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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은 경배 받으실 왕이십니다(막 1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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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경배 받으실 왕이십니다(막 15:1-21)   


오늘부터 성탄 전 주일까지 4주를 교회력으로 대강절, 대림절이라 합니다.
대강절이란 예수님이 강림을 묵상하며 믿음을 견고히 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되어 오심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육신이 되어 베들레헴 말구유로 오셨을까요? 이 땅을 오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나실 때 특별한 손님이 찾아 왔는데 동방의 박사들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하늘의 별을 연구하다 왕의 별이 갑자기 나타나자 그 별을 따라 왔습니다. 먼저는 예루살렘에 와서 헤롯왕에게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는"지 묻습니다. 헤롯 왕은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는지 성경학자들에게 물어보니"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별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주 귀한 선물인 황금과 유황과 몰약으로 드리며 경배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촌 동네인 베들레헴 가서 예수님에게 귀한 선물을 드리면서 경배한 이유는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있느냐? 왕의 별이 나타났다. 왕이시기에 몇 달을 거리는 먼 길을 찾아 왔고 왕이시기에 아주 귀한 예물을 선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라는 소식을 들은 헤롯왕이나 대제사장이나 성경학자들이나 그 누구도 동방박사를 따라가 같이 경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초라하게 오셨지만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 볼 때 참된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예수님이 초림 하실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라 보았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에 정말 예수님이 구세주 메시야 인 것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서기관들이나 헤롯 왕처럼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듣기는 들어도 중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경배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는 것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확인하는 것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 본문의 빌라도 역시 예수님이 왕인 것을 확인하지만 섬기지  않고 조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합니다. 정치적으로 위험인물이니 사형시키자는 모함과 압력입니다. 그때 2절에서 빌라도 총독이 심문하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확신 있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말이 옳다"고 하십니다. 요18:37절은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이렇게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신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왕이심을 확이해 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 앞에 엎드러 경배하고 섬기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조롱합니다.

1. 무지한 사람들은 에수님을 조롱합니다.
1)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이 온 세상의 왕인 것을 확인하고 9절에 조롱합니다.
9절에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왕을 자기 임의로 할 수 있는 더 높은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은근히 조롱하는 것입니다. 왕을 놓을 수고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왕보다 더 높다로 예수님의 왕 되심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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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옆에서 있던 군병들 역시 왕인 것을 확인은 했으나 왕으로 대접하지 않고 모욕합니다. 17-18절 자색 옷을 입히고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황제 폐하 만세)를 모욕적으로 흉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고 절을 하며 고초를 주고 있습니다.

3) 지나가는 사람들도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하면 믿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4)대제사장들과 서기관 역시 욕을 합니다. 모욕을 합니다.
5)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지만 경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확인된다고 다 믿음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이 일어난다고 다 믿음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예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습니다.
조금 교회에 다니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버리고 도망갑니다. 편하고 좋으면 믿지만 조금 힘들고 지치면 예수님을 버립니다. 아쉽고 필요할 때는 찾지만 아무 문제가 없으면 쓰레기 버리듯이 버립니다.

교회에 다녀도 적당하게 다니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무조건 순종하며 경배하겠다는 결심한 신자들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엎드려 경배하며 찬양하면 귀한 예물을 드리는 왕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토머스 아 켐피스 “주님의 위로를 원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와 함께 고난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적다.”고 했습니다. 떡을 나눠 먹을 때는 큰 군중이 따랐으나 고난의 잔을 같이한 자는 적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 구원주요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알면서 왜 엎드려 경배하지 못할까요?

우리 눈으로 볼 때 인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나 우리 시대나 왕 하면 자색옷을 입고, 금면류관을 쓰고 많은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근엄하게 앉아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왕이라고 하는데 홀로 고소를 당하고 무능력하게 잡혀 있는 것을 보면서 도저히 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조롱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예수님 앞에 엎으러 나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렇게 외치는 믿음을 가지기란 쉽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비틀비틀 걸어가는 그분이 우리 눈으로 볼 때 바로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 비참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셔야만 했을까요? 좀 위풍 당당하게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오셔서 원수들을 굴복시키는 그런 왕이 되지 않았을까요?

주님께서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왔을 때 베드로가 칼을 뺄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예수님은 왕이신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엄이 넘치는 왕이 아니라 겸손하고 온유한 왕이십니다.

그리고 친히 그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지시는 왕의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죄처리를 해야 하기에 홀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비참하게 외롭게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세상 왕처럼 섬김을 받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대신 지고 죽어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왕의 사명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평화를 만들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알 때 경배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 자체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려 하심이라.

우리 인생에게 있서 가장 비참하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따지고 보면 죄 때문에 불행이 오고 죄 때문에 비극이 옵니다. 더 깊은 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들의 과거 얘기를 들어보면 거의가 다 죄 때문입니다. 과거 몸을 팔면 살다고 복음을 듣고 회개한 여성들의 간증을 읽어보면 거의 어려서 부모님의 학대, 이혼, 가출 등에 의해 팔리고 팔려서 그곳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죄를 사하시고 이제는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구원함을 받고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정말 인생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영접하면 영혼과 육체를 구원하는 왕이 되신다.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기에 예수님에 관심도 없고,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조롱은 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경배하지도 않습니다.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무관심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욕구를 충족시키는 왕이 아니라 진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나라의 왕이십니다. 허풍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라 왕이라 메시야로 고백합니다. 제자들도 다 도망을 갔지만 나중에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는 고백합니다.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롬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계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성령 안에서 영의 눈이 열릴 때 예수님의 왕이심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왕으로 섬기고 있는가 점검하고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복된 삶을 매일 살도록 합시다 아멘

어머니와 아들이 살았습니다.
아들이 어렸을 때에는 몰랐는데 자라면서 보니까 어머니의 눈이 하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의 어머니는 두 눈을 가지고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예쁜데 반하여 내 어머니는 왜 쪽팔리게 눈이 없냐고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의 어머니는 번듯한 점포에서 장사하고 있는데 내 어머니는 시장 길거리에서 나물이나 파는 것이 너무 쪽팔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한번은 운동회 때 엄마가 아들이 보고 싶어서 찾아갔더니 아들이 왜 왔느냐고 하면서 도망을 치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친구들이 네 엄마는 애꾸눈이라고 놀렸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혼자 서울에 올라와서 고학으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여자와 결혼해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엄마에게는 찾아갈 필요도 없었고 엄마 꼴을 안보니 좋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어느 날 저녁때 엄마가 찾아왔습니다. 아기가 울고 있으니까 누가 우리 예쁜 아기를 울리냐고 큰소리하면서 들어왔습니다. 들어갔더니 그 집 아기 엄마, 즉 그 아들의 아내는 이 여자가 도대체 누구냐고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남편이 내 엄마는 죽었다고 했기에 아내는 어머니가 죽은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도무지 모르는 여자라고 하며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쳤습니다.
어머니가 눈치가 없습니까? 집을 잘못 찾아 왔나봅니다 라고 얘기한 후에 돌아서서 나가는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고는 또 얼마의 세월이 흘러서 아들이 다닌 고등학교의 동창회가 열려서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엄마가 어떻게 사나 한번 들려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에 가보았더니 어머니가 병들어 누워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편지쪽지를 하나 남겼습니다. 편지 내용은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아기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아서 밖에 나가보았더니 네가 버림을 받았더구나. 그래서 내가 너를 그 날로 아들을 삼아서 네가 생일로 지키는 그 날이 네가 버림받은 날이요, 네가 내 아들이 된 날이란다. 네가 조금 더 큰 후에 그만 자동차 사고가 나서 눈이 하나 멀어버린 것을 내 눈을 너에게 이식했단다. 다시는 내가 서울에 찾아가지 않으마. 이번에도 고등학교 동창회라고 해서 너희 학교에 가보고 싶었지만 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안가겠다. 그러나 내가 죽거든 절대 울지는 말거라"고 써있었습니다.
아들이 이 사실을 그 전에 몰랐었습니다. 어머니의 눈이 저렇게 된 것은 바로 자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엄마라 부르지도 않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안했던 이 아들이 얼마나 어머니를 부르며 사랑한다고 했는지 모릅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화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십자가의 수치를 담당한 왕이십니다. 성령으로 왕이신 예수님을 보고 경배하며 섬기는 종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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