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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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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성경말씀 : 히브리서 3:1

사람은 무슨 생각을 가장 많이 하면서 사느냐를 보아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잠언에 보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이라고 했습니다. 과학자는 자나 깨나 과학적인 원리를 생각하면서 삽니다. 그들의 열정과 수고의 결과로 우리는 편리한 생활을 누립니다. 시인은 무엇을 보든지 그것이 시의 소재가 되는가를 생각합니다. 가을날 흔하게 굴러다니는 낙엽도 시인에게는 아름다운 시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업가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업만을 생각합니다. 무엇을 보든지 저것이 돈이 될까 살펴봅니다. 애국자는 항상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면서 삽니다. 김구 선생님은 말하기를 “만약 하나님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첫째도 대한 독립이요, 둘째도 대한 독립이요, 셋째도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이라고 대답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과연 한 평생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다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그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세상 사람들은 돈벌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생각할 때 마음이 행복하고 기쁨니다.

♪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슨 이유로 예수를 그토록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것을 보면서 이 바쁜 세상에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가 누구시며, 그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다 예수 믿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는 신자들이 있는가 하면, 주일 예배에 불참하면 왠지 마음이 꺼림칙해서 의무적으로 참석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예배 시간처럼 즐거운 때가 없는데 예배 시간이 전혀 즐겁지 않다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올바로 알고 있지 못한 것이 그 원인입니다.

예수님을 믿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 위에서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또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분이신지 아닌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어디서 온 것인지,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진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머리로 성경의 계시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성경에 기록된 계시를 깨닫게 해 주실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은 다양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에 대해서, 인간의 타락과 구원의 계획에 대해서,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택하신 일과, 이스라엘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성경 안에는 율법도 있고, 역사도 있고, 시와 노래도 있고, 미래에 대한 묵시도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책은 모세 오경으로서 지금으로부터 3400여년 전에 기록한 것이고, 가장 최근의 것은 계시록으로서 지금으로부터 1900여년 전에 기록한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우리와는 너무나 먼 옛적의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역사를 초월해서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해 주기 때문입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고 하셨으며,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도 증언하기를 “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고 하여, 그가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한 것임을 밝혔습니다.

예로부터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기독교인들에게뿐 아니라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인정을 받아왔습니다. 전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후자에게는 위대한 종교사상과 문학의 보고(寶庫)로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심지어는 공산주의자들조차도 자유진영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역사상 위대한 문학 작품 가운데는 성경에서 힌트를 얻어서 쓴 것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마치 노다지가 묻힌 금광을 곁에 두고서도 알지 못하고 시냇물에서 사금을 몇 알갱이 골라낸 것으로 만족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골로새서 2장 2절에 보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였고, 3절에는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1장 26절로 27절에는 “26)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했습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던 중에 예수님을 믿으라고 했더니, 자기는 예수에 대하여 많은 책을 읽고 연구했으므로 웬만한 기독교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노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12세 때 예루살렘에 올라갔다는 기록만 있고,  12세 이후로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신 30세까지의 기록이 없는데, 그 기간 동안 예수님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말하기를 “그 기간의 일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모를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다른 책들을 탐구했기 때문에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아는 내용이란 그 기간에 예수님께서 인도에 가셔서 요가를 배우고 유대로 돌아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마 ‘인도에 간 예수’라는 책을 읽어보았나 봅니다. 요즘 서점에 가면 복음의 진리와는 상관없이 그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서 쓴 책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책들은 불경건한 자들이 돈벌이를 위해서 지어낸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런 책은 아무리 많이 읽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도움은커녕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손상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 태도로는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올바로 알게 된 사람은 그 분 앞에 겸손히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만져 보고나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날 의심 많던 도마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확신하였으며, 그 후에 멀리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아서 다메섹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러 달려가던 중이었습니다.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사울과 그의 일행은 그만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가 있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그러자 그 음성이 대답하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 날 이후로 핍박자 사울이 변하여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본디 그는 세상적으로 자랑거리가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4)…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고 했습니다. 또 그는 당대의 최고 석학인 교법사 가말리엘의 제자였고,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면 유대 사회 어디를 가든지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자 그의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말하기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고 했습니다.

사도 도마와 사도 바울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우리도 만나야 합니다. 우리 역시 이 두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고백한 것과 똑같은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아직 예수님 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는 신앙생활의 진수를 맛볼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비밀의 영광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꿀이 달다는 말은 들었으나 몸소 맛본 적이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가 가진 신앙지식은 한갓 피상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서 신앙에 대하여 많이 아는 것 같은데, 막상 시험이 다가오면 맥없이 주저앉고 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할 때, 그 앎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체험으로 아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고 하신 것입니다. 음식을 먹으면 그것이 우리 뱃속에 들어가서 소화가 되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또 우리가 활동하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생명의 원천이 되고,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아낌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성도는 모든 사람이 꺼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초보 단계를 벗어나서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한해, 두해, 신앙생활을 한 햇수가 늘어갈수록 우리는 젖을 먹는 단계에서 벗어나서 단단한 식물도 너끈히 먹고 소화할 수 있는 단계로 자라나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13)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신앙생활의 행복을 제대로 알고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아는 성도라야 신앙생활에 열심 내고 헌신하게 됩니다. 물론, 갓 믿은 신자가 하루아침에 성숙한 신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자라는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각 자의 결심 여하에 따라서 우리의 영적인 성장이 빠를 수도 있고 더딜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똑같이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도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 보면 한 사람은 믿음이 몰라보게 자라났는데 또 한 사람은 여전히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각 사람의 심령 상태가 다른 것이 그 원인입니다. 전자는 마음이 좋은 밭과 같으나, 후자는 돌밭이나 가시나무의 뿌리가 자라는 밭과 같기 때문입니다. 좋은 밭과 같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기쁨으로 받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기 때문에 은혜로운 열매가 삶 속에서 맺힙니다. 그러나 돌밭이나 가시나무의 뿌리가 자라는 밭과 같은 마음은 말씀을 받을 때는 기쁨으로 받지만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열매가 없습니다.

또 말씀 위에 서지 못하므로 시험이 다가오면 곧 넘어집니다. 믿음이 있는 신자인지 아닌지는 말씀에 순종하는지 아니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는 것은 비행기가 안전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그 말씀대로 행하면 은혜로운 결과를 얻게 됨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을 모험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모험이란 결과에 대하여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용감히 시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불확실한 것을 믿고 나가는 모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맹세로 약속하신 바를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모험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삭으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삭을 결박하여 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빼어 내리치는 그 순간에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서 급히 칼을 잡은 아브라함을 제지했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수풀에 뿔이 걸린 한 수양이 있는지라 그 수양을 가져다가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17절 이하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참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큰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께서 재 가운데서 이삭을 살려내셔서 그 하신 약속대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동은 모험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믿음의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과 같은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시다면 히브리서 3장 1절 말씀과 같이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일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예수님을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 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구원의 내용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현대 문명은 사람들에게서 생각하는 능력을 빼앗습니다. 생각하는 대신 감각적으로 느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디서나 감성을 중요시 합니다. 아이들 교육도 감성을 개발하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상품 선전도 감성에 호소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감성보다는 깊은 생각을 통해서 영위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깊이 생각한다 함은 생각을 바르게 한다는 말과 통합니다. 소가 그 먹은 풀을 되새김질하듯이, 예수님에 대하여 자주 음미하고 생각할 때 예수님에 대하여 점점 더 깊이 있게 알게 됩니다.

본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라고 했습니다. 사도란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보냄을 받은 분이시므로 사도라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나 바울도 사도이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십니다. 다시 말씀하면, 믿음의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본을 보이시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장에 보니 “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2-3)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할 때 그 어떠한 마귀의 시험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믿음을 갖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위한 중보자를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씩 온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 제물의 피를 그릇에 담아서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 아론의 후손 대제사장이 드린 속죄 제사가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온전히 사할 수 없었습니다. 원칙상으로 볼 때 짐승의 피로써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써 드리실 속죄 제사에 대한 모형이요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4장에는 “14)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번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영원히 도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할 때 받은바 구원이 확고함을 확신하고 이같이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

그리고 본문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 줍니다. 그것은 우리는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곧 그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와 똑같은 신분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7절에 보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후사이시고 성도들은 예수님의 동생들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신분입니까!

우리는 비록 이 땅을 딛고 살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과 동류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하늘은 곧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성도님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셔서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죄 많은 인간이 어찌 감히 ‘거룩한 사람’으로 불릴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받아 누리는 모든 은총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예수 그리스도 없이 누리게 된 것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경우에 사랑하는 것과 깊이 생각하는 것은 같은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날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살이에서 몸과 마음이 피곤할 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마음이 고독할 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역경과 시련이 다가올 때에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신앙생활을 위해 날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성도답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앙인의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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