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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으로 섬기는 삶 (롬 1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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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섬기는 삶 (롬12:9-11)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옛날 어느 마을에 한 지혜로운 현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그는 강가에서 사람들에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일순간 그는 자신의 옷을 무릎까지 걷어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첨벙첨벙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강바닥을 더듬었습니다.
잠시 뒤 강가로 다시 올라온 그의 손에는 제법 큼지막한 조약돌 하나가 쥐여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 조약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 돌을 깨뜨린다면 이 돌 속이 젖어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말라있을 것 같습니까?"
사람들 중 어떤 이는 말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어떤 이는 방금 강에서 끄집어내었으니까, 또 강속에 오랫동안 담겨져 있었으니까 그 속도 젖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돌을 깨뜨렸습니다. 물론 그 속은 하얗게 말라 있었습니다. 현자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러한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말처럼 흔하게 쓰여지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이 돌처럼 겉만 젖어있고 속은 메말라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조약돌에서 물을 짜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서도 결코 사랑은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마음으로 하는 친절이나 선행은 기껏해야 외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항상 마음으로부터 먼저 우러나와야 합니다.
아울러서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이 좋은 것이로되 우리 마음속에만 갇혀 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질 때 비로소 사랑은 의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일3:18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에는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밖으로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안으로는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겸비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오늘 본문 속에서 같은 맥락속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는 은사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은사는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각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은사는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은사는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습니까? 우리 자신을 드러내라고 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지체들을 섬기라고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사 다음에 사랑이 나오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고전12장에서 각양 은사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곧 이어서 그 유명한 사랑장인 고전13장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왜 은사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하고 이어서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었겠습니까? 은사를 활용할 때 그 바탕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사를 활용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다른 지체들을 섬길 때, 그 근본 정신은 반드시 사랑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랑의 원리입니다. 사랑은 안으로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9절 말씀입니다.

둘째로,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안으로는 우애, 곧 형제의식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존경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안으로는 열심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밖으로는 충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가 이 사랑에 힘입어서 형제를 높여주고 존경해 주십시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더욱 더 뜨거운 마음으로 충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사랑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9절 말씀입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랑은 안으로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우선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는 사실부터 살펴보십시다. 사랑은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기를 마치셨을 때입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큰 무리를 이끌고서 그곳으로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가오더니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께 다가와서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룟 유다의 인사와 입맞춤을 결코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동기가 불순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거짓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아 넘기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마음에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랑은 의롭게 나타나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씀을 기록할 당시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큰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서로 열심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핍박하는 자들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남녀간에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실을 하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핍박을 했습니다.

요즈음도 천주교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여자 성도들이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있습니다. 그 근본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들은 예배드릴 때 부도덕한 행실로 인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와 같은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타락한 세상 사람들이 육신을 즐기기 위해서 나누는 에로스가 결코 아닙니다. 아가페는 거룩한 사랑입니다. 의로운 사랑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윤리적으로도 흠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 해 전에 우리나라에서 "쉰들러 리스트"라는 제목의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보면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독일군이 연합군에게 무조건적으로 항복을 했습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났습니다. 쉰들러는 자기 공장에서 일하는 유대인들을 모아놓고서 마지막 작별 연설을 했습니다. 그 공장에서 일하는 유대인들은 쉰들러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쉰들러를 위해서 한 장의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가다가 행여라도 연합군에게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편지 속에는 그동안의 일을 소상하게 다 기록을 했습니다. 그들은 그 편지에 일일이 서명을 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쉰들러에게 고마운 뜻을 표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이에 씌운 금을 빼내서 하나의 기념 반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기념반지에는 이러한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 자는 온 세상을 구한 것이다.'
탈무드에 나오는 글귀를 인용한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고서 쉰들러는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더 살릴 수도 있었는데, 더 구할 수도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유대인들의 대표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충분히 살렸습니다. 당신 덕분에 천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 덕분에 우리 유대인들은 대를 이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쉰들러가 오열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모릅니다. 나는 너무나 많은 돈을 쓸데없는 곳에 허비했습니다. 이 차,  이 차가 무엇이라고 붙들고 있었단 말입니까? 이 차로도 얼마든지 열 사람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 금핀, 이것으로도 얼마든지 두 사람을 더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그가 일천 명의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만으로는 사랑이 아닐런지도 모릅니다. 그는 술꾼이었습니다. 호색꾼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 허비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가 지금까지 많은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은 자기 만족을 위한 자기 유희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더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더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진정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안과 밖, 속과 겉, 이 두 가지 요소가 언제나 겸비해야 합니다. 사랑은 안으로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밖으로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이러한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 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형제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안으로는 우애입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존경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우애는 친구 사이의 단순한 우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의 뜻은 혈연, 곧 피로 맺어진 가족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가족들입니다. 이와 같은 형제 의식이 분명할 때 우리는 비로소 형제들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눅18장을 보면 세리와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따로 서서 기도를 했습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세리가 죄인이고 바리새인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전혀 형제의식이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세리를 무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우리 모두는 한 형제라고 하는 형제 의식 곧 우애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안으로는 우애이고, 밖으로는 존경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지체마다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을 해 봅시다. 눈이 아무리 밝게 잘 본다 할지라도 눈으로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귀가 아무리 잘 듣는다고 할지라도 귀로 냄새를 맡을 수는 없습니다. 냄새를 맡는 것은 코에 맡겨야 합니다. 음식을 먹는 일은 입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각 지체마다 서로의 역할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다른 지체를 존경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큰 수도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붐비던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부터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하기 시작했습니다. 썰렁해졌습니다.
깊이 고민하던 수도원 원장은 그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 자기의 옛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스승은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더니 이렇게 일러 주었습니다.
"그 수도원이 침체한 것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큰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원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스승님! 수도원에 있는 사람들은 속세를 떠나 수도에만 전념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무슨 큰 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들이 살인죄를 저질렀습니까? 간음죄를 저질렀습니까? 도적질을 했습니까?"
그러자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그 수도원에는 메시야가 변장한 모습으로 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분을 알아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무지의 죄 때문에 수도원은 침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도원 원장은 그 말을 듣고 깊이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는 돌아와서 수도원에 있는 사람들을 다 불러모아놓고 스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모두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차츰 차츰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어쩌면 내 앞에 서있는 이 사람이 변장한 메시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 사람이 변장한 메시야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들은 누구를 대하든지 그때부터 사랑과 존경의 모습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얼마가지 않아서 그 수도원은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로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사랑과 존경이 없을 때 메마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야를 대하는 심정으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할 때,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서 활기를 되찾는 모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들입니다. 믿음의 한 가족들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와 같은 형제의식이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의 마음에 품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그를 더 높여 주고 존경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안으로는 열심, 밖으로는 충성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경상도에 있는 어느 시골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워낙 시골교회라서 목사님이 안 계셨습니다. 어떤 나이 드신 조사님 한 분이 그 교회를 맡아서 수고하고 계셨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호롱불을 켜 들고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조사님은 성경을 펴서 구약성경 시23:1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본시는 그렇게 읽었어야 옳았습니다. 그런데 호롱불 밑이라서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글씨도 가물가물했습니다. 그래서 그 조사님은 시23:1의 말씀을 이렇게 읽었습니다.
"여호와는 내 목을 자르셔도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물론 잘못 읽으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그렇게 읽고 나니까 너무 너무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사님은 그 말씀을 다시 한번 인용하면서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여호와께서 내 목을 자르신다고 할지라도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는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자 그날 예배에 참석한 모든 교인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두요! 나두요! 여호와께서 내 목을 자른다고 할지라도 나는 주님만을 따르겠습니다."
그래서 그 날의 예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은혜로 충만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한국 교회가 단시간 내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마음속에 뜨거운 열심,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불타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열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높고 높은 별을 넘어서 낮고 낮은 땅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남은 피 한방울까지라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열심을 품은 사랑이요, 불타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안으로는 열심, 밖으로는 충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 노예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1:1에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을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를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옛날 어느 나라 왕에게 한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하가 갑자기 중병에 걸렸습니다. 그 신하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를 찾아갔습니다. 왕은 안타까운 듯이 그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지금까지 내게 충성을 다했네. 그래서 내가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인가 보답하고 싶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게나. 내가 다 들어주겠네."
그러자 그 신하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미처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단 며칠이라도 좋습니다. 제 목숨을 좀 연장시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왕은 안타까운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미안하네. 내가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왕임에는 틀림이 없네. 그러나 그 일만큼은 내가 할 수 없네. 그 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그 신하는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폐하, 저는 지금까지 너무나 어리석었습니다. 저는 이 세상의 왕을 섬기는 일에만 바빴습니다. 하늘의 왕을 섬기는 일에는 너무나도 소홀했습니다. 이제 곧 제가 하늘의 왕 앞에 서야 하는데 면목이 없어서 떨리는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돈버는 일에는 그동안 열심이었습니다. 사업을 하는 일에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과연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는 얼마나 충성스럽게 섬겼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을 한번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4:7-8에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육신을 위한 수고는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은 다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을 섬기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설 때에 하나님은 잊지 아니하시고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영원한 하늘의 상급으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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