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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해산하는 수고 (갈 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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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하는 수고 
갈라디아서 4:12-20

신앙생활에 열심히 하던 어떤 집사님이 공장을 세 개나 짓더니 사업에 바빠 교회와 멀어졌으므로 심방하셨던 목사님이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김집사님이 너무 바빠서 주일예배에도 참석 못합니다. 신앙생활에 불편함 없도록 공장 두 개는 불태워 주옵소서!”
깜짝 놀란 집사님! 두 손을 가로젓던 그 집사님이 다음 주일예배에 참석했음은 물론입니다. 하나님보다 공장에 불나는 것이 훨씬 더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속으로는 내가 왜 그 교회에 나갔는지 모르겠다고 후회도 하고, 마음으로 얼마나 그 목사가 꼴 보기 싫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오늘 바울은 과거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바울에게는 육체의 약함이 있었습니다. 전도자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안질, 간질병, 말라리아의 후유증 등 무엇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본인도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마음의 시험을 받을만한 것입니다. 제병도 못 고치면서--- 사도가 뭐 저래! 복음이 믿을만 한가? 외모도 그렇게 출중하지 못해! 말도 잘 못해! 바울 스스로도 고백하기를 ‘말에는 졸하나---’ 하는 말을 들어보면 달변가도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이 시험들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무시하지 않고, 업신여기지 않고 오히려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대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을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할 수 있으면 눈이라도 빼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사랑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사도, 종이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라는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사도도 성도들도 얼마나 행복했을까? 영적인 행복감은 목회자와 성도가 일치감을 갖게 될 때가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의 외모를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연약한 육체 안에서 빛나고 있는 복음의 능력을 보았고 또 자기들의 존귀함을 되찾게 해준 이 복음 전도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이 떠난 이후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이 지속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갈라디아 교인들과 바울의 관계가 대단히 악화된 상태에 있습니다. 어떻게 살든지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라면 그저 좋은 관계였을텐데 바울이 그들을 염려해서 무슨 말을 한 것이 그들의 심사를 틀어지게 해서 아주 나쁜 관계가 되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어떤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 가끔 우리 태은교회 홈페이지에 가보십시오. 재미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올린 글에서 읽었습니다.

교회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날 공과공부 제목은 ‘하늘나라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여러분, 내가 만일 집을 팔아 몽땅 교회에 헌금한다면 천당에 갈 수 있겠죠?”라고 묻자 아이들은 일제히 “아뇨”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선생님은 “그러면 내가 매일 교회 청소를 하고 유리창을 닦는다면 천당에 갈 수 있겠죠?”라고 하자 이번에도 아이들은 일제히 “아뇨”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다섯 살 먹은 사내 녀석이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선생님이 죽어야 돼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래 목사가 죽어야 되는 일이 많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가 바울이 양보하고, 이해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믿음의 본질에 관한 일입니다. 신앙의 원리에 대한 문제입니다.
처음 느꼈던 아름다운 감사가 왜 없어졌습니까? 복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가짜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유치한 복음의 영역이 아닌 현대감각에 맞는 믿음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평생 예수 믿어 교회에서 헌신함으로 큰 교회에서 장로가 된지도 13년이 되었는데, 그분이 고백하는 말이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잘 몰랐다!’는 겁니다. 그냥 어려서부터 착하고 살고, 정직하고, 교회 열심히 잘 나가니까 그것이 신앙인줄 알았는데 또 그런 나를 참 훌륭한 신앙이라며 장로로 세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전 예수의 보혈이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이제야 분명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수십 년 예수 믿으면서도 착하게 살기만 하면 되지--- 라고 생각하며 예배드리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신앙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일성수, 십일조, 일년에 한명 전도!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정말 감당해야할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제가 중,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교회에서 심각하게 생각한 것이 주일날 시장에 가서 돈을 쓴다는 것에 큰 죄책감을 갖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런 일들로 죄책감을 갖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러면 예수 믿는 본질이 무엇입니까? 
오늘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교훈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교훈입니다. 이단이라고 할 만큼 본질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일대일양육에 입학하였습니다. 양육자도 동반자도 명확하게 16주동안에 복음을 알아야 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무엇이 근본입니까?

1)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이 신이라면 인정하기가 쉽겠는데 동정녀 탄생을 믿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빼놓고 믿으려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지 못하면 이단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문제도 중요합니다. 이 둘을 하나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신적인 모습을 믿지 못하면 안되고, 완전한 인간으로서 십자가의 보혈의 대속이 없어서도 안됩니다.

3) 예수님이 육체로 부활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영적인 부활이 아닙니다.
4) 재림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에 대해 유보적이고 일부분만 인정하면 이단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케리그마이고, 복음의 근본입니다.

참 교훈을 들어야 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들었던 계시의 말씀을 한번도 본적이 없고 통성명한 적도 없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를 만나보니 다 같은 말씀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성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목사의 설교를 듣고 목사가 참 얘기 잘한다고 생각지 않고,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이 계시성입니다.

또한 사도성이 중요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주일 예배가 다 연결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이 고향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전혀 다릅니까? 아닙니다. 같습니다. 어느 교회가든지 같은 복음이어야 합니다. 즉, 사도성이란 복음의 동질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 혼자서만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특별한 말을 들었다면 가짜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오늘 갈라디아 교인들은 비 진리에 미혹되었습니다. 다른 복음이 들어왔기에 신앙의 동질성이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원수가 된 겁니다. 신앙이 달라지면 같이 할 수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에 아무리 성공적이라 할지라도, 열심을 낸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돌이키라!
믿음으로 이전에 가졌던 관계를 회복하자는 겁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다시 하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변질에서 회복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바울에게 간절합니다.

성도여러분!
지금은 어지러운 시대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 선명하지 못합니다. 이때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야 할 때입니다.
오늘 바울은 다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자고 말합니다. 사랑의 관계는 교제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성숙해집니다. 교제가 없는 사랑의 관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제가 멀어지면 관계는 소원해지고 결국에는 깨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복음으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뽀뽀 - “그만해요, 나좀 내버려둬요!” 왜 아이가 아버지를 거부할까?
“왜 아빠는 싫다는데 귀찮게 해요? 술먹고 수염으로 비비면 얼마나 아픈지 아세요?”
아빠는 생각합니다. 내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싫다고 말할까?
왜 이럴까?
사랑의 채널이 다르니까. 아이가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모든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원합니다. 정서적인 안정감을 갖기를 원합니다. 부모된 여러분이 그것을 깨닫게 될 때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랍니다.
부모의 눈길을 피하려하는 아이는 이미 정서적으로 걱정스러운 상태입니다.
사랑의 기본은 마주 보는 것입니다. 눈동자를 마주쳐야 합니다. 눈길은 교제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의 눈길이 쌓여질 때 행복한 아이로 자라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신다면 주님과 눈길을 마주치는 시간이 많아져야 합니다. 왜 자꾸 하나님의 눈길을 피하십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십니까? 왜 들으려 하지 않으시지요?

성도의 신앙 성장단계는 다섯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주는 말씀만 받아먹는 단계입니다. 전적으로 목사에게 의존하는 단계이므로 양육과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적 성장의 필요성과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지 않는 단계입니다.

2) 주는 말씀만 받아먹는 것에 부족함을 느끼는 단계입니다. 목사의 가르침을 의존하면서도 영적 성장의 필요성과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3) 주는 말씀도 받아먹고 자신도 말씀을 먹는 단계입니다. 목사의 가르침을 부분적으로 의지하면서 영적성장의 필요성과 개인적인 책임을 인정하는 단계입니다. QT도 노력해 봅니다.

4) 자신이 말씀을 먹는 단계입니다. 목사에게 배운 원리를 자신의 원리로 만드는 단계입니다. 성경읽기와 묵상을 통해서 영적 필요의 대부분을 채우며,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의 필요성과 책임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볼 줄 압니다. 눈에 들어옵니다.

5)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먹이는 단계입니다. 이제는 교사로서, 사역자로서 누군가의 격려자 역할을 하는 단계입니다. 스스로 신앙을 정리하고 개혁하며,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른 사람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엡4:13-“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이 때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믿음이 장성하여서 태은교회의 평신도 동역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아직 자라나지 않은 상태에서 동역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더 배워야 하고 자신을 부인하는 법을 더 익혀야 합니다.
자기 기분에 이끌리는 헌신은 본인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결코 좋지 않습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날마다 성령으로 새로워지며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 태은교회를 위해 말씀에 굳게 서서 해산하는 수고를 할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편안하게 예수 믿으려하지 마십시오. 뜨거운 열정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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