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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과 만남의 삶을 살라 / 요한 4: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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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만남의 삶을 살라
요한4:7-30

사람은 관계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존재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 관계성은 만남의 역사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비록 우리에게 본래부터 내재하고있는 고유의 모습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만남에 의한 관계성에서 새롭게 개발되고 함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를 어떻게 만나느냐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만남에 따라 영향을 받기도 하며, 인생의 삶의 형태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일생에 네 번의 중요한 만남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만남은 부모와의 만남입니다. 부모와의 만남으로 인생의 기초적인 삶의 형태가 형성됩니다. 부모와의 충분하고 진실한 만남을 통해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의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스승과의 만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생을 좌우할 가르침을 받을 스승을 만나야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야하고 그가 인도하는 길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 된 스승이 없는 배움이란 지식의 축적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 번째는 인생의 삶을 함께 걸어갈 친구와 동반자와의 만남입니다. 진실 된 친구와 동반자를 가진다는 것은 살아가는 삶을 즐겁게 하고, 행복한 삶을 성취하게 하는 소중하고 값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 문호 ‘토스토예프스키’는 “인생에서 단 한사람의 진실한 친구를 갖지 못한 삶은 죽은 삶과 같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의 다른 표현은 인간의 구원과 죽음과 영생을 책임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꼭 있어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불행한 만남의 삶을 살아온 한 여인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부모를 잘못 만났습니다.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비천한 사마리아인을 부모로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불운한 출생과 성장을 바로 잡아줄 참된 스승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가정에서 자랐기에 훌륭한 랍비에게 교육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만남의 삶이 출발부터 잘 못되어지는데서 이 여인은 가난하고 무식해야 했습니다. 좋지 못한 환경과 배움을 가지지 못하고 자라 가난하기에 먹고살기에도 어려웠습니다. 결국, 여인은 살기 위해 다섯 남자와 함께 살아야 하는 불륜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여인에게 어는 누구도 친구와 반려자가 되어주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그녀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힘들고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은 사람 만나는 것을 피하여 아무도 찾지 않는 뜨거운 자정시간에 우물가를 찾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여인은 만남의 축복을 가지지 못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그렇게 만든 세상을 향하여 원망과 증오와 적개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가장 귀한 만남의 축복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축복의 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남으로 불행한 만남의 과정을 축복의 삶으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만남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만남의 사건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남은 어떤 것입니까? 이 만남에 따라 예수님과의 관계적 삶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가성 여인의 예수님과 만남은 우리들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어떤 만남입니까?

대화의 만남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여인과 만나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일상성에서부터 대화를 시작하여 신앙의 대화까지 하셨습니다. ‘물을 달라’는 대화에서부터 인간의 내면을 시원하게 하는 생수에 대하여 대화하셨습니다. 여인의 직접적인 문제에 대하여 대화하셨고 예배의 문제에 대하여 대화하셨고 메시야에 대하여 대화하셨습니다.

미국의 신문학자인 ‘윌버 슈럼’ 박사는 “대화가 왜 필요한가? 라는 질문은 ‘그 질문은, 왜 먹는가?’, ‘왜 자는가?’ 라는 물음만큼이나 어리석다. 사람은 배고프기 때문에 먹는다. 피곤하기 때문에 잠잔다. 사람은 집이 불타기 때문에 ‘불이야’ 라고 소리친다. 대화도 이와 마찬가지다”고 했습니다. 경영학의 대가인 ‘P. F. 드리커’는 “회사 경영이 실패하는 원인은 60%는 사원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데 있다”라고 했고, 부부 상담자 ‘퀴베인’ 은 “이혼하는 원인의 50%는 부부사이의 대화가 원활하지 않은데 있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어느 범죄 심리학자는 “범죄자의 90%가 다른 사람과의 대화나 교제 등 교통하는 관계가 원활하지 못함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파괴하는 인생을 산 사람들은 대개가 대화의 삶이 결핍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스탈린이 그 실례의 하나입니다. 모스크바의 외교 가에서는 외교관들이 그들의 재임 기간 중 거의 스탈린을 만나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스탈린은 20년간 불과 7명의 기자들- 독일인 2명, 일본인 2명, 미국인 3명- 과 인터뷰를 했을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대화의 결핍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내는 가를 보여줍니다. 인간끼리의 대화의 결핍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나님과 대화를 상실한 인간들의 역사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과 대화의 만남을 상실한 인간들은 무서운 범죄와 파괴의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주님과 대화의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의 역사 속에 계셨던 예수님만이 아니십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와 대화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확신 있는 믿음 안에서 대화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확신을 가질 때에 그 믿음 안에서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확신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우리 안에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 안에서도 대화하십니다.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듣고 읽고 명상할 때에 그 속에서 대화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영으로 대화하십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영을 보내셔서 우리의 영과 대화하시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특이한 경우에 예수님은 직접우리와 대화하시기도 하십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부르실 때에 직접 대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화는 우리가 듣도록 하시는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여는 대화를 하십니다. 에수님의 대화는 내가 모르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합니다. 예수님의 대화는 우리가 감추고 숨기었던 것들을 드러나게 합니다.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함으로 그녀의 마음속 깊이 감추어져 있었던 증오와 적개심이 드러났습니다. 목마른 그녀의 삶이 노출됐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불륜이 밝혀졌습니다. 오래 동안 풀지 못했던 신앙적 질문과 메시야, 곧 그리스도에 대한 기다림이 드러났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과 대화의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과 대화해야 목마르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과 대화해야 죄와 부끄러움을 깨닫게 되고 용서받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예언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1:1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해야 바른 삶을 걸어가게 됩니다. 예수님과 대화해야 용기를 얻고, 즐겁고 기쁘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함으로 평화와 함께 진정한 휴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대화부재나 결핍은 우리로 불행 속에 갇혀있게 합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예수님과 대화의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과 대화함으로 영혼의 만족함과 시원함을 가지십시오. 혹 실패의 삶과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 지라도 예수님과 대화하시는 만남의 세계를 가지십시오. 그러므로 성공과 축복의 삶을 사십시오. 주님과 대화의 만남을 가지고 사십시오.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나는 만남

만남에 있어 상대를 어떻게 인식하느냐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예수님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여인은 ‘물을 좀 달라’ 하시는 예수님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고 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유대인으로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 유대인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여인에게 예수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주여, 당신께서는 물길을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나에게 생수를 구해 주시겠습니까?”(표준 새번역)고 질문했습니다. 여기서 주여는 RSV성경에서는 Lord가 아닌 Sir로 표기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만남이 지속되면서 여인에게 예수님은 유대인에서 훌륭한 선생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한 평범한 인간에서 존경할 분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다”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자기의 숨기고 있는 불륜의 생활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선지자(예언자)로소이다”고 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유대인이라고 불렀고 다음에는 존경하는 선생님이라고 했고 다음에는 예언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의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과 신앙적인 문제를 나누었습니다. 그것은 예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와 파괴된 성전을 재건할 때에 사마리아인들이 함께 참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순수혈통을 지키지 못한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성전재건과 성전예배에 거절당함으로 그리심산을 모리아산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곳에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이를 보고 참지 못한 유대인들은 그 성전을 강제로 부수어 버렸습니다. 그 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반목하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예배의 장소를 거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이처럼 인종과 신앙이 얽힌 민감한 사항을 거론하자 예배장소로 더 이상 고민하지 않을 때가 이르렀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시면서 예배의 장소보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더욱 중요함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에 여인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압니다. 그 분이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신 구원의 주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여인의 만남은 유대인에서 선생님, 선생님에서 예언자, 예언자에서 그리스도로 변한 것입니다. 여인의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된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리스도와 만남이 될 때에 전율하는 감격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감격과 충격이 너무 커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 감동과 충격으로 물을 길으러온 목적과 물동이도 잊고 동네에 뛰어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을 기피하던 모습을 뒤에 두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나는 만남은 가장 큰 감격이고 충격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고 있습니까? 한 인간으로 입니까? 아니면 훌륭한 선생님입니까? 아니면 예언자와 같은 위대한 사람으로 만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로 만나시길 바랍니다. 이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 여인과 같이 인생을 바꾸어 놓는 감격과 충격적인 경험을 가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핍박하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난 뒤에 항상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했고 그 은혜를 찬양했고 그 은혜로 문안하고 그 은혜를 전하고 그 은혜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감격과 기쁨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남으로 그 은혜 속에 사는 기쁨과 감격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시골의 어떤 무식한 사람이 부흥회에 참석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은혜를 깨달은 뒤에 너무나 큰 감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감격의 생활 속에 가정예배를 시작하고자 했습니다. 온 가족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무릎을 꿇게 했습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하는 가족에게 그는 가장으로서 ‘오늘부터 우리 집은 가정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예배개회를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본인도 가족들도 마음은 뜨거운데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지 알지를 못했습니다. 골똘히 생각하던 가장은 갑자기 두 손을 번쩍 들더니 따라 하라며 외쳤습니다. “예수님 만세!” 가족들도 가장을 따라 큰 소리로 “예수님 만세!”를 외쳤습니다. 가장은 이렇게 세 번을 외치더니 흐믓한 표정으로 “이제 됐다, 예배를 마쳤으니 이제 가도 좋다”라고 했습니다. 비록 이 예배가 형식을 갖춘 예배라고 할 수 없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난 사람의 감격의 예배임에는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죄악의 삶에서 구원합니까? 누가 우리를 죽음과 멸망에서 구원할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질병에서 구원합니까? 누가 우리를 실패와 절망의 웅덩이에서 구원합니까? 누가 우리를 수치와 부끄러움에서 구원합니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 에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시는 확신에서 구원의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인과의 대화에서 “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시는 성도로 하나님께서 그 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축복의 삶을 살아가는 승리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변화를 찾는 만남

여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과 변화를 찾는 만남을 가졌습니다.
감격을 잃어버리고 생에 대해서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달려가는 기쁨과 감격적인 변화를 찾았습니다. 인생은 무의미하고 불행한 것이며 절망적인 것으로 알고 살았던 이 여인이 이제는 생은 가치 있고 행복한 것이라며 감격하며 살아가는 여인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자신의 수치와 불행에 자신을 은폐하는 생활에서 대중 속에 자신의 가치를 자랑하며 공개하는 여인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생에 대해서 말할 것이 없는 삶에서 ‘생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가’ 라면서 말할 것이 많은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말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 없는 적극적인 믿음의 여인으로 변한 것입니다.
여인의 변화는 총체적 변화입니다. 성격과 감정과 인격과 행동이 변화되었습니다. 인생관과 가치관이 변화되고 삶의 방식과 태도가 변화된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신의 삶을 자랑할 수 있다는 것 놀라운 변화인 것입니다. 참으로 가치 있고 행복한 삶으로의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는데서입니다.
복음성가 가수인 ‘쉐어(George. B. Shea)에게 어떤 사람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쉐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 분께서 나의 삶을 변화시키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만남인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에수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변화의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변했고 변해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예수님과의 만남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인생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행복해지기를 원하기 전에 먼저 행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축복자가 되기를 원하기 전에 축복자가 될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공하기를 원하기 전에 성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소경거지 바디매오를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 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면서 보게 해 주었습니다.(막10:46-52) 바디매오는 변화를 먼저 구한 것입니다. 행복하지 못하게 하고, 잘 살수 없게 하고, 성공할 수 없게 하는 소경으로부터 변화를 찾은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소경에서 변화를 찾음으로 축복의 삶을 실현했습니다.
‘재치’와 ‘만남’이라는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젊은이들은 똑같이 사랑이라는 소녀에게 구혼했으나 접근 방법은 전혀 달랐습니다. ‘재치’라는 젊은이는 소녀의 부모님과 현관에서 열심히 이야기하는 동안 ‘만남’이라는 젊은이는 뒷문에서 그녀를 만나 구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젊고 아리따운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는지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신앙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재치 있는 이론이나 논쟁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대화의 만남이 되십시오. 구세주로 만나십시오. 변화의 만남이 되게 하십시오. 예수님과 만남의 삶을 살아감으로 승리자가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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