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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서주일] 무엇에든지 (빌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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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치료하는 복음

대부분 사람들의 위장 속에는 박테리아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박테리아 때문에 여러 가지 질병이 생기게 되고, 심할 경우 모진 병까지 얻는다고 합니다. 이 박테리아는 자기 방어를 위해 암모니아산을 분비하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의 입에서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특히 잠을 자고 난 뒤 입안에서 나는 냄새는 대부분 이것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수년전 이 사실을 알게 된 의학자들이 위장 속에 기생하고 있는 박테리아를 박멸하기 위한 연구를 거듭한 끝에 시약과정을 거쳐 최근에 치료약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분이 이 사실을 알고 그 약을 구해 두 주간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취침 직전에 복용했는데 약을 복용하는 동안 뱃속에 있던 불순물과 함께 숙변이 나오는데 자신의 작은 체구에 어디에 그토록 많은 배설물이 있었는가 싶어 스스로도 놀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자 소화도 잘 되고, 식욕도 왕성해지고, 신진대사도 잘 되고, 특히 잠자고 난 뒤에도 입에서 악취가 나질 않아 참 좋았다는 것입니다. 약 선전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약을 먹는 일이 마치 인생을 치료하는 복음과 같고, 우리의 신앙생활과 유사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체질이 변화되고, 삶의 양식이 달라집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인생에도 이같이 있어서는 안 될 박테리아가 마음속에 기생하고 있습니다. 욕심이나 감정, 오기, 질투, 시기, 경쟁, 미움과 같은 갈등 뿐 아니라, 나쁜 습관이나 못된 버릇, 나태함 같은 것이 원치는 않지만 나도 모르게 우리의 삶 속에 숨어서 기생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를 숨기기 위해 외식과 위선이 생기고, 구구한 변명과 자기 옹호가 있는 것입니다. 나쁜 고집과 아집 때문에 겸손하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선을 베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악취를 풍기고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더럽히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나 많아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하덕규가 부른 '가시나무'라는 노래입니다. 가시나무는 가시 돋친 나무를 말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가시나무로 내가 사랑하는 당신, 나를 사랑하는 님이 쉴 수 없다고 이 노래는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시를 뽑아내지 못하면 함께 어울려 살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시를 뽑아내야 합니다. 헛된 바램의 가시, 시기하는 마음의 가시, 돈과 명예 욕심의 가시, 이기적인 마음의 가시, 내 힘으로 가시 정리가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를 해보세요....

바울 사도는 오늘의 본문에서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8절에서 여덟 가지 덕목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던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사단으로 인해 심어진 모든 불순한 것들이 우리 생의 체내에 들어와 기식하는 기생충 같은 박테리아를 박멸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의 모든 삶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고, 또 이 말씀을 믿고 읽는 자에게 능력을 제공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을 통해서 영적인 깨우침을 받고, 이 성경을 통해서 위로와 힘을 얻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은 우리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한없이 크고 놀라운 선물을 약속한 복음을 성경을 통해서 듣게 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교만하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의 부끄럽고 더러운 죄를 다 드러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의 말씀처럼 감사한 말씀이 없으며 동시에 이 말씀처럼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우리의 삶에나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것에 있는 죄악들을 드러나게 하는 말씀도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말씀인 것을 우리들은 먼저 알고 감사해야합니다. 무엇에든지 참되라, 무엇에든지 경건하라, 무엇에든지 옳고,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들을 만하여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가 죄악과 멸망 가운데 있는 자라면 이런 삶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거룩하라고 하신 하나님 앞에 먼저 감사를 드립시다. 그러나 과연 이 말씀에서 우리들이 도전과 정죄감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에 마치 의사 앞에 진료 받기 위해 앉은 환자같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환히 드러나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감사를 느낄 뿐 아니라 심한 자책감을 느낍니다. 과연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 말씀의 요구대로 무엇에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행했던가? 언제나 경건하며, 어떤 일에도 옳고 깨끗한 행위를 했던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에도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한 그런 아름다운 매력이 있는가?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한 그런 일들만 했는가? 오히려 나는 이 말씀과 반대로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 대하여도 거짓되고 비뚤어지고 욕 듣는 일만 하지 않았는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에 이 말씀 앞에 우리는 한없이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진리인 것을 깨닫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종말로 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디서든지 언제나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하여 어떻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가를 듣고 싶어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이 교회 속에서 오늘 세대를 사는 사람들이 갈등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바른 대답을 못해주고 간접적인 교훈이나 혹은 유추하는 내용을 가지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오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너무 제한하는 것이 많아서 신앙 생활하는 그 시간부터 자신의 삶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차라리 이런 데 대하여 많이 자유로운 천주교에 출석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런 상황을 만났을 때에 가질 중요한 자세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말씀들은 우리들로 제한시키고 우리들의 삶을 피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부터 알아야합니다. 무엇인가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롭고 그것이 자신을 만족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로를 걷도록 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른 길 걷는 것을 기쁨으로 걸어야합니다.

또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판단을 하기 어려울 때에 우리들은 몇 가지를 주의해야합니다.


첫째로, 모든 것을 율법적으로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롬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나 이것은 "성경이 하라고 했기 때문에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한다" 하면서 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자세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자가 되어서 기쁨과 감사로 그 법을 성취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자식이 부모의 말씀을 잘 안들을 때는 너는 자식이니까 해야 하지 않는가, 자식이 부모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말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진정 그 은혜를 감사하여 기쁘게 즐겁게 하는 것이 더 복될 것 아닙니까?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갚을 길 없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하는 이런 의무적인 행위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을 것이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무감에 사로 잡혀서 주일에 교회에 끌려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그 감격을 생각하면서 주일을 지킨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까지 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겨도, 어떤 형제에게 흠이 있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법아래 있는 자가 되어서 논쟁을 한다면 이미 그 곳은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인 줄 알고 서로 은혜를 나누어야합니다.


둘째는 양심의 자유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전서에 여러 가지 교회의 현안들에 대하여 신앙생활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을 하면서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할 기준을 말씀한 것이 있습니다. (고전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모든 것이 다 가하지만 다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양심으로서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도 자신은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먹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말할 뿐 아니라 모든 문제에 대해서도 은혜 아래 있는 자로서 자유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모든 것이 가하다고 다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유익에 대해서 바울은 자신만 보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가책되지 않는 일이라도 다른 사람의 양심도 생각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고전10: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10: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분문을 살펴보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인데, 바울은 항상 이를 생각하고 행하라 했습니다. 이럴 때에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덕 있는 삶

8절에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하며, 칭찬하며, 덕, 기림,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면 당연히 삶을 통해 나타내야 할 향기로운 덕목들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곱게 단장하고 외출할 때면 반드시 향수를 뿌립니다. 그렇게 하면 그 여인이 지나칠 때 흘러나오는 향수 냄새가 주변 사람들에게 상쾌한 마음과 단정한 품위를 느끼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 삶과 인격에서 이러한 향내가 나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린도후서 2:15)"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향기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냄새는 거룩한 냄새요, 덕망 있는 향기여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좀 더 가까이 가서 이야기하고 싶고, 상담하고 싶고, 서로 같이 있으면서 함께 일하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위벽 속에 박테리아가 기생하고 있으면 입에서 냄새가 납니다. 불쾌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역겹기까지 합니다. 차라리 배설물 냄새만도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냄새는 향기여야 합니다. 이런 냄새, 즉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나타내는 사람이 교회의 중직자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 교회의 진리의 기둥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여덟 가지 덕목을 가만히 살펴보면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도덕 기준으로 자기 자신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도덕의 기준은 양심입니다. 양심을 하나님의 좌소(座所)라고 한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은 아직 복음이 없는 자에게도 양심은 있다고 했습니다. 양심은 곧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라고 로마서 1장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둘째는 사회봉사의 기준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살피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양심인 경우는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사회생활에서는 삶의 기준이 내 자신이 아니라 내 이웃입니다. 내 이웃이 나를 통해서 기쁨을 누리고, 덕을 느끼고, 칭찬과 사랑을 경험하는 그러한 봉사의 삶이어야 합니다. 교회 생활도 예외는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이웃에게 잘 한다 해도 내 이웃이 그 사랑을 느끼고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를 바르게 산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사회생활의 평가 기준은 내가 아니라 내 이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셋째로 신앙적으로 믿음의 순도를 생각하게 하는 덕목입니다.

나의 믿음의 순도가 어느 정도인가 스스로 평가하고 판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경건 생활은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를 질문하게 합니다. 태양에 가까워질수록 뜨겁습니다. 불빛에 가까이 갈수록 밝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태양이십니다. 내 신앙이 하나님께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 덕 있는 생활이 참으로 귀한 것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교회에서 덕을 세우는데 힘써야 합니다.

교회의 정치 정신은 법과 권위와 덕입니다. 법대로 해야 합니다. 권위 있게 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법을 지키고 권위를 지킬지라도 덕을 잃어버리면 전부를 잃어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구역, 각 부서, 각 기관에서 교회의 덕을 잃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평강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음을 믿어야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불안하고 항상 불만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우리의 마음에 함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에게는 그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그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으로 어떤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염려 없이 담대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신앙적인 평강입니다. 세상의 어떤 외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마음에 깃드는 참된 평화입니다. 이것은 진실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인에게 하늘에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마음의 열매요, 세상의 모든 염려의 질병을 물리치는 해독제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더 많은 기쁨의 반려자요, 사람들이 기대하고 이해하는 것 이상의 평강과 기쁨입니다. 이러한 하늘의 평강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자기를 비우고,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축복으로 채워주시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어려움이 산적해 있는 세상에서 덕망 있는 신앙으로 향기를 나타내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같은 평강을 옥중에서도 경험하고, 환난 중에서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기쁘고 좋게 그리고 나에게 유익하게 할까 하는 생각을 버립시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어떠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하는 믿음의 삶인 경건일까?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일부러 꾸며서 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고 그들에게도 은혜가 되어서 사랑할만하며, 칭찬들을 만한 일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까 하는 이것을 생각합시다. 이렇게 이 한해를 마무리한다면 우리의 하루하루도 이렇게 살아간다면 이는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고,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깨끗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만하고, 칭찬 받을만하고, 무슨 덕이나 기림이 있든지 항상 이를 생각하고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삶 자체가 복 아닙니까? 이런 복된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통하여 날마다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죄인인 인간들이 모든 더러운 죄를 깨끗게 하시고 사해주시며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질병과 고통과 아픔과 상처로 얼룩진 인간들에게는 치유하시고 싸매시고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절망에 빠져 좌절하는 인간들에게는 희망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어둠 속을 헤매이는 인간들에게는 생명의 빛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는 인간들에게는 새로운 생명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무지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지혜의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주일로 지킵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탄은 성육신 사건이기도 합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우리는 온전한 인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안경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또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압니까?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시력이 나빠지고 눈이 좋지 않은 사람은 안경을 씁니다. 안경을 끼고 보아야 잘 보입니다. 성경은 안경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안경과 같이 우리 속에 있는 작은 허물까지 볼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시각으로 우리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저 이만하면 됐지, 내가 남보다 깨끗하지" 하는 사람도 성경의 조명하시는 빛으로 보면 형편없는 인생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고 거울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행복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주먹이나 자기 의지, 자기 지식, 자기 학식, 자기 경험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신을 인정하지도 않고, 신이 없어도 산다고 하는 무신론자들이요, 인본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한번만 이 땅에 성육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성육적 사건을 통해 당신의 창조와 구원의 거룩한 사역을 계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생명이 탄생되고 일그러진 생명이 치유 받기 위해서는 말씀은 마구간에 낮아지고, 거룩한 자가 창녀와 담소하며, 지존자(至尊者)가 나병환자 손을 붙잡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두루 살피면 주위의 생명 속에서 생명이 태어나고 치유 받고 성숙해 가는 모든 창조적 산고 속에서 오늘도 성육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와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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