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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의 소망 (골 1: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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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24-27
영광의 소망

사람은 소망,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내일을 바라보고, 꿈과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소망은 우리 삶의 원동력이요, 어려움을 극복하는 활력소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생명의 비타민입니다.

신곡이라는 문학 작품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지옥 입구에 가보니, 거기 푯말이 붙어 있는데, “이리로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야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옥은 소망이 없는 곳이란 말입니다. 아무런 미래도 꿈도 희망도 없는 곳이 곧 지옥입니다.

우리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사는 것은 내일을 향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입시를 앞에 두고 자신과의 싸움을 싸우는 수험생은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몸이 약해도 걷고 뛰고 달리면서 운동하는 것은 건강한 내일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사람은 소망 속에 사는 존재이기에 내일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소망 속에 사는 존재입니다만, 그가 무엇을 소망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존재와 의미가 달라집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이들의 본질적인 소망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두는 소망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사실 돌이켜 보면 어느 정치가 선했으며, 어떤 제도가 사람의 소망을 만족시켜 주었습니까? 경제가 이만하면 되었다고 만족을 줄 때가 언제 있었으며, 과연 교육이 인간을 인간되게 만들었습니까? 의학이 발달한다고 해서 죽지 않게 될 것 같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행복하겠습니까? 과학의 발달이 우리 생활에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인류에게 참 행복과 평화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27절 말씀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의 비밀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영광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류의 참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십니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우리가 고난 중에 의지할 주님이시기에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십니다. 사실 이 소망이란 역설적입니다. 돈이 많을 때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사가 잘 될 때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하고 넉넉한 사람이 소망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경 속에서, 고난 속에서 몸부림 칠 때, 그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강한 소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차대전 당시 독일 포로수용소에 있던 맥도날드 목사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동료 한 사람이 전기 기술자래서 라디오를 조립해서 영국 BBC 방송을 몰래 듣고는 전쟁 상황을 수용소 안에 전달합니다.

어느 날 새벽 단잠을 자는데 그 친구가 흔들어 깨웁니다. “여보게, 그들이 왔어.” 드디어 연합군이 노르만디 상륙 작전에 성공했다는 소식입니다. 그들이 왔다는 희망의 소식, 그 기쁨의 소식은 금방 수용소 안에 퍼졌습니다. 포로들은 너무나 기뻐서 마당으로 나가서 춤을 추면서 그들이 왔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연합군 상륙 소식을 모르는 독일 감시병은 총구를 겨누고 이들이 이상해졌다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포로들에게 어떤 상황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벽은 여전히 높았습니다. 철조망도 여전히 3중으로 둘러 처져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기관총도 예전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갇혀서 고통 받는 포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제 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눈으로는 보지 못할지라도 아군이 전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니, 희망이 솟고 기쁨이 넘쳤던 것입니다. 사람은 소망만으로도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시 가운데 도종환이란 시인이 쓴 담쟁이라는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아 여기 소개합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얼마나 귀한 시인지 모르겠습니다. 말없는 자연이 우리에게 절망을 뛰어넘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데, 오늘 우리가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려서는 안 될 일인 줄 믿습니다. 더욱이 주님을 바라보며 신앙 안에 사는 우리들이 이 자리에 머물며 절망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일제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애국지사가 일경에게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어둡고 음습한 지하 감옥에 갇혀서 이제 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떨리고 두렵고 긴장되겠습니까?

아, 바로 이때가 내가 기도할 때구나, 이 분은 이런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서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뭐라 기도해야 하는가? 주여, 나를 이곳에서 내보내 주소서, 이렇게 기도하려 하니, 이 감옥에서 나가는 길은 동료들에 대한 정보를 다 불면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내보내 주십시오 라고 기도는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불현 듯 떠오르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은 임마누엘이라 하셨죠?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죠? 그러면 지금 이 지하 감옥에도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주세요. 그러면 제가 이 고난을 얼마든지 이겨 나갈 수 있겠나이다.

이렇게 기도를 드리고 일어나니 기운이 솟았습니다. 마음이 담대해 졌습니다. 그래서 그 두렵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임마누엘 주님을 의지하면서 이겨 나갔다는 고백입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난 중에도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 볼 때에 우리는 산 소망 중에 때로 만나는 고난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이 귀한 소망으로 오늘의 문제, 역경, 고난을 이겨 나가시는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인이시기에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성경을 보니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이 죽음의 그늘 속에 살아왔고, 우리의 21세기 최대 과제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생명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 오늘날 사람들은 생명의 존엄과 가치를 가볍게 여기고, 생태계까지 파괴함으로, 모든 지구상의 생물들이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사랑하신 그 뜻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의 뜻을 행할 때에 참 소망이 있게 되는 줄 믿습니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평화의 주님이시기에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는 어찌 보면 전쟁의 역사요 서로 죽고 죽이는 역사였습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아직 이 지구상에는 참 평화가 없습니다. 학자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9천 번이나 되는 평화 회담이 있었고, 예수님 오시고 난 이후에도 1만 번 이상이 되는 회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류는 아직 평화를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인류는 외교적인 수단이나 정치적인 방법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노력했지만, 모든 사람이 간절히 원하는 평화는 누리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앞으로도 참 평화를 이 땅에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 땅에 평화가 없는 것이 인간의 죄와 욕심과 이기심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 본질을 해결하지 않는 한 참다운 평화가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참 평안을 주시고 이 세상에 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함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어떤 한 사람이 그만 실수로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복역 중에 그는 이를 갈았습니다. “나를 체포한 형사 놈들, 나가면 죽이고 말겠다.” 이윽고 감옥을 나왔습니다. 집에 가보니 아내는 이미 도망을 갔고, 어린 자식 둘만 남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제 사람을 죽이고 다시 감옥으로 가겠지만, 이 아이들만은 신앙 안에서 깨끗하게 자라도록 하겠다.” 그래서 아이 둘을 데리고 교회로 갔습니다. 마침 부흥회 중이었고, 참석한 이 사람은 놀랍게도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 평안을 주십니다.” 이 말에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회개하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나는 오늘밤 사람을 죽이려고 칼을 품고 나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듣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제는 새롭게 살겠습니다. 칼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의 간증에 모든 이들이 크게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자, 과연 우리는 얼마동안이나 마음에 칼을 품고 다닐 것입니까?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미워하겠습니까? 이젠 옛사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환경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해서, 내가 오해를 받아서, 저 사람이 악해서 라고 변명을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달라져야 하고, 환경이 달라져야 하고, 저 사람만 없으면 하고 또 한번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러나 환경이 몇 번씩 바뀌어도 사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바로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회복하기 전에는 사람이 본질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21세기 우리 민족의 최대의 과제인 통일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통일이란 정치적 통일, 경제적 통일이 이루어 진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과 북의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 가능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에베소서 2장 14절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는 평화의 주인이시기에 우리의, 우리 민족의 영원한 산 소망이 되시는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의 주인이시기에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얼마 전 신학을 같이 공부하신 목사님이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워하며 위로하는 동기 목사님들에게 이분은 이런 말을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서 처음에 얼마 못산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교회에 대한 생각, 가정에 대한 생각, 명예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 속이 복잡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동안 열심히 목회를 해 왔지만, 진정 주님을 위해서 목회를 한 것인가, 아니면 저 목사는 이렇게 열심히 일했다는 남의 칭찬과 이목을 의식해서 목회를 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오만가지 미련을 끊어버리지 못한 채 애를 썼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동안 고민하다가, 그는 어차피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아직 못 다 이룬 소원, 그 온갖 욕망을 다 포기하고 한 단계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랑의 넓은 가슴을 활짝 여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야,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리라” 말씀하시는 모습을 환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마음이 이토록 깨끗할 수가 없습니다. 이토록 자유롭고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땅의 소원을 다 끊어버리는 순간에 하늘의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에게는 궁극적 소망이 없습니다. 결국 죄인에게는 절망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천국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우리들에게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궁극적 소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허무주의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허무의 세력에 굴복해 오늘 우리의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종교가 아닙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알기에 더 가치 있고 더 고귀한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현세를 위해 가장 많이 일한 이들은 내세를 가장 많이 생각한 이들이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영원과 이어지는 소망이 있습니다. 궁극적 소망이 있습니다. 영광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은 바로 인류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고, 믿고, 따르고, 소망하는 한 오늘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이 소망 속에 내일을 바라보고, 오늘을 일으켜 세우는 성도의 복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첫 번째 주일에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더욱 사랑함으로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주일에는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간구하는 제자들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을 굳게 세워 나감으로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제 이 세 번째 주일에는 내 자신과 인류와 온 우주의 참 소망이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주님의 탄생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진정 이 땅에 평화의 왕이요, 생명의 주인이요, 하늘의 참 소망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2003년 성탄을 준비하시는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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