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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으로 보답할꼬 / 시 11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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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6:12-14
무엇으로 보답할꼬

지난 주간에 도시 밖으로 나가니 가을이 깊어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추수는 끝났고, 열매를 수확하면서 감사를 고백하는 때를 맞이하고 있구나 생각되었습니다. 올해는 농사가 흉작이라고 합니다. 기나긴 장마와 태풍 매미의 상처로 가을 열매를 거두어  들이는 일이 무거워 보였습니다.

사실 우리 마음도 그러합니다. 경기는 불황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국내외 정치 환경은 불안하게 느껴지기만 하는 때입니다. 문제는 그래도 감사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답은 그렇다 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감사를 고백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감사를 가장 많이 고백한 사람으로 우리는 구약 성경의 다윗과 신약 성경의 사도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감사하며 산 것은 그들에게 남들보다 더 감사할 환경과 조건이 많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다윗은 수많은 환난과 역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일생을 돌아보면 죽음의 위기 속에서 쫓기고 숨어사는 때가 있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이들로 배반당하는 큰 아픔을 겪었습니다. 왕으로서 맨 발로 궁궐을 도망쳐 나와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위기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였습니다. 구약 성경의 시편은 대부분이 다윗의 시인데, 그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신약의 사도 바울의 일생도 가난과 굶주림과 고통과 죽음의 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감옥에서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억울하게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표 속에서 그는 언제나 가슴으로부터 샘물을 흘려  보내듯이 하나님께 감사를 고백했습니다.

감사에는 상대적 감사와 절대적 감사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상대적 감사는 환경과 조건에 따른 감사입니다. 좋거나 잘 되면 감사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평 불만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절대적 감사가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조건에서든지 감사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수도원과 감옥은 비슷합니다. 둘 다 외부로부터 격리되어 있습니다.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수도원은 찬양과 기도가 있고, 감옥은 원망과 탄식이 있습니다.

무엇이 감옥을 감옥 되게 하고, 수도원을 수도원 되게 하는 것일까요? 다름이 아니라 바로 감사입니다. 수도원에 살면서도 감사가 없고 불평과 불만뿐이라면 그곳은 지옥입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 있다할지라도 거기 감사가 있다면 그곳에 천국입니다.

감사는 한 사람의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 수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감사로 인하여 한 사람의 미래는 지옥으로 연결되기도 하고, 천국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여기에 감사의 능력이 있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그 감사의 능력으로 삶의 현장을 바꾸고 그의 미래를 바꿉니다.

또한 감사는 계속해서 감사할 일을 퍼 올리는 신비의 능력이 있습니다. 촛불을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달빛을 주십니다. 달빛을 감사는 이에게 하나님은 햇빛을 주십니다. 햇빛을 감사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하늘의 생명의 빛을 허락해 주십니다. 이렇게 감사는 더 큰 감사를 체험하게 해 줍니다. 바라기는 우리 성도님들 감사로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과 일터와 민족의 현실과 미래를 천국으로 바꾸는 능력 있는 신앙인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갈 때 감사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우리 삶을 항상 통째로, 전체적으로 볼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이나 모세 같은 신앙의 위인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의 유년기는 행복했습니다. 청년 혹은 중년기는 매우 불행했습니다. 그러나 노년기에는 다시 축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한 때, 인생의 한 때를 살았습니다. 그들은 감사가 아니라, 하늘을 원망하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 그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 처하면 당연히 하나님을 버려도 괜챦다고 생각될 수 있는, 참으로 모진 한 때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그 모진 한 때를 당해 결코 탄식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 모진 한 때가 인생 전체에 있어서 그야말로 한 때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미국 뉴욕에 있는 높이 381M의 유명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02층이라고 합니다. 왜 102층으로 지었는가? 그것은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오늘의 미국 땅에 도착한 102명의 청교도 신앙인들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미국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현대 국제 사회를 주도해 가고 있는 중심 국가가 미국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미국이 이런 나라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기독교 학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역사학자들도 한결같이 인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청교도 신앙이라고 합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멀리 영국에서 작은 배를 타고 긴 항해를 해서 신대륙에 왔습니다. 180톤 밖에 안 되는 작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엄청난 모험을 했지만, 그 배라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배는 평균 시속 3Km로 사람 걷는 속도와 비슷한 느린 배였지만, 117일 간을 전진할 수 있었음을 감사했습니다.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지만, 한 아이가 태어나는 일로 감사했습니다. 폭풍을 만나 큰 돛대가 부러졌지만, 배가 파선되지 않은 일로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최고의 감사는 고통스런 3개월여의 여행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돌아가자는 사람 없이, 146명 전원이 죽더라도 전진하자고 주장한, 그 믿음과 용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1620년의 겨울을 지나는 동안 거의 절반이 죽었습니다. 그 무서운 추위와 풍토병과 굶주림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사로 어려운 여건과 상황을 이겨 나갔습니다. 이듬해 가을 추수를 거둔 50여명의 사람들은 먼저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추수 감사절의 시작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시편 50편 14-15절의 말씀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을 하나님은 건지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 후손을 축복하사 오늘 미국이 있게 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미국 비자를 받으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미국이 예를 들자면, 아프리카나 동남아 어느 나라라면 사람들이 그렇게 가려고 애를 쓰겠습니까?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에 감사하니,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가 환란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리라” 시편 138편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전체적으로 통째로 보아야 합니다. 먼 역사의 앞날까지도 내다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한 때의 고난과 어려움도 이겨 나갈 수 있고, 진정한 감사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어떤 자세로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가? 항상 삶의 양면성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질서를 낮과 밤, 행복과 불행, 높음과 낮음, 남자와 여자, 있음과 없음 등과 같이 양면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양면의 질서를 통해 사람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한쪽만 보는데 익숙합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박 넝쿨 그늘이 드리워지니 좋아했습니다. 벌레가 박 넝쿨을 갉아 그늘을 지우니 싫어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오복(다섯 가지 복)은 좋아합니다. 그러나 생노병사의 사고는 싫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양면성을 모두 인정하고 전체적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합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거두어 가신 자도 여호와시니 하나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욥의 기도입니다. 참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저는 추수 감사절을 맞을 때마다, 전에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그 어느 날인가 배 집사님이란 분의 집에서 감사 예배드리던 것을 잊지 못합니다. 당시 이 배 집사님은 시장 통에서 남의 가게 앞에 다라이 몇 개를 놓고 채소 장사를 하면서,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과 함께 작고 작은 방 한 칸을 빌려 10년 가까이 월세를 살고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하루 종일 시장 바닥에 앉아서 채소를 팔면서 하루 번 돈 가운데 십일조는 따로 보관하였다가 주일날 아침이면 매주일 어김없이 하나님 앞에 한주일 십일조 예물을 드렸습니다. 한주일도 빠짐없이 감사 헌금도 드렸습니다. 그야말로 정성스런 예물이었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인 헌금이었습니다.

이 배 집사님이 심방을 원해 집을 찾아가니, 집 앞에 미리 나와 기다리다가, 전에 살던 집이 아닌 다른 집으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이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부엌을 통해 들어가니, 새로 도배한 제법 큼직한 방 하나와 작은 방 하나가 있는 집이었습니다.

배 집사는 초등학교 1학년 아들 손을 잡고 서울로 올라온 이후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이 날까지 10년을 고생해서 이제 800만원 전세로 이 집에 이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월세 아닌 전세 집에서 감사 예배를 드리니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너무 감사한다면서 눈물을 내비치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최근에 우연히 배 집사님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교회 근처에 월세도 전세도 아닌, 훌륭한 제 집을 마련했고, 신앙생활도 변함이 없으시며, 그 때 고등학교 다니던 아들이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직장 생활 잘 하고 있고, 참하고 좋은 며느리를 얻어, 손자까지 보았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어찌 그 인생을 돌보지 않으셨겠습니까?

저는 그날 그 감사 예배를 잊지 못합니다. 어려움과 고독과 고통을 감사함으로 이겨 내신 집사님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양면성 속에 살아갑니다. 그 양면을 모두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살아갈 때, 언제나 어디서나 넘치는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 일로 인한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성도님들, 많은 이들이 참 힘들어 하십니다. 많은 이들의 수입이 줄어들었고, 실직 당하거나 부도를 맞은 이들도 계십니다. 무엇을 감사할까 돌이켜 보면 원망과 탄식이 저절로 나와 올해 추수감사절이 잘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감사가 없다면, 그것은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만, 우리는 가장 값진 것, 가장 중요한 것을 아직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찬송가 중에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참 귀한 찬송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믿음만 있다면, 초막이면 어떻고 궁궐이면 어떻습니까? 그 어디나 천국이 될 줄을 저는 믿습.

경제 불황으로 우리가 잃은 것은 황금과 재물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 결코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 버렸어도 여전히 천국의 삶을 살 수 있으며, 그와 같은 삶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하박국서를 보면 선지자가 노래합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고, 우리에 양이 없어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찬송하고 기뻐하리로다.” 참으로 귀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 감사가 오늘 우리의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잃어버려도 이 믿음만 있으면 여전히 감사하고 여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면서 천국의 삶을 앞당겨 사시는 우리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그 감사를 보답하려는 마음을 품는 것이 소중합니다. 다윗은 그가 받은 은혜를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고백하기를 기뻐했습니다. 그 감사가 다윗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만든 것입니다.

감사가 하나님 앞에 고백될 때 그 감사는 하나님을 감동하는 진정한 감사가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들, 생활 속에서 감사를 회복하시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시는 가운데 진정 우리의 삶의 주관자가 되셔서 인생의 길을 선히 인도하시고 온전한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일마다 때마다 체험하시는 추수 감사절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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