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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인의 고민 (창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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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가인의 고민
성경본문 창세기 4:1-10

설교내용 

LG생명과학 기술연구원에서 신약을 개발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2003년 3월에 완성된 일이지만 지난 2003년 11월에 한 시간에 걸친 리포트를 통해서 온 국민 앞에 공개를 했습니다. 21세기 산업은 신약 개발이 매우 유용하다고 합니다. 세계의 신약 시장이 300억불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우리 나라가 목표를 가지고 뛰어 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일의 아스피린은 1년에 브랜드값이 4조원이라고 합니다. 영국의 잔탁은 3조원, 미국의 비아그라는 2조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약을 하나 개발하면 이것은 국가이익에 굉장한 도움이 되고 그야말로 21세기에는 이런 공학의 도전을 해야 된다고 해서 그 연구원에서 100명의 과학자들을 확보하고 12년간 연구한 결과로 이런 성과가 났습니다.

  실수와 실패를 넘어서야

  홍창용 박사님이 그 물질을 개발하는데 304번째 실험만에 그것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신약개발은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미국의 FDA(식약안정청)에 승인을 받은 국가가 지구촌에 열 나라 밖에 없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작년 3월에 11번째 나라로 신약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2년 동안에 그들이 한 업적을 보니까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 기업이 수천억의 투자를 통해서 기어코라도 신약을 개발하겠다는 그 의지도 놀랍지만 이들이 식약청에 인가를 얻기까지의 그 과정은 실로 영화스토리보다 더 진지합니다. 그들이 실험을 한 번 하기 위해서 엄청난 준비를 하는데 303번까지 실패를 해도 계속해서 실험을 하다가 304번째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공식 기호명칭이 20304인데 이제 신약으로 나올 때는 ‘패티브’라는 이름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이 항생제가 기존항생제보다 몇십 배 효능이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계 의학계가 주목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일을 우리 과학자들이 해냈는데 8년 동안의 실험기간이 있었고 그것도 세계에 있는 모든 나라 사람들을 고루 뽑아서 2만명에게 임상실험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그것을 통과했는데 FDA에 제출했던 그 연구보고서가 빽빽한 글씨로 A4 용지로 십만장이나 된다고 합니다. 상상을 할 수 없는 그런 도전을 해서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들의 그 업적을 보면서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거듭했던 100명의 과학자들은 그것을 디디고 기어코 신약을 개발해 내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일생을 걸고 몰두했던 홍창용 박사님은 FDA의 승인소식을 듣고 병상에 있은 지 3개월 만에 숨을 거두어서 ‘한을 풀었다’ 라는 말씀을 했다고 합니다. 미친 듯이 몰두했다고 합니다. 그 가족들 이야기가 사생활도 없고 오직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신약을 개발하는데 투신했던 그들의 그 의지가 대단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과학자들의 이야기는 큰 감동을 줍니다. 그들은 실수를 극복했습니다. 실패를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기어코 해냈습니다.

  가인의 길

  오늘 성경에 우리 앞에 소개되는 이 주인공은 가인입니다. ‘가인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인의 갈등, 혹은 가인의 고민이란 뜻입니다. 이 가인 콤플렉스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가인은 성경에 소개된 데로 악인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한번도 좋은 사람으로 묘사하시지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은 가인을 악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인처럼 하지 말라”고. 그만큼 가인은 악인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가인을 존경도 하지 않고 가인을 배우지도 않고 가인을 증오하면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면 가인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가인을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의 길로 가고 잇는 것입니다. 가인은 실수한 사람이고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극복을 못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실수도 있고 실패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성격이 다릅니다. 실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결과입니다. 운동선수가 게임을 하면서 실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게임이 끝나고 저 버리면 그것은 게임의 실패입니다. 결과입니다. 과정에 나타나는 실수도 극복을 해야 되고 결과로 나타나는 실패도 극복을 해야 됩니다. 이 두 가지를 극복을 해야만 우리는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 실수를 극복하지 못했고 자기 실패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아벨 때문에

  동생 아벨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과 그 제사를 거부하셨습니다. 그 결과에 대하여 성경은 말합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라고 했습니다.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도 드려지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아벨의 제사를 받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이고,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 결과에 대하여 가인은 분노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분노했습니다. 안색이 변했습니다. 가인의 콤플렉스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가인의 콤플렉스를 분석해보면 아벨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제사가 왜 거부되었는지, 왜 하나님 앞에 내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그것을 살피지는 않고 아벨의 제사가 받아진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 콤플렉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우리 사회에 갈등이 많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러 나온 우리 모두에게 갈등이 있습니다. 고민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분석을 해보면 그 갈등의 뿌리가 나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고 남을 향하고 있습니다. 너 때문에, 사회구조 때문에, 정치를 잘못하기 때문에, 경제정책이 실패를 하고 있기 때문에, 불경기이기 때문에 모든 갈등의 초점이 남을 향하고 있습니다. 밖을 향하고 있습니다. 환경을 탓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 콤플렉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연말을 맞이하는 우리의 이런 분위기에서 여러분은 금년 한 해동안 가인 콤플렉스를 얼마나 극복하고 살아왔는가를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도 여러분 속에 혹 남이 들어와 있습니까? 눈을 감아도 떠오르고, 눈을 떠도 떠오르고, 밥을 먹어도 떠오르고 그렇게 나를 집착하고 있는 내 안에서 떠나지 않는 그 누군가 있습니까? 그것을 극복을 해야 됩니다. 남을 향한 가인의 콤플렉스는 해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가인은 지금 아벨을 향하여 분노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아우 아벨을 들판에서 쳐서 죽입니다. ‘너 때문에 내 제사가 거부되었다’고 하는 논리입니다. ‘네가 없었으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 할 것인데 너 때문에 하나님의 관심이 네게로 갔어. 나는 뭐냐?’ 하고 분풀이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정치이념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에 발린 구호가 ‘지난 날의 이 불행과 오늘 우리가 이렇게 고통 당하는 것은 남조선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남조선은 때려 부실 혁명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체사상입니다. 남조선 때문에 자기들이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조아 계층 때문에, 가진 자들 때문에, 부자들 때문에 우리가 못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들을 타도하는 것이 프로레타리아 혁명입니다. 나치는 슬라브 민족의 영광을 위해서, 게르만 민족의 영광을 위해서 600만명의 유대인을 죽였습니다. 유대인들 때문에 우리가 지금 안된다는 것입니다. 캄보디아의 폴포트 정권도 300백만명을 죽였습니다. 지성인들은 다 죽여야 된다고 해서 안경을 낀 사람, 손이 부드러운 사람을 전부 죽였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모든 문제의 탓을 바깥으로 합니다.

  성령의 검으로

  이것은 사탄의 전술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 그렇게 충돌을 하는 것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이 콤플렉스의 근원은 사탄이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7절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분노하고 있는 가인을 향하여 하나님이 말씀을 했습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다” 조금 실감있게 표현하면,  네가 지금 아우를 쳐서 죽이려고 속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네 안에 있는 그 분노를 다스리라, 네 콤플렉스를 다스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가 현실적인 교훈을 살펴보아야 됩니다.
  죄는 인간 안에서 죄성을 발휘합니다. 죄성이 발동하는 이것은 철저하게 영적입니다. 왜 세상 사람들이 죄를 이기지 못하느냐? 죄를 영적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실수와 실패와 범죄에 대하여 영적으로 접근을 해야 이깁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죄를 지어놓고 그것을 영적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게 그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철저하게 영적입니다. 죄를 다스리는 배후의 조종자가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귀가 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죄를 조종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 안에서 죄를 충동질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사탄의 교신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탄의 교신을 받는 죄성은 하나님의 교신을 받는 성령의 능력으로라야 이긴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는 우리 안의 사탄이 발동하는 죄성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는 확실한 근거는 이 사탄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이름은 사탄의 세력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인을 보고 네 안에 지금 죄가 발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 안에 있는 그 죄성을 이기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분노를 아벨에게 쏟아버리고 결국 아벨을 쳐서 죽이고 맙니다.

  하나님에 대한 항명

  하나님이 가인에게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때 가인이 했던 말,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반발하고 있습니다. 죄는 사람을 죽인 죄는 사람을 죽인 죄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목표입니다.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우리가 잘못되게 하는 게 사탄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고 하나님이 실패하도록 하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동생을 죽인 죄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듭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나는 동생을 알지 못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왜 거짓말하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내게 호소하느니라.”
  오늘 우리는 가인 콤플렉스를 다스릴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시기, 질투의 본질, 가인이 가졌던 그 갈등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동생이 은혜받고 복받는 것을 못봐주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원죄의 본성이 시기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시기, 질투는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을 다스릴 줄 모르면 결국은 사람을 죽이는 사태로까지 갑니다. 우리 사회의 살인사건은 갑자기 살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기, 질투가 해결이 안되고 갈등이 해소가 안되고 이것이 쌓이고 쌓이다가 결국은 살인으로 가는 것입니다. 가인 콤플렉스가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순수한 시기, 질투는 있어야 합니다. 남들이 잘되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는 감정은 있어야 됩니다. ‘아, 나도 저렇게 한 번 되어보아야 하겠다’ 그것은 순수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불순한 시기심들이 우리에게 너무 많습니다. 25평에 사는 사람이 그래도 밥 먹고 옷 입고 적당하게 살고 있는데 동창회에 가보니까 이 동창생은 48평 아파트로 이사갔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밥맛을 잃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못 살아서 갈등이 있는 게 아니고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자꾸 쳐다보니까 갈등이 일어납니다. 나도 어지간히 잘 사는데, 나도 어지간히 내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나보다 더 잘난 사람들이 많고 나보다 더 잘 사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우리 사회에 갈등이 지금 해소가 안됩니다. 그것을 봐주면 순수한데 그것을 못 봐줄 때 불순한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네 속에 죄가 발동하고 있다,

  죄를 다스리라

  그러나 그 죄는 다스리라, 이 죄가 행동화되기 전에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아벨을 쳐서 죽이는 행동화가 일어나 버리면 돌이키지 못합니다. 행동하기 전에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연말에 반성한다 우리가 쉽게 하지만 그야말로 열 한달 동안 해소하지 못하고 있던 내 삶의 콤플렉스를 깨끗하게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깨끗하게 청산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뼈를 깎는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죄를 버리지 못합니까? 손해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려면 손해볼 것을 손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손해보는 행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명예가 짓밟히는 행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명예가 짓밟히는 그것 때문에 행동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콤플렉스가 해결이 안되는 것입니다. 손해를 각오하십시오. 명예를 손해볼 것을 각오하십시오. 내 인간이 잡고 있는 그 끈을 잃어버려야 콤플렉스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 구질구질한 끈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콤플렉스를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근대 골프사에서 성공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놀드 파마와 잭 니콜라우스는 전설적인 골퍼입니다. 이들은 부와 명예를 차지한 골퍼재벌입니다. 아놀드 파마가 25살 때 오하이오주에서 세계대회 우승을 했습니다. 그때 14살 짜리 잭 니콜라우스라는 소년이 파머가 우승하는 그 장면을 현장에서 본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도 파머같은 선수가 되겠다. 그리고 내가 저 사람을 이겨야 되겠다’라는 희망을 가진 것입니다. 1960년에 같이 출전을 했습니다. 아놀드 파머가 1등, 잭 니콜라우스가 2등을 했습니다. 그 이후로 어떤 대회는 파머가, 어떤 대회는 니콜라우스가 우승을 하고 이 두 사람이 완전한 라이벌이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 때문에 골프계가 열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은퇴했습니다. 1992년 파머가 62세, 니콜라우스가 51세 때 우정의 대결이라 해서 그 두 사람을 시합을 시켰습니다. 세계가 주목하는 스포츠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세기의 라이벌인데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당신들 우정은 각별한데 무슨 비결이 있습니까?” 그때 그들이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적수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가 있기에 내가 더 열심히 하고, 내가 있기에 저가 열심히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경쟁자로 시기한 게 아니라 서로 도왔습니다. 우리는 조력자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여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가인 콤플렉스는 역사적인 과제입니다. 정당에, 기업에, 교육계에, 우리 가정에, 우리들의 인간관계 모든 분야에 가인 콤플렉스는 다 있습니다. 그러나 있다는 것은 결코 문제가 아닙니다. 콤플렉스는 다스리면 더 좋은 결과를 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주목하십니까? 성경을 보면 정말 우리가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6장 24절 이하에 보면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복 받을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은혜받을 대상으로 봅니다. 세 번째,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평강받을 대상으로 보십니다.

  맺는 말

  우리는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도 누군가를 향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주목합니다. 나를 복받을 대상으로, 은혜받을 대상으로, 평강받을 대상으로 주목하십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콤플렉스라는 그릇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 복은 구하면서도 우리 그릇은 콤플렉스 그릇이란 말입니다. 은혜는 구하면서도 우리 안에 콤플렉스는 해소가 되지 않고 있는 이런 모순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은혜 부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평강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콤플렉스를 극복해야 됩니다. 우리 그릇을 준비해야 됩니다. 여호와의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 은혜를 담을 수 있는 그릇, 평강을 담을 수 있는 그릇,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주목하는데도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도 자꾸 남을 주목하고 환경을 주목하고 타자를 주목하고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주목하는 이 시간에 우리 자신들은 그를 향하여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눈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시선, 삶의 시선을 타자로부터 내 자신에게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가인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복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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