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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믿으면 (눅 4: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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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으면 (누가복음 4:16-19)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일본은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았습니다. 1910년에는 한일합방으로 우리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았습니다. 1920년에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땅을 빼앗기 위하여서 전 국토를 척량했습니다. 30년도에 들어와서는 공출(供出)이라는 명목으로 쌀을 다 거두어 갔습니다.

40년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고 해서 우리의 이름과 성(姓)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말을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빼앗아 갔습니다. 자기들의 신을 섬기게 하고, 다른 신을 섬길 때 지독한 핍박을 했습니다.

남자들을 끌어갔습니다. 나이든 사람은 보국대(報國隊)로, 젊은 사람들은 징용(徵用)으로 끌고 가서 총받이로 만들었습니다. 젊은 여자들은 정신대(挺身隊)로 끌어가서 성적(性的)인 노리개로 만들었습니다.
집안에 있는 쇠붙이라는 쇠붙이는 다 거두어가서 전쟁물자로 사용하고, 또한 산천에 있는 소나무 껍질과 소나무 송진과 또한 솔방울을 따서 전쟁물자로 바쳐야만 했습니다.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을 작두로 머리를 잘라 죽이기도 하고, 또한 생체실험(生體實驗)을 하기까지 하는 끔찍한 일들을 했습니다. 서슬이 퍼런 순사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를 못하였고, 일본 선생들 앞에서는 오금을 펴지 못했습니다.
이런 형편에 처해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힘이 아닌 제 3에 의한 힘, 연합군의 승리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고 우리는 그 아래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해방되던 날 온 백성들은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습니다.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고, 빼앗겼던 이름과 성을 되찾고, 빼앗겼던 말을 되찾아서 마음껏 자유를 외쳤습니다. 더 이상 일본순사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감격하며 또 감격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해방이 된다고 하면, 내 가죽을 벗겨서 북을 치면서 종로 사거리를 다니면서 내가 외치겠노라”고 했을만큼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유를 우리는 얻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와 꼭 같습니다. 사탄과 죄와 미신에 사로잡혀 있던 자가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것인데, 이것은 일본에서 해방되어서 누리는 자유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놀라운 삶의 변화가 예수 믿을 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종교는 모두 같은 것이고, 인격의 수양을 위해서 하나 정도는 믿는 것이 좋다.” 또, “인간은 약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자를 믿는 것이 좋다.”고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격수양을 위해서, 연약한 마음에 의지할 곳을 찾아서 믿는 그런 것이 아니라, 완전한 삶의 변화, 신분의 변화, 인격의 변화, 환경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 예수님을 믿을 때 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는데, 에베소서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처음 지음받은 사람은 모든 것이 완벽한 에덴동산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꾐에 빠져서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나무 둥치에서 가지가 잘려 나간 것과 같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이라는 나무에서 잘려져 나간 <가지>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인간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무에서 잘려 나간 가지, 한번 상상해 보세요. 말라버립니다. 나중에 다 불타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의 운명이, 사람의 신세가 그렇게 되어졌다는 말입니다.
가지가 둥치에 붙어있으면 저절로 올라오는 수분을 먹고, 저절로 열매 맺고, 저절로 푸르게 되어지는데, 잘려졌으니까 말라지고, 나중에는 밟혀지고 불태워지는 것만 남게 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사탄의 눌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사탄의 지도를 받고 사탄의 인도를 받다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같이 받게끔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기 전 우리의 현실이었고,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모든 인류가 당했던 현실이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일본의 압제 속에서 고통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아니하는 아픔을 모든 인류가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서 하나님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어떤 사람은 전설에 고향에 나오는 존재처럼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고, 우리가 쓰고 있는 2003년이라는 이 연호(年號)가 바로 예수님께서 오심으로부터 시작된 연호(年號)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역사에 A.D.와 B.C.가 갈라져서, 예수님 후(Anno Domini),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Before Christ)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대강절(待降節)이 시작됩니다. 대강절은 성탄절 4주 전부터 예수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인데,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왔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모든 인류는 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가난했습니다. 사탄의 포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눈이 멀어서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사탄과 미신과 죄악에 눌려서 살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인류에게 영육간의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사탄의 포로에서 자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영육간의 무지에서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사탄의 눌림에서 자유케 해 주시기 위하여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기만 하면, 바로 영접하면, 삶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축복을 받게끔 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런 기대를 하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으면 영적으로만 구원받지, 육신적으로 구원받나?” 하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믿는 사람은 자기가 믿는대로 영적으로만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인적(全人的)으로 구원을 하십니다. 영적으로만 아니라 육신도, 삶도 다 구원하시기 원하는 하나님이신데, 그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그와 같은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전혀 다를 바가 없고, 또 예수 믿을 때와 안 믿을 때의 삶이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하면, 뭐 때문에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육간의 가난을 해결하여 주기 위해서, 사탄의 포로된 우리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눈먼 우리를 보게 하기 위해서, 눌린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임을 확실히 믿고,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어서 놀라운 영육간의 축복을 경험하며 누릴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가를 살펴보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가난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영육간의 가난에서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를 서양(西洋)의 종교라고 하는데, 사실 기독교가 서양의 종교가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중동(中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극동(極東)입니다. 우리나라가 있는 곳은 ‘제일 동쪽’이라는 뜻이고, 중동은 ‘아시아의 중앙’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복음이 소아시아 지방에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터키지역입니다. 거기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동쪽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성령께서 그것을 허락치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복음을 전할까?’고심하고 있는데,  마게도냐, 즉 지금의 불가리아 지방인데, 불가리아는 유럽입니다. 유럽의 첫 성(城)입니다.
그런데 불가리아 지방, 당시로 말하면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의 꿈에 나타나서 “우리를 도와 달라.”고 손짓을 합니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유럽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 비로소 복음이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구라파로 건너갔습니다.  독일로, 영국으로 전파되고 미국으로 해서 우리나라에 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서양종교가 아니고, 동양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들어가는 곳곳마다 나라들이 달라집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이스라엘에서 바로 인도로, 중국으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왔으면, 우리나라가 훨씬 더 발전하게 되었을 것이고, 우리의 사고(思考)가 바뀌어져서 훨씬 더 빨리 개화(開化)가 되었을 것인데, 왜 기독교의 복음이 유럽쪽으로 들어갔을까?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까?
왜 그런가 하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서 아래로 조금 내려와서 복음을 전하면 거기에 유대교가 버티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섬기는 유대교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동쪽으로 가면 인도가 나옵니다. 인도에는 힌두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가 있습니다. 좀 더 동쪽으로 가면 중국에 유교가 있습니다.

모든 종교가 다 자리잡고 있는 곳이 아시아 지역입니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부요한 지역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는 것인데, 당시 아시아는 종교적으로 매우 부요한 지역이었습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교가 전혀없는 종교의 불모지(不毛地)인, 그리고 문화도 발달되지 않은 바이킹족(Viking族), 해적(海賊)들이 있는 가난한 쪽으로 복음이 흘러들어가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이 부요하게 되면 무엇을 많이 가졌다든지, 건강하다든지, 젊었다든지, 많이 배웠다든지 여러가지 이유로 ‘나는 부요하다. 이만하면 됐다.’하는 사람 마음에는 복음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져서 ‘나는 이러이러한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은혜 더하여 주셔야 되겠습니다.’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가난한 자의 마음 속으로 복음이 들어가서 그의 삶이 부요한 삶으로 바뀌어지게 하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만 우리 마음 속에 복음이 들어올 수 있는데, 성경은 <가난>이라는 말을 2백번 이상 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가난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고 하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하나님을 알게 해서, 부요케 하여서 또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하는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이 세상은 가난한 자를 천시하고, 무시하고, 멸시합니다. 잠언 19장 7절에 보면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찌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가난하면 형제도, 같은 배에서 난 형제도 싫어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친구나 세상 사람들이 가난한 자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가난한 자가 그 가난에서  해방되어서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주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셔서 머리 둘 곳도 없으시도록 가난하게 사셨는가? 자기의 묘지 한 평 없어서 남의 묘지에 장사되었는가? 자기 옷 한 벌 없어서 다른 사람이 주는 옷을 입으면서 살게 되었는가?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하여서. 가난한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하여서 친히 가난하게 되셔서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난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처음 사람에게 주신 에덴동산은 정말 풍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함으로 이 풍요를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풍요를 찾아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복음이 마음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말씀을 따라 성실하게 삽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서 지혜를 얻습니다. 그 지혜를 삶에 적용합니다. 그러면 좋은 문화를 발달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도구를 만들어 쓰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곡괭이와 삽으로 땅 파는 사람과, 포크레인이라는 굴삭기(掘削機)로 땅 파는 사람이 비교가 되겠습니까?  일의 능률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또 말씀대로 살면 가정이 평화스러워집니다. 직장생활을 많은 사람들이 <죄의 벌>이라고 생각하는데, 기독교에서는 노동 - 직장을 <벌(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召命)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부는 부엌이 하나님 앞에 제단이요, 직장인들은 책상이 바로 제단이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공장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제단으로 하나님께서 소명(召命)으로 불러주신 것을 깨닫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지 않겠습니까? 자동적으로 복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가난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가난이 사라집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면 가난에서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60년대 미국과 러시아는 경제적인 수준이 비슷했습니다. 60년대 북한과 남한의 경제적인 수준은 오히려 북한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비교가 됩니까? 한 나라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앞에 밤새도록 기도하고, 교회를 세우고 선교사를 파송합니다. 또 한 나라는 교회를 폐쇄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입니다. 그 결국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복음을 받아들이는 나라와 복음을 배척하는 나라가 얼마나 극명하게 차이가 나고 있습니까?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세요.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가는 순서대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문화가 발달되고, 세계 일등국가로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 보세요. 그 나라들은 지하자원이 풍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게 사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부요케 하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서에 따라서 그 나라의 국력이, 그 나라의 인권이, 그 나라의 문화가 결정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서 우리의 생활에 적용하여서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뿐만 아닙니다. 더 무서운 것은 영적인 가난입니다. 어떤 자가 영적으로 가난한 자인가 하면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넓은 땅을  가졌다고 해 보세요. 남포동에 수천 평을 가졌다고 해 보세요. 결국은 두고 갈 것인데, 영원토록 살게 될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산다고 할지라도,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은 정말 가난한 사람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어서 영적인 가난에서 해방되면, 육적인 가난에서는 자동적으로 해방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어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부요케 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곳입니다.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은 복음을 받아들여서 삶이 달라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난하게 들어왔지만 부요하게 되고, 병든자가 들어왔지만 건강하게 되어지고, 낮은 자가 들어왔지만 신분이 높아지는, 사회에서 존경받는, 변화된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은 포로된 자,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자유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어느 양심수의 글을 읽어보니까, 감옥에서 나오는 날, 발이 땅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수가 없고, 산(山)이 정말 춤을 추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유가 소중하고 좋다는 고백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것은 최고의 불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는 “나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에 3만 8천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했습니다.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우리는 어떤 속박에서도, 어떤 굴레에서도 다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포로는 아닐지라도, 영적이요, 정신적인 포로가 되어서 시달릴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뻔히 알면서도 거기서 나오지 못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습관에서 풀려나오지 못하고, 미신에서 풀려나오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사탄의 포로가 되어서 귀신에게 꼼짝을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사탄은 두 가지로 역사하고 있는데, 하나는 자기를 드러나게 일할 때가 있어요. 귀신이 들린 사람에게 들어가서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괴롭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사탄은 절대로 사람의 인격을 중시(重視)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가서 그 마음을 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또 하나는 사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교묘하게 숨깁니다. 미신이라든지, 우상이라든지,  불안이라든지 하는 것을 매체로 하여서 사람을 끌고 갈 때가 많아요. 지금도 제주도 사람들은 일년 내내 이사가고 싶은 때에 이사가지 않습니다. 이사를 내 마음대로 못한다는 말입니다. 언제 갑니까? 신구간(新舊間)이라고 해서 이사가는 기간이 있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그 기간에는 제주도에 있는 모든 귀신들이 다 옥황상제에게 문안인사를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만 제주도에는 귀신들이 없는데, 귀신이 없을 때에 후닥닥 이사를 해치워버려야 되지, 그렇지 않고 귀신이 득실득실 있을 때에 이사를 가게 되면, 귀신들이 이사갈 때 방해를 하고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무엇을 잘 아는 것을 보고 귀신같이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귀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사를 해버리고, 주소를 바꿔놓으면 귀신이 모를 것 같아요? 귀신은 다 압니다. 만약 제가 귀신이라면, “아, 이것들 봐라. 내가 없는데 내 허락도 없이 아주 감쪽같이 이렇게 이사를 해버렸어. 한번 맛 좀 봐라.”하고 더 괴롭힐 것 같은데, 제주도 사람들은 귀신의 지혜를 과소평가해서 살짝 이사해 버리고 나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하여튼 얼마나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는지 모릅니다.

미신에 사로잡히면 완전히 포로가 되어집니다. 이사를 내 마음대로 갑니까? 간장, 된장을 내 마음대로 담급니까? 못을 마음대로 칩니까? 고기를 마음대로 먹고 싶은 날에 먹습니까? 결혼을 내 마음대로 합니까? 완전히 사로잡혀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겠어요?
이 모든 미신과 사탄의 결박을 풀기 위하여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이 모든 결박을 예수 그리스도만이 풀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믿어서 모든 결박에서 다 풀려나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미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사람만 보면 미워집니다. 자기보다 조금만 더 잘 생기고,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면 시기하고, 견디지 못해서 미워하며, 헐뜯고, 험담하는 사람들, 그게 자기 마음이 아닙니다. 미움의 영(靈)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렇습니다. ‘나는 성격이 그래서…’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스피드게임같은 것을 보면 한쪽에서 설명을 하면 저쪽에서는 그 단어를 맞추는 것인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와서 스피드게임을 합니다. 할아버지가 “당신하고 나하고 관계가 뭐지?” 그러니까 할머니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웬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아, 두 글자가 아니고 넉자, 넉자면 뭐지?” 할머니는 “평생웬수”라고 했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집에 살면서도 원수처럼 살고 있습니까? 이유가 뭡니까? 자기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영향을 받아서 미워하는 영(靈)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황혼이혼이 요즘 얼마나 늘어나고 있습니까? 분노의 포로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까닭없이 성을 왁왁 내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자기 성격때문이 아닙니다.
불안의 포로가 되어서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정욕의 포로가 되어서 인터넷 음란사이트를 안보면 손이 근질거려서 못 사는 사람, ‘안 봐야 되는데...’하면서도 음란비디오를 끊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많이 보게 되면 결국 음란의 영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면 가정이 깨어지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의 포로가 되어서 ‘돈’이라면 못할 짓이 없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운명의 포로가 되어서 ‘내가 이렇게 사는 것도 다 팔자지’하며 더 잘 살아보려고, 더 진실하려고 하는 마음없이 체념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어떤 사람은 사탄에 매여서 꼼짝 못하는  사람들.
죄에 매여서 죄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담배, 술에 매여 끊지 못하여서 그 좋은 사람이 술만 들어가면 완전히 미치광이가 되어 가정이 파괴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그러한 사탄의 포로의 줄을 끌러서 자유하게 하기 위하여서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어 보세요. 영접해 보세요.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자유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밤에 가위 눌려서 소리지르고, 잠 못 자고, 스트레스에 눌려서 시달리게 되면 그것이 육적인 질병으로 나타나게 되고 온갖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이 모든 결박을 예수님께서만 풀 수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결박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여러분들을 파멸로, 영원한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박에서 자유케 하시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하여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된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복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은 눈먼 자의 눈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다음은 눈먼 자를 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눈은 육신의 눈뿐만 아닙니다. 지적(知的)인 눈도 있고, 영적(靈的)인 눈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육신의 문제까지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질병까지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서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질병을 치료하시는 예수님을 믿으면 치료의 역사를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적(知的)인 눈이 밝아집니다. 육신의 눈이 밝을 뿐만 아니라 지식(知識)의 눈, 지혜(智慧)의 눈이 있어야만 이 땅에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남에게 손해보지 아니하고, 남보다 앞서가며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의 눈도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앞에 구하라 그리하면 주마>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지혜를 가지고 삶에 적용해 보세요. 다른 사람보다도 얼마나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교회에 김위덕 집사님이라고 계십니다. 그 분은 몇 년 전에 연세가 좀 들어서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어보고 싶은데, 글을 몰라서 성경을 볼 수가 없으니까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글을 배우지 못해서 글을 읽지 못하는데, 성경을 읽으면 내 믿음이 빨리 자라겠습니다. 성경을 읽도록 해주옵소서.”

교회 처음 나온 분이 어떻게 그렇게 배짱좋게 기도했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들 가운데  영어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 영어 알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사람 있습니까? 그런데 집사님은 배짱좋은 기도를 했어요. 날마다 “하나님, 성경 읽게 해주옵소서. 성경 읽게 보게 해주옵소서.” 늘 기도를 하는데, 하루는 성경을 보니까 성경이 보였어요. 글자가 보입니다. 읽어집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세례받을 때 제 방에서 세례문답을 했는데, 그 때 간증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기도했는데 이렇게 성경이 보입니다.” 제가 “한번 읽어보세요.”했더니 줄줄줄줄 읽는 거예요.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우리의 지안(智眼)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아예 이런 것을 기대도 안하니까 이런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지, 지안을 열어주시는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이런 능력도 체험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예수 믿으면 지혜가 있습니다. 그 지혜를 삶에 적용하게 되면 위대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노벨상을 탄 사람이 지금까지 4백 명이 좀 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종교적인 배경을 조사해 보니까, 97%가 성경을 삶의 지표(指標)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결과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지안(智眼)을 밝혀 주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십니다.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는 사람은 세상이 캄캄합니다. 그래서 내일에 대한 불안 때문에 많이 모아두어야 되고, 쌓아두어야 되고,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오늘 즐기자고 하고, 하나님과 천국을 알지 못하니까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래서 더듬거리고 다니다가 붙잡히는 것마다 절합니다. 나무가 붙잡히면 나무에게 절하고. 나무를 깍아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고 해서 곳곳마다 얼마나 장승을 세워놓고 있습니까? 산이 크면 ‘아, 이것도 큰 거구나’ 해서 산을 섬깁니다. 용두산 공원에 아침에 한번 가보세요. 해뜰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해를 보고 절하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눈이 감겨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안이 열리면 하나님 아버지가 보입니다. 천국이 보입니다. 이웃이 보입니다. 내 자신이 보입니다. 나의 사명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놀라운 영적인 눈이 밝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일신천냥 안구백냥(一身千냥, 眼九百냥)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몸 전체를 일천냥이라고 하면, 눈이 구백냥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눈, 지안((智眼)이든지, 영안(靈眼)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이 눈들이 열려져서 밝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눈을 뜨고 살아가라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 주님을 영접하여서 영적인 밝은 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믿는 것은 단순히 믿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수양삼아 믿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한번 의지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가 삶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안에서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일제시대 당시에는 최고의 기쁜 소식 아니겠습니까? 굿 뉴스였습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놀라운 기쁜 소식, 복된 소식, 복음(福音)은 “예수 믿으면 가난에서 자유하게 된다. 예수믿으면 사탄과 미신과 온갖 구속에서, 포로된 상태에서 자유할 수 있다. 예수 믿으면 우리 눈이 밝아져서 우리가 무지에서 자유하게 된다.”는 이것이 최고의 복음인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와 같이 가난을 물리쳐 주고, 내가 너희에게 포로된 상태에서 자유를 주고, 눈먼 자에게 내가 보게 하고, 눈먼 자를 내가 치료하기 위해서 왔노라.> 예수님께서 그것 때문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런 능력을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왔는데, 우리는 예수님과 아무 관계없다고 하면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겠습니까?

우리가 다 여기에 예방접종하러 왔다고 하십시다. 의사가 예방접종해 주려고 하는데 예방접종 안하고 그냥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치료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복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와서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가면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오늘 이 시간 이런 목적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여러분들이 만나셔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놀라운 삶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여러분을 오늘 이 장소로 불러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마음 속에 영접하여서 예수 믿는 자에게 주시는 삶의 놀라운 변화, 가난에서 자유하고, 각종 포로에서 자유하고, 우리가 무지에서 자유할 수 있는 놀라운 삶의 경험을 가지고, 신나는 예수님, 멋있는 예수님을 체험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없다고 말 할지라도 “내가 만난 예수님은 이런 예수님이야” 하고 자신있게 증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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