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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시 27: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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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11/30)
본 문 시 27:7 ~ 14 


  본문은 다윗의 비탄시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탄시란 시인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호소와 구원에 대한 간절한 기도를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 시에 나오는 다윗의 고통이 무엇일까를 연구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쫓길 때 그 참담한 심경을 노래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윗은 가장 아끼던 아들에게 왕좌에서 쫓겨났습니다. 오른팔로 여기던 신하들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화급하게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도무지 돌아올 기약이 없습니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절망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시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 130:1을 보면 시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여기서 깊은 데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말합니다. 요나의 물고기 뱃속이 바로 깊은 곳입니다. 요셉이 갇혔었던 감옥이 깊은 곳입니다. 야곱이 도망치며 잠을 자던 저 들판 벧엘이 이 깊은 곳입니다. 다니엘의 사자굴 그곳이 바로 이 깊은 곳입니다. 다윗이 지금 이 깊은 곳에서 여호와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지난 태풍 매미가 휩쓸고 지나간 뒷자리는 정말 참담했습니다. 지금도 한 할머니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태풍으로 집이 무너졌습니다. 그 안에 자식들도 매몰되어있습니다. 기르던 가축들도 다 폐사되었습니다. 홀로 남아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석인 한숨을 토해냅니다. 그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합니다. 바로 그 자리가 인생의 깊은 곳입니다.

  때로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이 깊은 곳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인생의 깊은 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인생의 깊은 곳을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 인생의 깊은 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인생의 깊은 곳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7절을 보면 “여호와의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윗이 이 인생의 깊은 곳에서 기도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 다 중단하고 오직 기도에 힘쓰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건물마다 비상구를 두도록 되어있습니다. 화재와 같은 위급한 상황이 발생해서 출입구를 찾지 못할 때 아니면 출입구가 봉쇄됐을 때 이 비상구를 통해서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비상구는 구원의 통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우리 삶의 비상구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깊은 곳에서 헤맬 때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 깊은 곳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비상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비상구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정말 인생의 깊은 곳에 있을 때 벗어날 수 있도록 비상구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기도입니다.

  지난 2000년 10월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화재사고가 성남에서 발생했습니다. 40평 정도의 단란주점에서 불이 났습니다. 10분 뒤에 소방관이 출동해서 진화작업을 했고, 1시간 만에 완전히 진화에 성공했습니다. 피해액도 2000만원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7명이 죽었습니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비상구가 막혀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입구 쪽에서 화재가 나자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곳은 비상구뿐인데 아예 이 비상구는 자물쇠로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상구가 닫혀있으면 안됩니다. 위급할 때 이 비상구가 제대로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기도가 그렇습니다. 인생의 깊은 곳에 들어섰을 때 이 기도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그것도 빨리 열려야 합니다. 활짝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저는 한 때 의구심을 가졌었습니다. 왜 비상구는 녹색으로 되어있을까? 화재처럼 위급한 상황에서 탈출로를 빨리 찾으려면 녹색보다는 눈에 잘 띄는 노랑색이나 빨강색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알고 보니 녹색으로 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더라구요

  우리가 색을 느끼는 것은 간상체와 추상체라는 두 가지 시세포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간상체가 작용하고 밝은 곳에서는 추상체가 작용한답니다. 화재와 같은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대체로 정전사고도 함께 일어납니다. 어두워진다는 이야기죠. 이럴 때 간상체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답니다. 그런데 이 간상체에는 로돕신이라는 색소가 있어서 녹색 빛은 잘 흡수하지만 노랑이나 빨강 빛은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답니다. 그래서 비상구는 녹색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상구는 평소에 눈에 잘 띠지 않다가 위급상황이 오면 우리 눈에 잘 띠도록 준비된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기도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깊은 곳에서 이 기도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기도에 몰두해야 합니다. 기도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왕하 20장을 보면 히스기야 왕이 졸지에 인생의 깊은 곳에 처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저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 왕이 갑자기 병에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받아들이기 힘든 인생의 위기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는데 하나님의 뜻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끝이라는 선언입니다. 정말 인생의 가장 깊은 곳에 빠지게 된 상황입니다.

  2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라고 말씀했습니다. 인생의 깊은 곳에서 저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기도였습니다. 그것도 바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저가 비상구를 찾은 것입니다.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자 주저하지 않고 바로 비상구로 달려간 것입니다. 그 결과 저가 병을 고치고 15년이라는 세월을 더 살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깊은 곳에서 빠져나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의 깊은 곳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에게 비상구가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은혜요 그 자체로 축복입니다.



믿음을 정비해야 합니다.

  본문 시 27편은 다른 다윗의 시들과는 매우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의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1-6절인데 여기서는 다윗이 확신에 넘치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3절을 보면 군대가 진을 쳐서 자기를 공격하려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전쟁의 위험 속에서도 안연할 것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믿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부분인 7-14절 오늘의 본문에 와 보면 상황은 180도 달라집니다. 7절에서 제발 내가 부르짖을 때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응답 좀 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9절을 보면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시옵소서” 두려워 떨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대단하던 믿음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인생의 높은 곳에 있을 때 대단한 믿음을 고백하고 선언합니다. 매사가 주님의 은혜 가운데 형통하게 되면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 가운데 굳게 서서 놀라운 능력을 보일 것처럼 큰소리를 칠 수 있습니다. 이것도 귀한 일이고 훌륭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깊은 곳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면 누구나 높은 곳에서 큰소리치던 믿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큰소리를 쳤습니다. 마 26:33을 보면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호언장담했습니다. 그 때는 주님이 곁에 계셨습니다. 모든 일이 다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대제사장에게 끌려가셨습니다. 이제 처형당할 상황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르던 베드로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저가 인생의 깊은 곳에 서게 됐습니다. 그 때 그가 주님을 부인합니다. 그것도 세 번 부인합니다.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그렇습니다. 갑자기 인생의 위기가 찾아오면 사람들은 흔들립니다. 그 때 믿음도 흔들립니다.

  엘리자베스 로스(Elizabeth Ross)라는 분은 그의 저서 "죽음과 임종에서"(On Death and Dying)에서 갑작스럽게 암이나 불치의 병 판정을 받고 죽음을 맞는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섯 단계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 단계가 부정(denial and isolation)입니다. “내가 그럴 리가 없어” 하면서 부인하고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재확인한답니다. 둘째 단계가 분노(rage and anger)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왜 하필이면 내가...” 하면서 화를 낸답니다. 셋째 단계가 타협(compromise)입니다. 어떻게든지 죽음을 연기해 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가 우울(depression)입니다.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는 의기소침한 우울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째가 수용(acceptance)입니다. 불가항력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이 위기를 맞게 될 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사람도 차이는 있어도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어떤 단계는 아무도 모르게 잠깐 자기 마음속에서만 스쳐지나가고, 어떤 단계는 눈에 보이는 과정을 거치며 지나갑니다.

  들판에 서 있는 나무들은 세찬 바람이 몰아칠 때 그 뿌리의 깊이에 따라 흔들림에 차이가 있습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별로 요동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얕은 갈대와 같은 것들은 심하게 요동칩니다. 그러나 모두 그 바람 때문에 영향은 받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또 깨달아야 합니다.

  13절에 와 보면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요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믿음을 추스르고 다시 굳건한 믿음 가운데 서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깊은 곳에 빠질 때 나도 모르게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빨리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뚜기처럼 빨리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여호와를 바라야 합니다.

  다윗은 14절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여기서 갑자기 “너”라는 2인칭 단수 주어가 튀어나옵니다. 지금까지 나라는 1인칭 단수 주어를 사용했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고, 이 시를 읽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 개개인에게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바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히브리어 원어에는 카바(hw:q;)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 “대망하다”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이 구절을 “Wait on the LOR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를 바란다는 것은 여호와를 끈기 있게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굳건한 믿음을 준비했다고 바로 인생의 깊은 곳에서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제 됐으니 꺼내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건져내시고 말고는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를 오늘 건져내시거나 내일 건져내시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준비한 사람들이 할 일은 기다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참고 견디며 기다려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이면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니마민이라는 노래인데 이 말은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노래가 저 공포의 아우슈비츠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젊고 유능한 한 외과의사가 이 끔찍한 수용소에 끌려오게 됐습니다. 그는 매일 가스실과 실험실로 끌려가는 동족들의 죽음의 행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자신도 그 행렬에 서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이 노래를 만들어 불렀는데 그 가사 첫머리가 이렇습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십니다.”

  강제 노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깨진 유리병 조각을 주웠습니다. 그리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매일 면도를 했습니다. 오후면 나치들이 가스실로 보낼 처형자들을 골랐습니다. 깔끔하게 면도한 이 젊은 의사를 쓸모 있게 생각한 나치들은 가스실 행에서 언제나 제외시켰습니다.

  그는 끝까지 살아남아 수용소를 나온 뒤에 이 노래 가사를 바꿨습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가 성급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기다림으로 완성됩니다. 조급함은 믿음을 미완성으로 남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믿음을 가졌다고 다가 아닙니다. 그 믿음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노아는 주님의 약속을 받고 120년 동안을 기다렸습니다. 그 긴 기다림 끝에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다리는 믿음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시 37:7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이 말씀은 믿음의 기다림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는 침묵입니다. 낚시를 하는 분들은 세월을 낚는다는 표현을 씁니다. 고기를 낚기 위해서는 긴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낚시하는 분들은 아무리 기다림의 시간이 길고 지루해도 침묵합니다. 시끄러우면 고기들이 미끼를 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떠들다보면 때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기다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침묵해야 합니다. 호들갑을 떨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하소연하고... 시끄러우면 때가 와도 그 때를 놓지는 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내입니다. 한 밤중에 보초를 서 보면 새벽을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너무 지루하고 힘이 들어서 잠들기 쉽습니다. 그래서 잠들지 못하도록 순찰을 돕니다.

  믿음의 기다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잠들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의 깊은 곳에서 우리는 믿음을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여호와를 바라야 합니다. 그분이 손 내밀어 우리를 구원해 내실 때까지 잠잠하고 참아 기다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래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만들어가는 미래’로 라틴어로 ‘퓨투룸’(futurum)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이 땀 흘려 형성해 가고 창조해 가는 미래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가오는 미래’로 라틴어로 ‘아드벤투스’(adventus)입니다. 하나님께서 펼치시며 우리에게 보내시는 미래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 아드벤투스의 미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교회 절기 상 오늘이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오늘부터 성탄주일 직전까지 4주 동안을 말합니다. 주님의 미래, 주님께서 펼치시는 미래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를 바라는 절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다윗의 권면을 마음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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