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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공동체(요일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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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공동체(요일1:1-4)


[서론]

  옆의 분들과 인사하시길 바랍니다.‘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요한일서는 예수님의 제자 사도요한이 기록한 서신입니다.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불렀듯이 요한일서를 사랑의 서신이라고 부릅니다.‘제롬’이라는 한 신학자는 사도요한이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해서 오래 설교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가끔씩 나와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한 마디씩 권면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했다고 했습니다. 요한이 권면할 때마다‘어린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늘 똑같은 말만 반복을 되풀이하니 식상한 교인들이 견디다 못해서 물었습니다. 왜 똑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 하십니까?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요한은‘이것이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이루어진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생명의 공동체 안에 들어와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미워하고 질투하고 시험이 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아닙니다.‘내가 잘했다, 네가 잘못했다’교회는 이런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의미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 다 감싸줘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의 향기가 백리향처럼 계속 흘러나와서 영혼 구원의 열매가 맺혀져야 성경적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갖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요한일서를 기록할 당시 초대교회는 외부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고 있었고 또 안으로는 이단들이 끊임없이 공격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요한은 끊임없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단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상당수가 있었는데 이 영지주의자들은 육신을 인정하지 않은 채 육체는 무조건 타락한 것이다라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자꾸 타락으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여기에 반발을 하며 교회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사랑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우리 예원교회 성도들이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깨닫고 하나되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1. 생명이신 그리스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1) 요한은 일반 서신서와는 달리 문안인사도 하지 않고 바로 왜 이 서신을 기록했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그만큼 본질을 정확히 알리고자 하는 요한의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요1: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에 나오는‘말씀’과 차이가 있는 것은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에 중심을 두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예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일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포되는‘생명’에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생명으로 시작하여 생명으로 끝나는 것이 요한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 죽지 않는 생명, 영생하는 생명, 불신자에게는 없는 생명, 구원받은 자에게만 있는 영원한 생명. 이 생명은 헬라말로‘조에’라고 하는데 신약에서 120회 이상 사용된 말씀입니다. 생명은 존재의 본질 또는 기초를 의미하는데 다시 말해서‘예수 그리스도가 만물의 근원이다. 모든 만물에게 생명력을 주신 생명 그 자체의 근원이 예수’라는 의미입니다. 나무에 생명이 있다, 짐승에 생명이 있다. 사람에게 생명을 누가 주었냐.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다. 생명 그 자체다라는 것을 강하게 표현하는 그러한 서신입니다. 그래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죽었던 사람도 살아나고 병들었던 사람도 일어나고 절망하던 자가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제대로 알게되면 모든 질병은 치유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구원의 감격, 생명의 비밀, 놀라운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영육 간에 강건해지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이 직접 보았고 만졌고 직접 함께 생활했다고 강조합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더러운 육신에 어떻게 하나님이 왔단 말인가 하면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한은‘아니다. 내가 직접 만졌고 보았다.’고 당당하게 증인으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이렇게 이상한 교리로 교인들을 자꾸 헷갈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도록 유혹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예수님의 성육신을 2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2) 여기서‘나타났다’라하는 헬라말로‘에파네로데’라고 하는데, 이 말은‘이미 존재하던 것을 드러내다’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확실하게 이미 있던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미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표가 되었음으로 세상에 드러나신 바 되었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이 영원한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함께 살았고 증인으로서 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일서가 기록된 시기는 주님이 오신 지 90년될 때입니다. 주후 90년대 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과 부활, 승천하심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이 이제는 다 순교했습니다. 요한 혼자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다 순교하고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간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로부터 직접 복음을 전수받은 복음의 1세대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만졌고 함께 했었던 이 1세대들은 힘있게 기쁨과 감격 속에서 생명을 걸고 복음 전파를 위해 다 순교했습니다. 그만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 삶을 못살도록 사단은 끊임없이 공격했지만 그들은 복음에 감격하며 순교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의 열정이 세대가 교체되면서 신앙의 형식은 있지만 그리스도를 향한 복음의 열정이 조금씩 식어져가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복음에 그렇게도 생을 걸고 증거하던 복음의 선진들이 자꾸 죽어가니 그 후대들이 나오면서 희미해진단 말입니다.

  여러분,‘요요현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식이요법을 써서 다이어트를 했는데 체중이 줄었어요. 줄었는데 어느날 또 식이요법을 잘못하고 참지 못하고 더 많이 먹어버렸더니 전의 체중만큼 늘던지 더 늘어버렸어요. 체중이 증가해 버려서 전보다 더 뚱뚱해져 버렸습니다. 이것을‘요요현상’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 성도들이 영적으로 요요현상에 걸려버린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과거의 습관과 체질로 다시 돌아가서 시들해지면서 영지주의자들이 들어오니 더 타락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양 공급을 해줘야겠다. 그래서 이들로 하여금 믿음의 선진들처럼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제자로 만들어야겠다, 회복시켜줘야겠다라는 사명을 가지고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여러분을 요요현상에 걸리도록 작업 합니다. 신앙생활이 들쑥날쑥하고 업다운이 심해요. 처음에 예원교회에 나왔을 때 예수가 그리스도다,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구나라고 충격을 받습니다. 야, 이게 진짜 신앙생활이구나. 영접의 의미와 비밀, 구원 받은자의 축복에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불신자의 망하는 순서, 순서도 틀리지 않는 것에 감격했는데 한 몇 년, 십 년 흐르다 보니 그 감격이 자꾸자꾸 식어져가요. 지속적인 신앙 성장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분이 있다고 한다면 예배드리면서 다시 한번 기경하시고 생명의 영양 공급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런 예배가 되야합니다. 신앙생활은 저보다 오래 한 사람은 여기에 얼마나 있습니까? 제가 58년을 했습니다. 그런데 32살까지는 종교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참 복음을 깨달은 감격 이후로 하나님께서 주신 감격, 거의 지금까지 이십 여 년 동안 늘 새로운 은혜를 제 수준과 상관없이 누리고 있습니다. 제가 무슨 노력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전혀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가진 자는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혼한 신부의 몸 속에 신랑의 씨가 들어오면 노력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배가 불러집니다. 아무 것도 할 것 없이 시간이 있으면 배가 불러집니다. 여러분, 이 생명의 비밀이 계속 성장되길 바랍니다.


2. 생명의 교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3~4) 3, 4절을 통해서 요한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사귐’이라는 단어입니다. 사귐은 헬라어로‘코이노니아’이 말은‘교제’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이 생명을 걸고 복음을 증거하는 이유는 우선적으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목적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사귐의 본질이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전도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있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만들어주는, 하나님과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교회 나오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교회 나와도 하나님과 교제 안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 나와도 구원 못 받은 사람이 있어요. 교회에서 중직자 맡았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 자세히 보세요. 얼굴 속에 소망이 보이고 희망이 보이고 생명력이 보이고 힘있는 그런 모습이 보이는가 말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보면 캄캄합니다. 그런 사람하고는 10분만 앉아있어도 피곤합니다. 대화가 안됩니다. 여러분, 날마다 정시로 무시로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와 생명의 교제를 나누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생명의 교제가 없는 사람이 무슨 신자입니까? 또 신자인들 무슨 힘이 있습니까?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삶 속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환경과 관계없습니다. 자꾸 여러분 수준 수준하는데 수준과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뭐 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잘난 척, 거룩한 척해도 다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영적인 비밀을 가지고 교제를 나누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되는 사람은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사건이 생기든지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종교인은 금방 표가 납니다. 조금만 자존심 상하는 소리하고 조금만 무시하면 끝입니다. 그러나 생명있는 사람은 그러지 않습니다. 영적 비밀이 있는 사람은 대단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교만해 보일 정도로 당당합니다. 왜? 하나님과 나와의 비밀이 있는데 네가 뭘 아냐. 너희들이 정말 신앙생활의 맛을 아냐? 너가 지금 떠드는 데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비밀을 너는 맛이나 보고 있냐? 이런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반석같은 신앙입니다. 회사에서 알아주면 기분좋고 안알아주면 섭섭해하면 그것이 무슨 성경적 생명이 있는 자의 모습입니까?
여러분, 책 이름 중에‘굿바이 정신으로 살아라.’라는 책이 있습니다.‘굿바이’(Good-bye)는 헤어질 때 하는 인사입니다. 이 굿바이 정신은 지나간 것은 잊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이해됩니다. 굿바이의 어원은 놀랍게도 God Be with You 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직역하면‘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동행하기를’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헤어질때 이 시간 이후로 하나님과 당신이 함께 동행하기를 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굿바이를 두 가지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주님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면서 성도 간에 자연스러운 교제가 되어 여러분이 지난 것은 다 잊어버리는 굿바이가 있어야 되고 다른 새로운 굿바이는 이제 주님과 나와 함께 동행합니다. 이런 주님과 교제의 굿바이, God Be with You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되어질 때 정확한 신앙생활이 됩니다. 이런 주님과의 생명의 교제를 나눌 때 성도간에 교제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일부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자신이 고독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세히 한번 진단해 보세요. 여러분도 모르게 여러분 자신이 벽을 쌓고 있습니다. 벽을 쌓고 있으니 사람들이 접근을 못합니다. 사람들은 영적이고 상당히 감정적이기 때문에 내가 남을 수용하겠다는 열린 마음만 가지고 있어도 가만히 있는데도 사람들이 붙습니다. 대화가 되는데 내가 마음을 닫아버리면 아무리 여러분이 사람들이 접근해 오길 기다려도 안되요. 그러니 고독할 수 밖에 없지요. 수용을 안하는데요. 겉으로는 인사를 하는 것 같아도 속은 딱 닫아버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중보자입니다. 피스 메이커하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하나님과 원수되어있던 나와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시려 오셨습니다. 그래도 고독하십니까? 성도 간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이루어진 생명의 교제란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피로 맺혀진 관계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 자매의 관계입니다. 맞습니까? 예수 보혈의 피로 다 형제 자매가 되었어요. 한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는 한 가족인 것입니다. 구원 받았다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시기하고 질투하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벽을 쌓습니까? 그것은 성경적 신앙의 자세가 아니지요. 어떤 이유이든지 그것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변명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회복된 성도의 삶이 생활 속에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기쁨이 넘치니 전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삶 속에 기쁨이 없는데 그 모습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전도가 되어지겠습니까? 전도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특권의 축복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전도이므로 여러분이 먼저 회복되어지길 바랍니다. 지교회를 하면서 서로 부담스럽고 시기하고 싸우면 그것이 무슨 성령인도 받는 사람들입니까? 구원받아놓고도 시대적인 사명과 전략을 가지고도 또 당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용서하고 용서 빌고 사랑의 교제를 하시기 바랍니다. 최전방에 사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사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교제하는 축복이 있다라고 하면 흑암은 저절로 무너지고 여러분은 전도가 되어지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D.L 무디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백 명 사람이 다 한 자리에 앉아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성경을 읽고 있다고 하면 나머지 99명은 그리스도인을 읽고 있다.”그러니 여러분이 직장에서 아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없는데 여러분이 예수 믿는 향기를 발할 때에 여러분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이 바로 예수의 모습입니다. 오늘부터 가서 가만히 앉아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활동적이고 희생적이고 사랑을 베풀고 섬기고 누구보다도 희생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의 자존심 하나로 버티고 있습니다. 그것을 다 없애고 숙이면 99명이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야, 그리스도를 보는 것 같구나! 맞습니까? 여러분 삶의 현장에 그리스도를 누리면 복음의 문이 열립니다. 영적 포지셔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적 포지셔닝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위치를 말합니다. 어떤 포지션, 어떤 위치에서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기도 하고 발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영적 포지셔닝의 기준은 말씀입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속에서 만나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단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설교 한 번 제대로 듣고 생활에 적용하면 영적 포지셔닝이 잡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삶 속에 적용을 해서 나가는 영적 소화가 되야 합니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되어서 육신의 영양 공급이 되어질 때 힘이 나잖아요. 그런데 음식을 먹긴 먹는데 이것이 위에서 소화가 안 돼. 그래서 장에 부담을 줘. 이러한 신자들이 많습니다. 말씀을 받았으면 예배 끝나는 순간까지 소화되길 바랍니다. 소화가 되어서 이제는 나아가서 영적인 힘을 가지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적 전도 방법, 성경적 신앙 생활은 모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현장에서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여러분이 누리는 생명의 교제를 다른 종교인 불신자들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나만 이렇게 누리면 되겠는가. 이 놀라운 누림, 즐거움, 기쁨, 평안을 모르고 있는 불신자 종교인에게 전해주는 이것이 바로 성경적 신앙 생활입니다. 여러분이 다 성격적 신앙생활의 모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론]

  반복 노출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대상이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해서 점점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반복 노출 효과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파리에 에펠탑이 있습니다. 파리의 에펠탑이 지금은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는 탑이지만 처음에는 이 계획을 세웠을 때에 극심한 반대가 있었습니다. 어떤 예술가는 이 에펠탑을 세운다고 하니 파리 예술에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여러분, 파리에 가보셨습니까? 파리에 가보면 건물 하나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이 특징입니다. 건물마다 다 다릅니다. 신기할 정도로 다 자기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예술의 도시에 이 철탑을 세운다고 하니 엄청나게 반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탑이 완성이 되어서 높이 세워졌습니다. 세워놓고 나니 파리 시민들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에펠탑이 워낙 높기 때문에 눈만 뜨면 보이는 것입니다. 매일 그렇게 쉽게 노출이 되어 있어 반복해서 보다 보니 에펠탑에 대한 사랑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없어서는 안되는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탑이 되었습니다. TV 광고 효과도 그것입니다. 자꾸 반복해서 보면 거기에 빨려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합니까? 지금 불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기독교인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와 여러분은 정확하게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생명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를 자꾸 여러분이 노출시켜야 합니다. 거부반응을 일으켜도 괜찮습니다. 욕을 해도 괜찮습니다. 정말 생명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하면 계속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노출시키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반복적으로 노출시킬 때에 처음에는 자꾸 거부하다가도 여러분의 삶을 보면서 여러분 속에 있는 그리스도가 자꾸 보이기 시작하고 결국은 여러분처럼 그 예수 그리스도에 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영접 운동이 일어나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예원교회가 생명의 공동체로서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지역을 살리기 위한 현장을 살리기 위한 여러분의 기도제목이 있다고 하면 가정을 살리고 직장을 살리고 지역을 살리고 나아가서 가는 해외 어디든지 살릴 줄 믿습니다. 자꾸 예수 그리스도를 노출시키길 바랍니다. 입을 다물고 몇 시간 있지 말고 노출 시키세요. 예수를 드러내세요. 그러면 흑암이 물러가고 그 현장을 변화시키는 영혼 구원의 삶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예원교회 모든 성도가 이러한 현장전도제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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