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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지도자와 비전 / 시 1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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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지도자와 비전

본문: 시126:3-6

어떤 곳에 조그마한 한 부족을 다스리던 추장이 나이 많아 세상 떠날 시간이 점차 가까워옴을 알고 세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세 아들에게 똑같은 과제를 주었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바라보이는 높은 산이 있었습니다. 추장은 세 아들에게 그 산 봉오리까지 올라가서 가장 인상 깊고 소중한 것 한가지씩을 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세 아들은 높은 산 봉오리까지 올라갔다 내려왔습니다.
얼마 후에 추장은 맏아들부터 불러 무엇을 보고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맏아들은 그 산봉우리에서 본 아주 진귀한 풀을 내놓았습니다. 둘째 아들을 불렀습니다. 둘째 아들은 그들이 사는 동네를 내려다 본 인상을 말했습니다. 셋째 아들이 아버지 앞에 왔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 저는 특별히 진귀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 산 너머에는 매우 비옥한 평야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너무 좁습니다. 우리 부족이 그 평야로 이동해야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추장은 그 아들의 말을 다 들은 후 셋째 아들에게 추장 직을 인계해 주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크게 가져야 합니다. 생각을 크게 가져야 합니다. 큰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보는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잠재력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자주 물어보곤 합니다. 비전이 지도자를 만드는가? 아니면 지도자가 비전을 만드는가?
나는 비전이 먼저라고 믿습니다. 나는 많은 지도자들이 비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리더십을 잃어버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보는 대로 행합니다. 그것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동기 원리입니다. 스텐포드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배우는 것의 89%는 보고 배우는 것이며, 10%는 듣고 배우는 것, 그리고 나머지 1%가 다른 감각으로 느끼고 배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성장은 시각적인 자극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비전과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지도자가 연합할 때 역사는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꿈 자체만을 따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꿈을 가지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전해주는 지도자를 따릅니다. 그러므로 일이 시작될 때 비전은 지도자를 만들지만, 그 비전이 자라고 사람들이 따르게 하기 위해서는 그 지도자가 반드시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1. 어떤 사람은 비전을 전혀 볼 줄 모릅니다. 이들은 방랑자입니다.
2. 어떤 사람은 비전을 볼 줄은 알지만 자신의 것으로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졸병입니다.
3. 어떤 사람은 비전을 보고, 그것을 추구합니다. 이들은 성취자입니다.
4. 어떤 사람은 비전을 보고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이들은 지도자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설교가는 많지만, 지도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설교는 성도들을 압도할 만큼, 마치 하늘로부터 울려오는 듯한 목소리, 훌륭한 화술 등은 교인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통해 용기를 얻고 위로를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설교들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교역자들은 자신을 스스로 목자라고 자처하나 양들의 삶을 책임지지 않고, 삶의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주님은 겸손과 온유와 희생의 삶을 가르치며, 본보이며, 따를 것을 가르쳤으나, 그들은 세상부귀 영화와 출세를 부러워하고 잘못된 것을 추구하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꿈과 비전은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꾸미고 많은 사람들의 추종을 받으며 세상에서 높임 받을 것에만 급급했지 교인들의 영혼에는 무관심합니다. 교회 세속화를 부추기거나 꿈꾸는 목회자들은 소경된 인도자요 삯꾼입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닙니다.
당신이 다니는 교회의 목회자는 어떠합니까? 혹시 세상의 명예, 권세, 부귀영화를 부러워하고, 자랑하고,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의 타락은 언제나 신학자, 성직자 및 교회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의 입장에서 변형시키고 왜곡시킴으로써 야기됩니다. 한국교회는 분명히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개혁은 소위 유명하다는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교회 자체 안에서 스스로 개혁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하나님의 말씀에 억눌린 자들에 의해 폭발물이 터지듯 터져야 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먼저 한 사람의 지도자에게 꿈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꿈을 백성들에게 선포하게 만드셔서 그 꿈이 모든 백성들의 소유가 되게 하십니다. 꿈이 없는 민족은 망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오랫동안 목회를 해 오면서 제일 몸서리쳐지는 것이 소위 "수용소식 관리목회"였습니다. 성도들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꽉 짜여진 조직으로 사람들을 얽어매고 전화로 들들 볶는 목회는 성도들도 그렇지만 닥달하는 사람도 참 괴롭습니다.
기독교는 '강요하는 종교'가 아니라 '매혹시키는 종교'여야 합니다. 교회들이 '꿈의 목회'로 전환하지 못하고 여전히 사람을 졸라매기만 하는 '수용소목회'의 패러다임을 그대로 끌고 간다면, 결국 교회는 오기만 남아있는 앙상한 독선주의자들의 집단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열심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꿈이 부족합니다. '열심의 빈곤'이 아니라 '비전의 빈곤'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 말을 "노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해 왔습니다. 즉 아무리 모자란 머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그 노력으로 부족한 영감을 보충할 수 있다는 말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진의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에디슨은 전혀 다른 해석을 내렸습니다.
"1%의 영감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1%의 영감 없는 99%의 노력은 헛수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꿈과 비전이 없는 땀은 무의미합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꿈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보면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형벌이 나옵니다. 그 최고의 형벌은 큰 바윗돌을 산꼭대기에 올렸다가 떨어뜨리고, 또 올렸다가 떨어뜨리는 것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형벌입니다. 즉 '무의미'입니다. 사람을 가장 괴롭히고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무의미'의 문제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꿈을 잃어버린 불쌍한 세대입니다. 젊은이들이 철저히 '현실주의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젊은이들에게서 꿈이 빠져 나가버리면 그 속에서는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꿈을 잃은 젊은이들은 서서히 방탕으로, 쾌락으로, 약물로 죽어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 교사는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꿈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학기 초, 성경 수업시간에 교과 프로그램 중에 조별로 토론해서 역사상 모든 인물들 중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 다섯 명을 뽑고 그 이유를 발표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1학년10반 한 조에서 이수 선생님이 나왔습니다. 이유를 발표하라고 했더니, 이수선생님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용기를 심어준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리스도인 교사는 이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저도 이수 선생님께 잘 보여서 그 방법을 좀 전수 받아야 하겠습니다. 바벨론에 완전히 멸망당하고,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도 꿈을 잃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하여 주시리라. 여호와께서 살아계시니 우리는 반드시 고국땅을 밟게되리라. 여호와의 날에 우리는 반드시 빛나는 영광 위에 서리라. " 이 꿈과 믿음이 그들을 살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도다. " 우리에게도 이 믿음의 꿈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겁니다. 씨를 뿌린다는 것은 미래의 결실에 대한 소망을 전제로 하는 행위입니다. 맹목적인 노동이나 수고가 아니라, 꿈을 가지고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비전은 낙관과 희망을 포함합니다. 비관주의자가 위대한 지도자가 된 적은 없었습니다. 비관주의자는 주어진 모든 기회를 어렵게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낙관주의자는 모든 어려움들을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비관주의자들은 항상 가능성에 앞서 어려움들을 바라보며, 앞으로 전진하기를 열망하는 비전을 가진 사람을 만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의 깊은 사람은 낙관적인 지도자를 도와 그가 실제적으로 일을 처리해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선천적이고 뿌리깊은 신중함이 하나님께서 높이 날도록 의도하신 사람의 날개들을 자르지 않도록 지켜보아야 합니다. 어려움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너무 분명하게 자기 가능성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감화를 줄 수가 없습니다. 비전은 위험을 무릅쓸 수 있게 해주며, 역사는 위험을 무릅쓰는 믿음의 편에 섭니다. 비전을 소유한 자는 외관상으로 공허한 느낌이 들 때에도 기꺼이 믿음의 신선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지나간 과거가 가치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유익을 얻게 된다고 해도, 우리는 과거를 너무 중시한 나머지 과거를 위해서 미래를 희생해서는 안됩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급변하는 정책에 대한 그의 확신 안에서 미래를 바라봅니다.
위대한 일을 성취한 사람들은 위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비전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꿈하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꿈은 야망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으며, 그 야망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비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표이자 뜻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은 소명의 산물이요 그것에 일생을 바치고 생명을 거는 거입니다. 비전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시는 성령의 감동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는 교회의 비전을 가지고 사역을 해야 합니다. 교회의 비전을 가지기 위해 저는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목회자는 교회를 섬기면서 매년 목표와 표어를 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비전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살아있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드린 '다락방기도'에서 교회에 대한 당신의 비전을 담아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 17:21)
교회는 먼저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이요, 주님과 일치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비전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며 그리스도가 곧 목표요, 그리스도가 교회의 비전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한국교회는 사람을 키우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그 비전을 함께 공유할 제자들을 양육하는데 당신의 전 공생애를 바쳤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과 키우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회적으로 초라한 신분의 사람들을 택하여 미래의 교회를 맡기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게서는 사람을 키우는 제자훈련을 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 세상으로 파송되었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세상이 변화되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떤 조직도 아니요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곳이나 사업을 하는 곳은 더더욱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변화된 사람인 주님의 사도들이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제자훈련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도를 세우는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셋째, 한국교회는 민족을 사랑하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마28:19) 선교의 비전을 제시하셨습니다. 모든 족속은 다름 아닌 민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동족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통곡했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이 저주받는 것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분단된 민족으로 이 세계에 남아 있습니다. 같은 동족과 원수를 맺은 지 반세기를 넘어 섰습니다.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체제가 다름으로 인해서 갈등구조 속에서 서로를 증오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비전으로 민족의 미래를 보고 민족을 살려내야 합니다. 사실 돌이켜보면, 지난 날 기독교가 반공을 교리화해서 반공이 신앙인 것처럼 고백하며 의식화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대적하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우리가 단호히 반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정신을 따른다면 그보다 먼저 공산주의자들을 용서하고 저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저들을 정죄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품어줘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의 동포들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저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민족을 살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북한 땅에 무조건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 제국을 건설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지나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한 꿈을 갖기보다는 민족을 사랑하는 비전으로 화해와 용서의 마음으로 저들을 긍휼히 여기는 민족애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진정한 민족구원을 이루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 우리 주님이 주시는 비전입니다.
미래를 이끌어갈 영적 지도자는 어떠해야 할까요? 사도행전 13장 말씀에서 찾아봅시다.
첫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과 같아야 합니다. 안디옥 성도들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고 신실하고 위대한 신앙인들을 많이 키워냈습니다. 가장 유능한 전도자들을 세계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는 교회 중의 참된 교회였으며 성도 중에 최고의 신앙인들 이었습니다. 그들을 머리에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지고 기쁨과 소망이 용솟음치게 됩니다.
둘째, 미래를 이끌 지도자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행 13;3).
안디옥 교회 신자들이 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금식하며 기도하였다는 것을 사실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를 통하여 계속 그분을 만나고 그 분의 뜻을 헤아려 순종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신자에게 하나님은 형통의 문, 건강의 문을 열어 놓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성도,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서 안디옥 교회처럼 미래에 크게 쓰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미래를 이끌어갈 지도자는 “성령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입니다(행 13:2).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성령님에게 순종했습니다. 성령님은 교회의 주인이고 추수꾼의 주인이시며 참 인도자요, 목자이십니다. 성령님은 강력한 태풍처럼 또는 불처럼 역사하십니다. 안디옥 교회 신자들은 성령 충만하여 힘있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장막 터를 넓히고 온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미래의 세기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세기입니다.
넷째, 미래를 이끌 지도자는 ‘꿈(Vision)을 꾸는 사람’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자기 교회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온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안디옥 성도들은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계 복음화를 꿈꾸었고 로마 복음화를 꿈꾸면서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그 결과 313년 로마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습니다.
다섯째, 미래를 이끌 지도자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사람”입니다(행 13;1). 안디옥 교회에는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많았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꾸준히 자기를 훈련시키는 사람,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위해 시간과 정력을 쏟는 신자가 내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힘은 건물이나 재물이 아닙니다.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훈련된 성도들입니다. 성령을 주인으로 모시고 기도하는 사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내일을 꿈꾸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꾸준히 자기를 훈련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래서 내일의 영적 지도자로 쓰임 받읍시다.
이밖에 참된 교회 지도자가 꼭 갖추어야 할 자격은 첫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양무리를 치는 목자의 사명을 주실 때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요21:15-17) 둘째, 지도자는 하나님의 소원을 아는 비전이 필요합니다. 지도자는 자기가 가본 길보다 더 멀리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전의 중심은 지도자에게 있습니다. 리더십의 본질은 비전을 갖는 데 있습니다. 그 비전은 당신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 명백하고도 강력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소리가 나지 않는 트럼펫은 불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트럼펫의 소리는 자신의 내면에서 비전을 탄생시킨 지도자에게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인류 역사상 모든 황금 같은 시대는 어떤 한 사람의 헌신과 의로운 열정을 따라 일어났습니다. 대중운동이란 것은 없었습니다. 단지 그렇게 보였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항상 하나님을 알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한 사람이 존재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은 가능성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선물은 그 가능성으로 무엇을 하느냐 입니다. 위대한 지도자들은 ‘높은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만약 당신이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 열심히 올라왔는데, 오르고 보니 잘못 건축된 빌딩이었다면 이 얼마나 인생의 큰 낭비입니까. 지도자는 하나님을 알고 나를 향한 그분의 소원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최대한의 가능성을 키우며,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씨뿌리기입니다. 셋째, 참된 교회지도자는 말씀을 사랑하여야 합니다.(딤후 3:15-17) 넷째, 가르치기를 잘해야 하고 관용하고 다투지 아니하여야 합니다.(골1:28, 딤후2:24, 딤전3:3, 딛3:2) 다섯째, 말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믿는 자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딤전4:12) 여섯째, 대접하기와 구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딤전5:10, 딤전6:18) 일곱째, 순교를 각오하고 책망 받을만한 과오가 없어야 합니다.(행20:24, 행21:13, 딤전3:2) 여덟째,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행6:3) 아홉째, 착한 양심을 가지고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술을 즐기지 않아야 합니다.(딤전1:19, 딤전3:3, 딤전3:9) 열째, 더러운 이익을 멀리하고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딤전3:8, 벧후1:6)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꿈과 비전을 가르치고 보여주는 지도자를 만나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아울러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 목자요, 지도자요, 구원 주되심을 잊지 맙시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시27:14)
* 기도: 나로 하여금 꿈을 가지게 하신 하나님, 내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알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이 세상 속에서 명철한 분별력을 나타내게 하시며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진 꿈과 희망을 나눠주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태릉고등학교 교사)
http://bigjoy.c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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