 조직도, 후원도 가지고 있지만,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너무나 부요 해져서 성령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이제 할일은 성령의 권능을 사모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10:1)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낼 때 그냥 보내지 않았습니다. 권능을 주어 보냈습니다. 오늘도 추수할 일군에게 권능을 주실 줄 믿습니다. 복음은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전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함께 하면 귀신이 쫓겨나고 모든 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게 됩니다. 추수하러 가는 자에게 반드시 하나님께서 권능을 주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신 말씀대로 성령의 권능 받고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의 축제는 기쁨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씨 뿌림과 가꿈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는 힘이 들어도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 126:5)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6)

영혼 추수는 기쁨과 감사의 축제입니다.

전도의 결실 영혼의 수확은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큰 제물입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롬 15:16)

하나님과 천사들 모든 교회가 함께 기뻐할 축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 15:10)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 15:32)

주님처럼 추수하는 기쁨, 전도하는 기쁨을 맛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금번 우리의 표어는 나도 할 수 있다. 한번 해 보자. 구호는 나가자 전하자 모셔오자 1인 1명 이상입니다.

이런 구호가 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복음이 아니면 무엇을/당신이 아니면 누가/

지금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사명 감당하기만 하면  영육 간에 복 받게 될 줄 믿습니다. 교회는 절로 부흥될 줄 믿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  참으로 추수할 일군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추수할 일군으로서 수많은 영혼을 추수하여 주님께 드리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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