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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군가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 벧후 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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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 벧후 2:4-10

[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두 개의 질문을 드림으로 오늘의 말씀을 열어 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계속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보십니까?’
너무 기습적이고 심각한 질문이라서 도무지 어떻게 대답해야 할는지 모르시겠다고요?
그럼 성경에서 대답을 찾아봅시다. 이 까다로운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답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당장 멸망되어 버려야 한다는 대답도 있고, 좀 더 두고 보아야 한다는 대답도 있습니다.

롬6:23 히9:27 약1:15 벧후3:7-10 등에서는 죄악이 관영해진 세상은 그에 따른 심판으로서 멸망되어야 하는 것이 사필귀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8:35-36 딤전2:4 벧후3:8-9 사1:9(만 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요나4:10-11(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요나)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 못하는 자가 12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하지 아니하냐?) 이렇게 멸망되어야 마땅하지만 좀 더 두고 보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의 대답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심판은 있어 왔으며 심판의 내용은 참담한 멸망이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않고 심판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사탄이 되고 악령들이 되어 지옥 어두운 구덩이로 떨어졌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셨습니다. 그 결과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대홍수를 내리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하늘로서 유황불을 쏟아 부어 온 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불의한 자들은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가두어 놓겠다고 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멸시하는 인생들에게는 특별히 형벌 하실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때로 진노도 하시고, 심판도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별로 고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골치 아픈 이야기 뭣하려고 끄집어 내느냐면서 말하기 싫어합니다. 듣기도 싫어합니다. 당장 마음 편하고 자기 유리한 대로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벧후3:5을 보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들의 심리를 참으로 잘도 묘사한 구절입니다.

사람들이 양심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면 하나님은 분명 살아 계시며, 이 하나님의 충고와 경고를 무시한 채 방종을 일삼으면 끝내 무서운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지적처럼 미련하고 고집스러운 인생들은 ‘부러 잊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지 않으면 무서워서 하루도 편히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심판과 형벌은 언제라도 일어납니다. 이라크에서 한국인은 안전하다. 파괴된 이라크를 재건하는 일에 참여하는 한국인에게 이라크인 들이 적대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이것은 우리 정부가 그 동안 선전해왔던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부도 내심으로는 불안해하면서 겉으로는 그 사실을 부러 잊으려고 그렇게 주장해 왔던 것입니다. 결국 한국인도 피격 당하고 피살당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심판, 인류 비극의 날은 언제라도 현실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노아 할아버지 시대에 무시무시한 대홍수가 일어났습니까? 왜 소돔 고모라성의 하늘로서 유황불이 비오듯 쏟아져 내렸습니까?
의인이 너무 적어지고 죄악은 너무 관영 하였기 때문입니다. 노아 시대의 죄악상은 ‘육체주의, 향락주의, 쾌락주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성도들)들이 사람의 딸들(이방인, 우상숭배자, 불신자들)과 예사로 혼인하고 교제하였습니다. 소돔 고모라시대의 죄악상은 ‘동성연애, 동성혼인, 폭력주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시대, 우리 사회는 어떠합니까? 노아 시대와 비교하면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보십니까? 소돔 고모라시대와 비교할 때 그래도 아직은 덜 심각하다고 보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떠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들이시여!
의인이 너무 적어지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가차없이 심판하시고 응징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필요합니다. 의인이 많아져야 합니다. 누군가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미루지 맙시다. 떠넘기지 맙시다. 우리 모두 의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숫자, 수긍하실 만큼의 의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는 어떠합니까?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1,000만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의인이라 할 수 있을까요? 03, 12, 13(토)자 기독교보 홍 치모 논설고문 장로님의 詩論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한국교회는 자기도 모르게 영적 긴장이 해이해지고 있다. 긴장이 풀리면 게을러지기 마련이고, 영혼의 감각은 둔해진다. 반면에 각종 무서운 욕심이 발동한다. 그 욕심은 향락심과 비례한다. 우선 주일성수가 무너진다. 예배는 형식적으로 참석하고 골프장으로, 헬스클럽으로 달려간다. 한국교회 초기에는 시골교회 교인이 만약 주일 오후에 논에 김매려 갔다가 발각되었을 때 교회는 수찬 정지라는 권장을 내렸다. 어느 교회에서 교인이 감사헌금으로 백만원 수표를 바쳤는데 헌금자 영수증 명단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확인한 결과 헌금 취급 위원이 도중에 착복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를 놓고 당회에서는 권장을 해야 한다는 쪽과 그냥 다른 교회로 보내자는 쪽으로 갈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사자는 권장을 받고 안 받고 간에 본 교회를 떠나 다른 대형교회에 출석하여 파묻혀서 예배를 드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또 한 가지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모 기자의 회계 장로가 그 간 노회가 적립해 놓은 20억원을 횡령하여 어디론가 잠적해 버렸다고 한다. 이쯤 되면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누구를 믿고 그 막대한 교회 재정을 맡길 것인가? 강단에서 교인들을 향해서 회개를 외치는 세례요한과 같은 인물이 나도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회복할 수 있을지 인간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들과 사회는 지금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심각하게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일제의 박해와 공산주의의 적화야욕으로부터 기적적으로 지켜 주시고 지난 50년 간 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한 은혜와 축복으로 쏟아 부어 주셨거늘 우리가 교만과 방종과 거짓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은 무서운 죄악입니다.(출20:7) 이들 죄악은 하나님의 심판을 속히 초래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심판을 막아야 합니다. 이 재앙을 막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수긍하실 수 있을 정도의 의인이 필요합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께서 이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 시대마다 ‘적절한 수의 의인’을 요구하십니다. 바로 이 의인의 숫자가 모자라면 세상은 심판을 받습니다. ‘1% 이론’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현대 최상위 선진국가들은 전 인구의 1%에 해당되는 뛰어난 이공계 두뇌들이 전체 99% 국민을 먹여 살린다는 이론이었습니다. 엊그제 서울공대 모교수는 지금 우리 사회의 제도와 유행과 풍토가 잘못 흘러가므로 이 1% 두뇌들이 이공계를 떠나고 있으며, 4,800만 인구가 먹고 살 길이 실제로 우려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 동안은 수능 성적 산위 0.3%되어야 서울공대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지금은 3% 안에만 들면 들어올 수 있으니 국제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1% 두뇌를 확보할 수 없게된 것이 벌써 몇 년 전부터라고 합니다.

저는 이 글을 보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암울한 시대, 조국과 민족을 살려내기 위하여서는 최소한(?) 1%의 의인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48만 명의 의인이 있어야 합니다. 1천만의 기독교인이 있으니 문제없다고 생각됩니까? 아닐 겁니다. 그렇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창세기 18장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유황불 심판이 임박한 소돔, 고모라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의인이 필요하다’는 하나님의 의중을 전달받고서 ‘50명의 의인’을 제시하였습니다. 50명 정도의 의인이면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며, 아무리 적어도 100명 정도의 의인은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단 열 명의 의인도 없었습니다. 결국 소돔 고모라는 무서운 심판을 면하지 못하고 유황불이 쏟아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참 무시무시한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소돔 고모라가 멸망한 것은 그 도시의 죄악 때문만이 아니고 ‘필요한 의인의 수효’가 절대적으로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50명 의인은 아무리 적어도 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 5분의 일인 열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계산하는 교인 수 1,000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 얼마나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1%가 99%를 먹여 살린다’ 저는 그 공대교수의 글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예사롭지를 않습니다. 4,800만 우리 민족을 살려낼 의인 1%-48만 명이 있느냐? 의인 48만 명만 있으면 우리 민족을 살릴 수 있는데.... 여러분 이 수효가 쉬운 것 아닙니다. 부산 인구가 400만이면 의인 4만 명이 있어야 합니다. 장담할 수 있습니까?

의인이 되는 것은 쉽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면 의인이 됩니다. 의인으로 간주해 주십니다. 의인이라고 불러 주십니다.(이를 칭의/선언적 의라고 합니다.)
롬1:17, 3:20-24, 5:1-2, 4:5-7, 8:1-2, 10:9-10 이것은 전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일방적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엡2:8-9)

오늘 본문 성경에서 다루고 있는 의인은 이 의인이 아닙니다. 이 의인의 신분을 가진 신자들이 의인으로, 의인답게 살아가고 있느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답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뜻 밖에 의인이 되었습니다.(마16:17, 요1:12-13) 그러나 의인답게, 의롭게, 의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 7-8절을 보십시오. 매우 심각한 말씀입니다. 깊은 묵상을 요하는 말씀입니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하니라”

소돔 고모라성에 의인이라야 겨우 롯 한 사람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보아 주셔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의인답게 살고는 싶으나 주변 환경이 심각하게 방해를 합니다. 그래서 롯은 날마다 갈등하고 고통 해야 합니다. 음란한 행실을 자의든 타의든 날마다 보고 듣다보니(여호와를 믿음으로) 이미 의로워져 있는 그의 영혼이었지만 상처입고 훼손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의인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 인지요. 의인으로 간주하기에는 아슬아슬한 롯입니다만 이 수준의 의인마저도 100명은커녕 최소한의 수효인 열 명도 찾을 수 없었기에 소돔 고모라는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사직동교회 가족 여러분!
이제 결론이 났습니다. 누군가는 의인이 되어야 하겠지요? 시대를 살리고, 민족을 구원하고,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누군가 바로 그 의인이 되어야 하겠지요?

의인으로 의인답게 살려고 하면 무겁고 불편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는 잘 안 맞을 것입니다. 미움도 받고 손해도 볼 것입니다.(요17:14-15, 16:33) 그러나 어느 정도 훈련되고 익숙해지고 몸에 베이게 되면 기쁨과 행복과 편안함과 만족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시4:7, 요4:14, 14:27, 빌3:7-9, 딤전4:7, 6:6,)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얻나니”

의인답게 살아가는 것은 외롭고 고달프고 슬퍼 보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숙달이 되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결코 맛 볼 수 없는 엄청난 기쁨과 평강의 단계로 접어들게 됩니다. 아울러 우리 덕분에 이 세상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면제받기도 하고 연기 받을 수도 있게 됩니다. 이런 신비함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더러 의인으로 살아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인답게 의인으로 살아보는 것은 결코 고리타분하거나 재미없는 일이 아닙니다. 충분히 가치 있고 보람있는 일입니다. 분명 누군가는 의인이 되어야 하겠지요? 바로 우리 사직동교회 가족들이 의인이 되어져야 하겠습니다.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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