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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야다의 돕는 신앙/ 대하 2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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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야다의 돕는 신앙
          (역대하서 24:1-14)


인생을 가치 있게 사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남을 돕고 사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돕고 산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기쁨과 보람이 거기에 있습니다. 물론 남을 돕는다는 것은 자기를 희생해야 하기 때문에 달갑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돕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 돕는 것처럼 자랑스럽고 축복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하셨습니다. 즉 남을 섬기고 돕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당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돕는 데서 인생의 가치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도움을 통해서 상대방이 잘되고 성공한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돕는 것만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도움의 결과를 보면 대단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회는 남을 돕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가 살 만한 사회요 희망이 있는 사회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살기가 어렵다고 이민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남을 도울 줄 모르고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성행하기 때문에, 살기가 각박해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은 참으로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여호야다 제사장이 요아스 왕을 돕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다 나라에는 일곱 살 밖에 안 되는 요아스가 어린 나이에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나라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점점 빛을 잃어 가는 그런 때였습니다. 그런데 요아스가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을 받아 정치를 잘 하여 점차로 나라를 회복시켜 나갔습니다.
당시 제사장 여호야다의 역할 감당이 컸던 것입니다. 그가 훌륭한 것은 어린 왕을 잘 도와서 망해 가는 나라를 일으킨 점입니다. 사실 훌륭한 사람은 자신이 앞서기 보다, 이렇게 뒤에서 남을 도와서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직접 앞서는 것이 아니라,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기는 희생됩니다.
그런 점에서 여호야다가 훌륭한 사람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여호야다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그가 요아스 왕을 잘 돌보아 주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요아스는 너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서 여호야다 같이 현명하고 경험 많은 사람이 아니면, 나라를 통치할 수 없었습니다. 일곱 살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입니다. 이런 아이가 왕으로 등극한 것 자체가 모순이지만, 당시 사회적인 정황이 그러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도무지 통치가 불가능한 일인데, 고맙게도 그를 뒷받침해 주는 훌륭한 여호야다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상황이 되면 하나에서 열까지 다 도와주어야 합니다. 아니,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챙겨서 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아마 일곱 살 된 아이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초등학교 1학년인데, 이런 아이가 학교에 가려고 하면 엄마가 더 바쁩니다. 깨우고, 씻어 주고, 밥 먹이고, 옷 입히고, 책가방 챙겨 주고, 그리고 시간을 맞추어 학교에 보냅니다.
그리고 학교에 갔다 오면 숙제도 도와주어야 하고, 같이 놀아 주어야 하고, 학원에도 때를 맞추어 보내야 합니다. 자신이 알아서 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지금 요아스 왕이 일곱 살이니 그런 형편이므로, 그 역할을 야호야다가 다 한 것입니다. 그가 뒤에서 충실하게 돌본 것입니다. 요아스는 이름만 왕이지 실제로는 여호야다가 왕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잘 돌보았는지 어린 왕이 통치를 잘 했고, 나라가 잘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지도자는 나이가 많든 적든, 능력이 있든 없든, 뒤에서 잘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잘 도와주지 못하면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런 지도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 나라 초대, 이 승만 대통령 같은 사람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나름대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일하려고 했지만, 그 주변에 인물들이 잘 도와주지 못해서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고, 독재자로 낙인 찍힌 채 권좌에서 물러났습니다. 이 기붕 이라든지 곽 영주, 최 인규 같은 사람들이 방해가 된 것입니다. 그들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완전히 막아 버려 판단을 흐리게 한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대통령 측근 비리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특검을 통과시켰습니다. 노 무현 대통령이 아무리 인격이 훌륭하고 개혁의 비전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합니까? 측근들이 도와주지 않고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데 말입니다.
지도자 혼자 똑똑하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주변 사람들이 잘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돕는 사람이 더 유능하고, 의식 있고, 힘이 있어야 합니다.
남편의 성공과 출세 뒤에는 언제나 아내의 내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남자이지만,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만드신 것입니다. 창 2:18절에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남편들이 아내의 내조, 도움으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입니다.
돕는 사람이 잘 도와주어야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호야다가 훌륭합니다. 그는 대제사장으로 어린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아주 깊은 데까지 생각하고 도와 준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보면 여호야다가 친히 아비 된 심정으로 요아스의 아내를 간택해 주기도 했습니다. 왕비를 택해 결혼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돕는 자가 있었기에 유다 나라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국운이 왕성해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남을 돕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희생하고 잘 도와주면 그 사람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덕을 봅니다. 그러나 잘 도와주지 못해서 잘못 되면 모든 사람에게 고통이 임하는 것입니다. 결국 남을 도와주는 것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요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다.
여호야다가 요아스 왕을 잘 도와 줄 때는 국운이 왕성했지만 그가 죽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요아스 왕이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에 그를 돕는 자들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악한 방백들이 도와 준 것입니다. 이것은 도와 준 것이 아니라 왕을 망하게 한 것입니다.
요아스가 방백들의 꾀임에 빠져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에  악정을 실시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 숭배의 길을 걸었고, 그를 책망하는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돌로 쳐죽이는 일도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돕는 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여호야다가 훌륭한 사람입니다.
사실 이런 여호야다 같은 인물이 흔치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있는 사람의 주변에 있으면 자기 명예와 이권부터 챙기려고 생각합니다. 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시는데,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자리를 청탁했습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7)하고 자리 청탁을 한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정권을 잡으시면 자기형제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심입니다.
역대하서 22장에도 보면, 아달랴 라는 여자가 자기 아들 아하시야 왕을 잘 돌보지 못해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하시야가 죽었을 때 유다 왕의 씨들을 진멸시키고 자기가 직접 통치했습니다. 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하는 짓들입니다.
참으로 여호야다 같은 인물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남을 돕고 섬기는 일을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뒤에서 보살피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날 성공과 출세만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남을 돕는 것을 외면했습니다. 다 자기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지, 남을 돕는 자가 되겠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돕는 역할이 얼마나 필요하다는 것을 모른 것입니다.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돕는 자가 훌륭한 사람입니다.
교회도 이렇게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교회에 많은 기관들이 있는데, 회장 혼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돕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돕는 사람이 많으면 그 기관도 활발하게 사업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을 할 수 없다고 어려움을 호소하는 기관들이 있는데, 그것은 회원들이 도와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업이 계획대로 안되고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기관마다 돕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기독교는 남을 돕고 섬기며 희생을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하셨습니다. 희생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훌륭한 사람은 자신을 희생시켜 남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호야다가 이렇게 남을 돕는 일을 잘했습니다. 우리도 본을 받아야 합니다. 천국에서 큰 자는 남을 돕고 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수고를 기억하시고 상급과 면류관을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또 하나 여호야다를 눈여겨볼 것은 그가 제사장으로서 요아스 왕을 신앙적으로 도와 준 부분입니다.
2절에 보면 요아스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여호와의 전을 중수하였고, 또 여호야다가 사는 날 동안 여호와의 전에서 항상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여호야다가 요아스에게 영적으로 도움을 주어 신앙적으로 바르게 인도한 증거입니다.
사실 이 도움이 되어야 진정한 도움입니다. 여호야다는 제사장으로 백성들의 신앙을 지도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왕의 신앙도 지도해야 합니다. 우리도 남을 신앙적으로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어 신앙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신앙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야다는 요아스 왕이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신앙적인 도움을 준 것입니다.
돕는 것도 큰 은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2:28절에 보면 바울이 교회의 직분을 말하면서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돕는 직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돕는 사람이 훌륭한 직분자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든지 거기에서 돕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도와서 신앙적으로 바르게 설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을 잘 돌보면 다른 것은 저절로 잘됩니다. 여호야다가 요아스를 영적으로 잘 도와 준 결과는 그가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교회도 지도자를 신앙적으로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보배와 같은 존재입니다. 실제로 앞서서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신앙이 미약하고, 일이 서툴러 보기에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사 그런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비판하지 말고, 여호야다 같은 마음으로 신앙적인 지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여기에서 부딪힙니다. 목회자 때문에, 장로 권사 때문에, 회장 때문에, 구역장 때문에 일하기가 힘들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있지만 한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도력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내 할 일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위해서 기도해 주고, 도움을 주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처음 개척을 하고 일꾼이 부족할 때입니다. 한 해 연말에 선교회에서 회장을 세우는데 신앙도 약하고 경험도 없는 사람을 세운 일이 있었습니다. 본인도 어렵다고 고사를 했지만, 형편상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총무로 뽑힌 사람이 경험이 많아 세심하게 보필하고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회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회무 처리하는 방법, 심방 하는 방법, 심지어 기도하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한번은 부인이 보니까 화장실에 들어가서 무엇을 중얼중얼하는데 기도를 써서 외우더랍니다. 그런데 그 기도문도 총무가 써 준 것이었습니다. 월례회 때 회장이 기도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런 도움으로 일년 동안 회장의 사명을 감당했고, 또 잘 했다고 그 다음 해에 한번 더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도움을 통해서 회장이 한 기관을 잘 이끌고, 큰 일을 한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런 사람이 여호야다 같은 사람입니다. 앞서 있는 사람이 부족해도 신앙적으로 도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부인들 가운데도 남편을 인도하여 신앙적으로 도와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아내의 인도로 교회에 나옵니다. 처음에는 우습게 신앙 생활을 하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아내들보다 앞서서 도와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도는 어떤 위치에 있든지 남에게 신앙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가정에서 부부간에 신앙적인 도움이 되어야 하고, 부모에게 신앙적인 도움이 되어야 하고, 자식에게도 신앙적인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여호야다 같이 남을 도와 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될 사람이 필요합니다. 절대로 남을 돕는 일을 천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도와주는 것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도와주는 사람이 더 유능해야 도와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지도자형과 참모형이 있습니다. 성격상 남을 다스리는 지도력이 강한 지도자 형이 있는가 하면, 또 남을 잘 돕는 참모형이 있습니다. 사회가 지도자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지도자는 한 사람만 있으면 되고, 다른 사람은 다 참모가 되어야 합니다. 돕는 사람이 많아야 좋은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돕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인가를 알고 여호야다 같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신앙적인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남을 돕는 사명을 자각하고 어떤 자리에 있든지 헌신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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