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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받은자의 허와 실 (왕하 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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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20:1-21                                             
은혜 받은 자의 허와 실


오늘날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에 대해 의사들은 어떻게 대답해 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간혹 나옵니다. 어떤 이는 사실대로 말해줌으로 환자로 하여금 죽음을 준비하게 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사람의 앞일은 모르는 것인데 과학적인 의료 기술만으로 고칠 수 없다고 죽음을 선포한다면 오히려 환자에게 절망감간 가져다주는 결과를 낳지 않겠느냐고 반박하기도 합니다. 1902년 미국의 유명한 의사 캐봇이란 사람은 뉴욕 의사 협회에서 강연하면서, 의사가 희망 없는 환자에게 거짓 안심을 주기 위해 거짓말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고 합니다. 솔직하게 말해 줌으로 환자는 비상한 결의로 그의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기도 하며, 절대적인 신앙으로 주의 능력에 호소하여 나음을 얻기도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유대 왕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 이를 안 선지자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나아가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하고 솔직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히스기야 왕은 금방 절대적인 신앙의 자세를 가집니다. 흔히 말하는 벽면 기도 - 벽을 향해 무릎을 꿇고 드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는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대면하여 해결 받으려는 단도직입적인 자세를 말합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여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며 눈물로 통곡하며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히스기야의 기도에 당신의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다시 불러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3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15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5-6절).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응답에 대한 표징으로 해 시계의 그림자가 뒤로 물러가는 표적도 보여 주셨습니다.

히스기야는 깨끗이 나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위협받던 앗수르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보장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히스기야는 남은 15년을 감격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쁨과 감격 속에 훌륭한 일도 많이 감당하였습니다. 20절,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권력과 못과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중으로 인도하여 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이렇게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민족의 숙원 사업인 예루살렘 성에 물을 공급하는 그 위대한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보장받은 이 15년 동안에 이루는 귀한 일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수도라 일컫는 예루살렘 성은 높은 산 위에 건설된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천연적인 요새였습니다. 옛날에 다윗이 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릅니다. 아주 힘들게 정복하고는 얼마나 좋았으면 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천연적인 요새였지만 높은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물만 떨어지면 아주 곤란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치러온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포위해서 물과 식량의 공급을 끊음으로 이 성을 점령하고자 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사시사철 물의 공급을 받고자 무척 애를 썼습니다. 오늘 주보의 그림을 보셔서 아시는 것처럼 이 우물은 낮은 곳의 기혼 샘의 물을 실로암 골짜기까지 연결하여 그 물을 끌어 올려 사용한 것입니다. 이 기혼 샘의 물을 실로암까지 끌어들이는 약 500m 정도 되는 지하터널을 히스기야가 이루어 놓은 업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은 생명의 감격이 히스기야로 하여금 이런 위대한 일을 하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내가 그저 살아가는 것이라 한다면, 보람 있는 일을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또 그렇게 믿으면서 살 때, 비로소 남에게 유익되고 나 자신에게도 보람되는 그러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죽을병에 걸렸다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낫게 됨으로 생명을 연장 받게 되었다고 하면, 여러분의 그 생명을 어떻게 가꾸시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Livingston이라는 영국의 선교사요 탐험가가 있습니다. 그가 Africa를 탐험하며 선교하다가 열병에 걸려 죽게 되었답니다. 그의 임종을 보고자 찾아갔던 사람들에게 Livingston은 “사명자는 그 사명을 다할 때까지 죽지 않는 법이라오”라고 하면서 오히려 위로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Livingston은 이러한 믿음으로 일어나 맡은 바 그 일을 다 하지 않았습니까? 히스기야 왕이 이 위대한 민족적인 숙원 사업을 감당하게 한 능력이 어디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연장해 주셨다는 그 믿음과 감격에서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히스기야 왕처럼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내 삶이 풍요로워지고, 지치지 않고, 낙심되지 않고, 보람된 일을 남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히스기야처럼 죽을병에 걸리지는 않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보다 더 간절하게 하나님을 구할 필요는 있습니다. 히스기야보다 더 하나님을 필요로 해야 합니다. 히스기야보다 더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고요?

우리들의 삶에 보람이 있습니까?
우리들의 삶에 만족이 있습니까?
우리들의 삶에 기쁨이 있습니까?
우리들의 삶에 유익이 있습니까?

우리는 풍요로운 미국 땅에 살지만 정신적으로는 더 메말라 있을 수 있습니다. 편리한 생활을 하지만 더 여유가 없을 수 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살지만 이러한 남들에게 보람은 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믿음의 모범은 못되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히스기야보다 나을 것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는 이미 은혜 받은 자들이기도 합니다. 2000년 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우리를 구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는 용서를 받았고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구원과 은혜를 받은 자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한지를 오늘 히스기야 왕이 은혜 받은 후의 모습에서 이러한 구원받고 은혜 받은 자의 삶을 확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이미 은혜 받은 자로서 은혜를 구하며 사는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들은 바벨론 왕은 특사를 보내 축하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의 특사가 온 것이 기뻤던 히스기야 왕은 그에게 성안에 있는 모든 것들과 숨겨둔 보물까지 다 보여 주었습니다. 이 당시 히스기야 왕이 통치하던 유다 나라는 자기들의 동족이었던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라는 나라를 겁내고 있었습니다. 이 앗수르라는 나라가 호시탐탐 남쪽 유다마저 집어 삼키려고 엿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이러한 앗수르를 견제하기 위해, 당시 앗수르에 대항하는 강한 신흥 세력인 바벨론에게 잘 보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하여 추파를 던진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말로 하면 외교적으로 유능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특사를 극진히 대접하고 그에게 왕궁의 모든 것들을 다 보여 주기도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선지자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을 크게 책망하며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것이 17-18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 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이는 무슨 말입니까? 앞으로 이 남쪽 땅 유다는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망하고 모든 사람, 모든 물자가 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다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예고인 것입니다. 실제로 이 예언은 약 100년 후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결과로 나타난 것을 우리는 압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심판의 계획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너무 쩨쩨하고 옹졸하게 보입니다. 우리들 하는 말로, “치사하게 바벨론 특사에게 왕궁에 있는 것을 좀 보여 주었기로서니 이렇게 엄청난 심판을 할 수 있는가?” 라고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어떤 신학자는 이러한 히스기야의 행위를 보면서 이런 코멘트(comment)를 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궁전은 보여 주었으면서 왜 성전은 보여 주지 않았는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죽을병에서 낫게 해 주시면서 해의 그림자가 뒤로 10도 돌아가게까지 하는 자연의 법칙도 거스르는 표적까지 보여 주었는데 말입니다. 왜 히스기야는 자기를 축하하러 온 이방인 특사에게 “내 병은 내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낫게 해 주신 것이요. 자! 이리 와서 우리 민족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을 보시오”라고 왜 말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히스기야의 모습이 만일 우리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무시무시한 심판의 예고를 하는 이사야 선지자를 향해서 히스기야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19절의 말씀입니다: “‘당신의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나이다.’ 하고 또 가로되, ‘만일 나의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 이 말씀을 공동 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그대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요.’ 그리고 자기의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평화와 안전이 계속되리라고 혼자 생각하였다.” 즉,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첫 번째 말인 “그대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요”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히스기야 왕의 체념의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말인 “그리고 자기의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평화와 안전이 계속되리라고 혼자 생각하였다”는 표현은 히스기야 왕이 자기 스스로 자위하는 안일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은혜 받은 히스기야 왕의 허점을 봅니다. 이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만 괜찮으면 된다”는 안일한 자세의 모습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은혜의 감격을 누렸던 히스기야 왕이었건만, 이러한 허점이 그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은혜와 구원을 받았다고 여기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극복되어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지속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내가 받은 은혜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퍼져 나가 내 이웃의 은혜도 되어야 하고, 나아가서는 내 후손에게 은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미국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우리와 다른 민족에게도 은혜가 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지속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지속되게 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모습일 것입니다. 금은보화는 보여주고, 하늘의 영광과 위엄은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은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이기에는 너무 부족한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누구의 은혜로 병이 나았습니까? 6절,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와 하나님께 충성되었던 다윗을 보시고 히스기야 왕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 왕 역시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처신할 수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또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너는 죽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벽면 기도를 한 히스기야라면 또한 선지자 이사야가 “네 후손이 바벨론에 잡혀갈 것”이라 한 심판의 말씀을 들었다면 다시 한번 벽면 기도를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히스기야의 생명을 연장시키심으로 자기의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께서 또한 심판의 역사를 돌이키실 능력이 왜 없으시겠습니까?

이러한 히스기야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는 히스기야 왕을 바라보기보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러한 은혜에 대한 부족한 모습이 있는 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은혜의 지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말씀을 토대로 이런 증거를 남깁니다. “세례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 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러라”(요 1:15-16).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만 하겠습니다. 훌륭한 왕이요, 신앙인이었던 히스기야 왕도 이렇게 허점이 있는 모습을 우리에게 남겨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히브리서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히 11장에는 훌륭한 믿음의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히 11장을 “믿음의 장(章)”이라 합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을 두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는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히 11:39)고 하면서 우리는 오직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앞부분)고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히스기야 왕의 모습을 통하여 은혜 받은 자의 허와 실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과 은혜를 받은 자로서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은혜 위에 은혜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며 그 분의 뒤를 좇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럴 때에 은혜 받은 자로서의 제대로 된 삶을 간직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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