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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버리는 기쁨 / 빌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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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버리는 기쁨
본문 : 빌립보서 3:1~9

옛날에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자손들에게 늘 하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생활방식 차이가 있는데, 이 잘사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생기면 버리지를 않는 습관이 있어서 잘 사는 거라고 합니다. 그저, 막대기 하나라도 훌렁훌렁 내버리지 않고 꼼꼼하게 챙겨두면 언젠가는 그것이 삶에 요긴하게 쓸데가 있게 되니까 저 손바닥만한 밭떼기 하나라도 장만하면 쉽게 팔아버리지 아니하고 지독스럽게 끼고 있으면 소유가 늘어나게 되니까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못사는 사람들은 이 손에 들어온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쉽게 버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소유가 다 날아가 버린다 합니다. 그럴듯한 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알면서도 성격적으로 타고난 사람은 그것이 잘 안됩니
다. 예를 들면 저 같은 사람은 버리는 것 참 좋아합니다. 아마 그래서 부자는 평생 못될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버려봤자 값나가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잘 가지고 있으면 필요할 것 같은데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성격인지 버리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우선 저 같은 사람은 평생을 책과 살아야됩니다. 그런데 제일 많이 버리는 게 책입니다. 아마 내 기억에 한 3,000권은 버린 것 같아요. 가끔 사찰 집사님 날 좀 도와달라고 불러 가지고 수백 권씩 갖다 버립니다. 보지 않는 책을 내가 뭐합니까? 괜히 나한테 부담만 줍니다. 그래서 참 많이 버렸고 지금 갈보리교회 올 때도 책 한 2,000권되는 것은 다 내버리고 훌훌 단신 이렇게 나왔습니다. 또 어떤 때는 이렇게 봐 가지고 안 입은 옷이라든가 안 신는 운동화 뭐, 이런 게 필요 이상으로 많더라구요. 쓱 봤다가 활활 내버리면 "아빠, 내 운동화 어쨌어요?" "버렸어." "아니, 왜 버려요?" "아니, 그렇게 많을 필요가 있냐? 운동화가 한 사람에 하나, 둘이면 됐지 5∼10개씩 운동화를 가지고 살 필요가 뭐 있냐?" 다 버리고 그러니까 그게 저는 어떻게 보면 스트레스 해소 같아요. 확확 내버리는 게...
제거 저 시내 산에 여행을 갔는데, 목사님들이 여럿이 갔어요. 그런데 시
내 산에 가면 춥다고 아주 두꺼운 겨울 잠바를 준비해 오라고 안내를 받아서 그런 것을 하나 샀어요. 모자 달리고 하나도 춥지 않은 거, 눈에 가서 굴러도 괜찮은 거를 하나 비싼 값을 주고 잘 샀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로스앤젤레스는 평생 살아도 그런 옷을 입을 이유가 없는 기후예요. 시내산에 가기 위해서 샀는데 아니, 시내 산에 올라갔는데 땀이 펄펄 나는데 그게 뭐가 필요해요? 하나도 필요하지 않아요. '에이, 이거 괜히 가져왔다! 짐만 된다!' 그래서 그 새로 사고 비싼 옷을 "나 이거 여기 주민들에게 주겠다!" 그러고 사람을 부르니까 옆에 있던 친구 목사가 "아니, 이 목사! 그거 왜 그래? 그 비싼 옷을 버리려고 그래?" "이거 필요가 없잖아? 이거 L.A에 가져가야 평생 가도 L.A에서 입지 못하니까 버릴 꺼야. 누구 주어야겠어." 그러면서 누구를 부르려고 하니까 "아니, 그거 나 줘! 그 비싼 옷을 왜 버려?" 그래서 그 친구가 그것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커요. 짐이 많아요. 두꺼운 옷이라서.. 아, 그 친구는 그걸 가지고 다니느라고 고생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고생고생 하다가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오면서 "이거 가지고 가봐요 소용없겠지?" 그러면서 이거 현지 주민을 부르면서 이거 가지라고 주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걸 받아들고 평생 그런 옷은 못 입어본 것처럼 고마워하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 친구보고 "진작에 버릴 것이지, 왜 고생고생하고 마지막에 버려?"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개척교회를 여러 곳을 했습니다. 이 교회도 사심을 가지고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단 말입니다. 내가 이 사명 지를 버려야 할 때는 버려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있으니까 이 교회를 자기 소유처럼 생각한다든지, '내가 개척한 교회니까...' 이런 마음을 갖게 되면 그것이 하나의 탐욕으로 연결이 되어서 좋지 아니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버릴 때는 버려야만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훌륭하게 살기가 힘듭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버리는 문제입니다. 바울 선생이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모두다 버렸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데 그 바울이 버린 것들이 그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얻기 위해 생명을 거는 귀중한 것을 버렸다는 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유대 땅에서 사람 취급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은 사람이고,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람이 아닌 그런 차이가 유대 나라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게 성경에 나타납니다. 창세기 17장 14절에 보면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쳐 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백성 중에서 끊쳐 진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뜻이에요. 이 할례는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26절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 골리앗을 보고하는 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데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이런 말을 하잖아요? 오늘 바울 선생은 "내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그럽니다. 8일만에 받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중간 할례자! 그러니까 나이가 30대, 40대 되어서 할례를 받은 사람도 많습니다.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 받은 자라야 진짜 할례자 대우를 받습니다. 그래서 8일만에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바울이 이제는 누구하고 지금 싸움을 하느냐 하면 그 사람들하고 싸움을 합니다. 할례당! "할례 받은 자의 권위를 나는 버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무가치하게 버리는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런 말을 합니다. 혈통 관계를 지독하
게 따지는 족속이 세상에서 이스라엘 족속이 첫 번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세계가 모두 인정합니다. 그 이유는 택한 백성의 혈통이라는 아브라함의 후손!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지독스럽게 혈통 보존을 하려고 해도 유랑 민족이요 집시 민족인 이 이스라엘 족속은 자연히 외국인들과 많이 혼혈이 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는 순수 이스라엘 족속이 420만이요 귀화한 이스라엘 백성이 80만∼500만 인구를 유지하고 본국에서 사는 이스라엘 사람 보다 해외에서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미국에서 만도 본국 이스라엘 보다 훨씬 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문제가 났을 때 유대 땅에서 히브리파와 헬라파 유대인이 싸우게 됩니다. 히브리파는 순수 이스라엘 족속이요 헬라파 유대인은 헬라 문화권에서 살고 이방인 결혼도 많이 해서 순수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라 차별 대우하는 겁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신상 명세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8일만에 할례 받고 순수 이스라엘 족속은 자랑거리로 알고 지금까지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회는 실제적으로 그런 사람은 높이 평가하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나는 그것을 무가치하게 생각합니다." 이러며 지금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나는 베냐민 지파요"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왕정 통치
역사로 전환하면서 하나님께서 첫째 왕을 세우셨는데 베냐민 지파에서 사울 왕이 나왔습니다 고로 이 지파는 왕 지파란 소리를 들으며 살았습니다.혈통적으로 왕손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지파에서 최고의 인물이라서 초대 왕의 이름을 그대로 "사울" 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나는 왕손의 후손이요"

그 다음에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그럽니다. 이스라엘 족속을
브리인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의 혈통적 순수성과 사상적 순수성을 강조합니다. 헬라화된 유대인이 너무 많은 사회라서 혈통적으로 조상 가운데 누군가는 헬라의 혈통이 끼어 들었고 삶의 철학 사상도 헬라화된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었지만 "나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이 두 가지 면에서 완벽한 이스라엘 즉 히브리인 된 것" 이러한 순수성을 자랑하고 살았다 그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것을 버리겠습니다." 그런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그랬습니다. 율법 공부는 유대 사회의 최고의 학문이요 권위가 됩니다. 율법학교 나온 사람은 대우를 받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멸시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에 바울은 자신이 "가말리엘 문하생"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가말리엘"이란 말은 "하나님의 상급"이란 뜻인데, 유명한 율법 선생! 당시는 그 사람 밑에서 공부한 사람은 쉽게 출세가 약속됩니다. 그보다 더 권위있는 학문의 길은 없는 최고의 율법 전문가입니다. "내가 그 사람 밑에서 전문가로 율법을 공부한 사람이요." 거기서 공부한 사람들은 소수가 됩니다. 이들은 주로 바리새인들로 구성이 되었고 유대 사회에서 가장 훌륭한 종교인의 권위를 자랑하는 무리인데, 바울은 그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바울을 따르겠습니까?

그 다음에,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그랬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더
큰 권위를 얻고자 하면 바리새인의 적이 되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나서야 됩니다. 청년 사울은 몇 가지 바리새인 공헌이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 충성된 집사인 스데반을 끌어다가 돌로 때려죽이는 현장에 누구의 이름도 거기 나타나지 않는데 사울의 이름이 거기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가 제일 열심히 날뛰었기 때문에 대표자 격으로 그의 이름만이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또, 병사들을 거느리고 관공서의 법적 공문서를 지참하고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도망자 색출을 위해서 다른 나라 즉, 수리아 땅인 다메섹까지 찾아갔던 기록을 사도행전에서 보게 됩니다. "이만큼 나는 바리새파에 충성된 사람으로 나를 따라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최고의 인물 위치에 자신 있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바리새인의 자격을 오늘부터 버렸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 다음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랬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을 "율법주의자"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율법을 훨씬 더 잘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정도의 위치에 있으면 그 사람은 그 사회에서는 최고의 존경받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의 권력기구인 산헤드린 공의회는 72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울은 가장 젊은 나이의 회원권 소지자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사회에서 바라고 원하는 것을 다 소유한 완벽한 젊은 엘리트! 그것이 사울 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한 나라 안에서 왕의 자리에만 오르지 아니했을 뿐 모든 사람이 그렇게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을 가진 행운아 중에 행운아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이 이 말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그렇게 귀한 것들을 어떻게 비유합니까? 가장 더러운 배설물에다 비유하여 "나는 모두 버렸노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버렸으며 어떻게 버릴 수가 있었는가? 그리고 오늘 우리들은 바울과 같이 국가적 권력이나 학문이나 종교성이나 민족 관념 같은 것을 다 버리고 살아야 하나? 바울은 오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즉, 예수를 믿고 사는데 방해가 될 때에는 모든 것을 버리노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그랬습니다. 이것은 삶의 가치관 설정이 됩니다. "인생 철학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이것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은 세계적 전도자는 될 수가 없습니다. 생활 철학도 또,
문화적 배경과 생활 양식이 사실 그 시대와 지금은 다르고 시대의 수준에 맞는 직업과 은사에 따른 직분을 가져야 되고 또, 예수를 믿으면서도 바울과 같이 버릴 수는 없는 다양성을 우리는 문화권에서 지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가족 구성이 없이 평생을 혼자 살았기 때문에 가족 부양의 책임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버릴 수가 있었다." 또 이렇게도 평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당한 소유도 필요하고 문화 코드에 맞는 생활 양식을 만들어야 하고 성취를 미덕으로 여기는 현대인의 사상도 우리는 삶에서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바울 신앙과 철학을 살피면서 우리 삶을 정리해 나가면 지금 사는 것 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 성경의 진리는 성도의 삶을 빛나게 만들어주고 풍성케 하려는데 목적이 있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을 고난스럽게 만든다거나 혹은 가난하게, 빈궁스럽게 만들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지금 이 말씀의 참 뜻은 더욱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한 쪽의 것은 버려야 되는 진리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주인을 섬기기는 매우 어렵고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이 문화에서 삶을 살았는데, 사람들이 조금은 탐욕스러워졌기 때문에 그 탐욕이 나를 자꾸만 비굴하게 만들고 나를 행복한데도 그 행복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문화 분위기가 너무 많은 시대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자, 요즘에는 집들을 꾸미는데, 집의 구조나 내용이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멋있습니다. 뭐, 어떤 집을 심방가 보면 옛날 임금님도 그런 침실에서 잠을 못 잤을 겁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편리한지 감탄하게 되고.. 그 화장실도 옛날 임금님도 그런 화장실에 앉으셔서 볼일을 못 봤을 겁니다. 참 아름답고 좋고...

'야∼ 오늘날 이렇게 집의 문화가 이렇게 변해서 참 편리하다!' 더운 물,
찬 물 나오고 더운 공기, 찬 공기 다 나오고 완벽한 시설을 가지고 살고... 어떤 때는 심방 가보면 수십 억 짜리 집도 있고 참 좋다... 저는 심
방 가서 기도해 주고 예배드리잖아요? 그런데 그 아름답고 좋게 바라봐지는 그것을 별안간 내 마음에 탐욕이 생겨서 '이 집이 내 집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나는 괴로워집니다. 그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으로 보이지 않는 거예요. 왜? 절대로 내 것이 아니니까!

나는 하나님께서 제일 아름답고 참으로 훌륭하게 가장 잘 만드신 것이 사람이라고 봅니다. 사람을 보면 즐겁고 아름답고 살맛이 나고... 아무리 좋은 곳이 있어도 사람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 미스 코리아나 미스 유니버설 대회 같은 것을 할 때 보십시오. 그걸 쳐다보면 '아니, 하나님이 사람을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몇 시간씩 하는데도 TV로 자리를 안 떠나고 다 구경을 합니다. 아름다움을 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거기 나와서 무슨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무용을 하는 것도 아니고 연극을 하는 것도 아니고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서서 왔다갔다 걸어다니고 가만히 서있고 그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좋아서 사람들이 눈길을 떼지 않고 계속 2시간 이상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에 심취하는 거예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별안간 그렇게 아름다움을 바라보다가 내 마음에 탐욕이 생겨버리면 어떻게 되요? "저것들이 다 내 마누라였으면 좋겠다!" 그 시간부터 그 아름다움은 변해버려서 괴로움이 됩니다. 절대로 그렇게 안되니까... 이 탐욕이 인간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만든단 말입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일이 그렇게 어렵단 말입니다.

탐욕을 어떻게 버릴 수가 있는가? 바울 선생은 그 사회에서 누구든지 갖고자 하는 탐욕을 이미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는 이유가 뭐냐? 더 좋은 것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좋은 것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그렇게 귀한 것을 똥과 같이 여긴다고 바울이 고백했는데, 이것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길이 있으니까 이렇게 성경에 기록으로 남은 것이지 바울 밖에는 절대 지킬 수 없다면 왜 성령의 감동 기록이 이렇게 남겠습니까?

L.A에 있을 때 서울의 대형 교회 목사님이 저희 교회에 오셔서 부흥회를 하는 중에 이런 설교를 하신 것은 내가 기억합니다. 알지도 못하는, 평소에 안면이 없는 여신도 한 분이 목사님을 만나서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다고 해서 오라고 그랬더니 무슨 조그맣고 예쁜 궤짝 하나를 목사님 앞에 놓는데, 그것도 얌전하게 놓지 않고 소리가 "팍" 나게 책상에다 "쾅!" 놓더니 "이것 좀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뭡니까?" 그걸 열어보니까 그 속에 값진 다이아몬드 보석이 가득하게 차있었어요. "아니, 이거 귀한 건데 이걸 왜 가져오셨어요?" "네.. 저는 지금까지 보석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저거 다 내가 가장 마음을 써서 준비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이거 가지고 사시지 왜 가지고 오셨습니까?" 저렇게 많은데도 날마다 속이 상해 못살겠다는 겁니다. 왜? 보석상 앞에 지나가면 속상하다는 겁니다. '저게 다 내 거여야 되는데...' "나는 병적으로 이런 맘이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날마다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는데도 날마다 속상하고 더 많이 갖고 싶고.. 솔직히 저는 아침에 기도를 안하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예수님께 문안 기도는 안 드려도 날마다 이 것을 나 혼자만 아는 비밀 장소에 묻어두고 안녕하신지 매일 문안하고 여행을 가도 이것 때문에 잘 있는지 없는지 마음이 불안하고, 어쩌다가 집에 전기 고치는 사람, 수도 고치러 오는 사람이 오면 다 도둑놈같이 보이고... 내 정신은 온통 이 궤짝에만 있습니다. 어느 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잘못 사는 것이다! 이 궤짝 안에 갇혀있는 반지 몇 개, 쇠붙이 몇 개에다 내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억울하고 창피하고 헛되게 살았고,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내가 뭔데 내 인생을 이렇게 허비하느냐? 없애버려야 되겠다!' 이거, 내 손으로 처리하는 것보다 목사님께서 처리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마음에 평화가 될 것 같아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쾅!" 집어던집니다. 보석에서의 자유함! 여러분은 그 여인이 그후 어떻게 살았을 것 같아요? 버린 기쁨을 가지고 살았어요. 와∼ 자유함! 편안하다! 우리는 미련스럽게도 버리면 더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지고 불행하게 살 때가 많이 있다는 겁니다. 이 목사는 상담을 많이 하는데 제일 많이 하는 상담이 애정 관계 상담을 많이 하게 됩니다. "버리십시오! 그 불필요한 것을 왜 끼고 고생하십니까? 버리면 훨씬 더 편하게 사실 터인데..." 그런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공연히 나의 인간됨의 가치를 노예화해 버리는 것들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탄생한단 말입니다. 버릴 수 있는 방법을 바울 선생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에게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이 말은 "나를 노예화하는 세상의 줄은 끊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내가 노예가 되어 잡히려고 뛰노라." 더 좋은 노예가 되기 위해 다른 노예의 줄을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손해 나는 인생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내 인생은 가장 빛이 나게 될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이전에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부활하신 예수님이 해변가에서 베드로를 보고 물으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너의 삶의 최우선 선택인데,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가치관에 있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네 삶의 최우선 선택이 될 수 있느냐?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 양을 칠 것이
지 왜 여기 와 있느냐?" 불필요한 자존심이 내 인생을 못쓰게 만드는 경우도 너무 많고, 잘못 인식된 이데올로기 때문에 평생을 고난받는 사상가도 있고, 미신에 사로잡혀 불쌍히 끌려 다니는 무가치의 인생도 얼마든지 있고,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움켜잡고 부담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고...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저와 친교를 나누던 어린 시절의 친구들마저 한 명도 내게 남지 않았습니다. 불신 세계의 친구를 버리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만 교제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내 신앙 생활이나 목회 활동에 지장이 되는 친구라고 판단이 될 때는 교제를 끊고 외롭게 살았습니다. 저하고 같이 공부한 동창생들 가운데는 쟁쟁한 친구들도 아주 많습니다. 그 친구들과 어울리면 온통 내가 영적으로 보면 시궁창 같은 곳을 드나들어야 되고 같이 몰려 다녀야 되니까 주님과 친구 되기 위해서 한쪽은 철저히 버리고 한쪽은 철저히 살렸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이 "shalom"이라고 하는 인사말을 하는데, 이 말은 평화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shalom"은 "peace" 보다 훨씬 더 강한 표현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peace"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온 평화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shalom"은 버려졌을 때에도 느끼는 평안, 그것이 "shalom"입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 경제계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데, 극단의 예가 된 실화입니다. 1923년 시카고 에지워타 비치 호텔에서 당시 미국에서 최고로 성공한 사업가 9명이 부호 클럽을 만들었습니다. 성공한 부호끼리 교제하고 자녀들 결혼시키고 피차 도와서 "우리의 명성과 부를 영원히 유지하자!" 하는데 서로 도움이 되자고 부호 클럽을 만들었습니다. 25년이 지난 어느 날 시카고 신문은 그 아홉의 상황을 보도하였습니다. "철강업계의 강자 촬스 슈위드는 파산했다! 가스 회사 사장 하워드 흡슨은 지금 정신 병원에 있다! 미국 최대의 밀 도매업자 아더 카터씨는 변사해서 죽었다. 뉴욕 증권 사상 리차드 위트니 씨와 장관 출신 엘버트 윌 씨는 둘 다 형무소에 있다. 사무엘 인써르 씨는 도망자로 아직도 행방을 찾을 수가 없고, 3명은 자살하였다." 그런 결론을 25년 후에 보도했어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고 움켜잡은 것들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다 없어지고 만다는 말입니다.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여기서 이 배설물이라고 하는 것은 "버려도 아깝지 아니한 것"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화장실에 가셔서 변을 보시고 '아∼ 아깝다! 이 귀한 것을...' 그러신 분 계십니까? 배설물은 버릴수록 좋은 그런 뜻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똥같이 취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얻은 것에 대해 가장 감격하였던 바울의 신앙이 우리 삶을 빛내주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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