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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감사] 골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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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감사> 골로새서 1:3~8


저에게는 아주 오래 된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제 부모님은 아들만 여섯을 두셨습니다. 제가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일입니다. 하루는 우리 가족이 다 모여서 밥상에 둘러 앉아 식사는 하는데 우연히 밥을 먹다 아버님이랑 눈이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 저의 모습을 빙그레 미소지으시며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여섯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심히 먹어 주니까 참 고맙구나. 그래 많이 먹어라" 어린 저에게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될 수 없었습니다. 성장하는 동안 항상 저에게는 수수께기 같은 말씀이셨습니다. 아버지가 열심히 일하셔서 자식들 교육시키고 입히고 먹이고 기르시는데 얼마나 힘 드실까? 근데 왜 우리가 열심히 먹는 것이 그렇게 고마운 일일까?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을 가지고 자녀를 길러보니까 그때 아버님의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자식이 열심히 먹어주고 튼튼하게 자라주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은 '아~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끝없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느끼는 보람, 그것이 부모님의 사랑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는 신앙의 아버지로서, 신앙가운데 살아가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감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원래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라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골로새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 대한 세 가지 소식이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는 믿음의 소식이요 둘째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소식이요 셋째는, 이들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고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건강하게 무럭무럭자라가고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아름다운 사랑의 가정을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부모님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뿌듯함과 자식들에 대한 고마움을 갖듯이 사도 바울도 믿음의 아버지요 복음을 위해 달음질하는 사도로서 골로새 교회에 대한 이런 좋은 칭찬과 은혜의 소식을 들을 때 얼마나 뿌듯하고 고마운지 그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세 가지의 소식은 어디에서 왔는지 5절과 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그 첫째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믿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다름 아니라 복음을 듣고 순종하는데서 왔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찾아 왔을 때에 그 복음에 귀를 기울여 잘 들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세상 길로 간 사람, 불순종의 길을 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심판 받고 멸망의 나락으로 빠졌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중요한 것은 듣되 무엇을 듣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보고 언제부터 역사학자가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4살 때부터라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4살 때부터 어머니는 침대 곁에서 역사 속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셨지요 그 때부터 나는 예비역사학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함이니라"(딤후3:16-17)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에 복음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기에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격하며 전율하며 감동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의 믿음은 자라가는 것입니다.

여러 종류의 교인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 후탁교인이 있습니다. 후탁 교인은 성경책을 책꽂이에 잘 모셔 놓았다가 주일 아침에 책을 꺼내서 입으로 먼지를 후~하고 불고서 남은 먼지를 털기 위해 탁! 치는 교인을 일컬어 후탁교인이라 합니다.

여러분 음악을 좋아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듣는 음악도 관심을 가지는 만큼 그 음악이 들립니다. 처음에는 그 음악을 통해 흘러나오는 리듬과 소리만 들립니다. 처음에는 그 선율이 아름답고 하모니가 좋아서 듣게 되지만 그 음악을 점점 알아갈수록 그 음악을 통해 들려오는 작곡자의 고뇌 그리고 그의 삶과 인생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소리가 아니라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리듬이 묻어 있는 그 사람의 메시지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는 소리가 아니라 음성으로 들려집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심을 가지는 만큼 그림이 보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가정을 가지신 분들은 제 말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오면 아내는 남편이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안해도 다 압니다. 구체적인 것은 몰라도 오늘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기쁜 일이 있었는지 척 보면 압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아무말하지 않아도 내가 없는 동안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방의 공기를 통해서 척 압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자녀들의 모습만 보아도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싸웠는지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는지 척 보면 압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정말 원하십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러면 조금씩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금 그 사람의 처지와 지위 그리고 학식이 얼마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들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그때부터 성경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그때부터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과 더불어 살아가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그때부터는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 가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롬10:1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그가 어떠한 사람이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어떠한 처지에 있었는지 묻지 마십시오. 성경은 굳은 마음을 깨고 부서진 마음을 아물게 합니다. 우리는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듣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성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데서 왔음을 6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의인, 위인, 성자의 세 단어를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바로 죄인이다". 철저하게 타락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과 사랑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않고는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 은혜와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쳐 줘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뮬러, 중국 사람들과 똑같은 음식과 의복과 문화로 그들을 섬기며 선교했던 허드슨 테일러, 중보기도의 사람 리즈 하월즈 등 수많은 신앙위인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들이 하나님께 쓰임받은 모습은 다 다릅니다만 꼭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철저하게 죽었다 다시 살아났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그가 사역하는 모든 것이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자신의 주인이신 주님이 인도하시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목회 신학 박사과정 수업시간에 세계에서 가장 새벽기도에 많이 모이는 어느 교회 목사님을 모시고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 온 목회 여정에 대해 발표하고 이후에 질의 응답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에 전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수없이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지금의 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까?" 하는 질문에 아주 짧게 이렇게 그 목사님은 저의 질문에 대답을 했습니다. 언젠가 길을 가다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던 날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 이후 하나님이 자신의 주인이 되시는 삶이 시작되었는데 그 이후부터 자신도 성도들이 자신의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기 시작하고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라는 겁니다.
왜 그런지 자신도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했었습니다.

하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철저하게 죽고 주님 안에서 다시 사는 그 경험!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그 날. 자신의 삶의 B.C 와 A.D를 경험하고 나서부터라는 고백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고백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은 곧 골고다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만나는 것이요 골고다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만난 것은 골고다에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 날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참 사랑이 샘솟듯 솟아나는 날이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도를 사랑하는 성도로 거듭나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바로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흔적이요 그 은혜때문에 고난의 길을 걸었던 흔적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은 바로 믿음의 열매로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6절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는 것에서 믿음이 자라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게 되고 그 열매로서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좋은 나무가 맛있고 좋은 열매를 맺고 좋지 못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정말 훌륭한 믿음은 바로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훌륭한 믿음을 가진 것 같지만 정작 좋은 믿음은 고난의 때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향나무를 아십니까? 자신을 찍는 도끼 날에 자신의 부드럽고 향긋한 향을 묻혀주는 향나무 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참으로 귀하고 강력한 무기를 주셨습니다. 세상의 힘과 깡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최고의 선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은 아름다운 왕궁이나 성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골고다에 있었습니다. 처절하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이 참 사랑이요 이것이 세상을 이길 위대한 힘이요 능력인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능력이요 구원이요 소망입니다.

전 오래 전에 어느 분의 일기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열 네 살 되는 해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그날 밤에 나는 새벽 2시까지 카드놀이를 하며 친구들과 놀랐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술집에 들러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놀았다.' 이 일기의 주인공이 누군지 아십니까? 고아의 아버지요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입니다.

이렇게 완악하게 패역무도한 사람도 하나님은 사랑으로 깨뜨리시고 녹이십니다.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 묻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패역함을 깨뜨리시고 굳은 심령을 녹이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세상의 모든 것을 녹이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사망에서 구원으로 옮기셨기 때문입니다. 구주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랑을 입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찬송가 85장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전 자식을 키워보면서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자신을 내어주는 부모님의 사랑을 하나 하나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자식을 키워보지 않으면 자신을 키우던 부모님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생각이 변하고 인생관이 바뀌고 삶이 바뀝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이렇게 연약하고 볼품없는 인생이지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11:40) 주님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가 가치 있는 인간이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가치 있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있기에 우리의 생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롬8:13).

우리는 살되 잘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살되 좋은 곳에 열심이어야 합니다. 꽃을 옮겨 다니기 위해 열심히 날갯짓을 하는 벌은 사랑들에게 사랑 받지만 모기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열심히 산다고 다 좋은 것 아닙니다. 어느 곳을 향하여 사는냐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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