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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나 죽으나 사랑 (롬 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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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4:1-12 / 사나 죽으나 사랑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예)

술을 먹는 것이 믿는 자로서 좋을것이 없을줄 알고 술을 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술을 마시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너무 심하게 받다 보니 과연 앞으로 교회를 더 다녀야 할지까지 고심하게 된것입니다. 이런 분을 만나면 뭐라고 말씀해주시겠습니까?

1) 포기하지 말고 술끊도록 최선을 다하세요. 성도가 술하나 못끊어서야 되겠습니까
2) 술끊지 말고 그냥 드시고 싶으면 맘껏 드세요
3) 아무리 술끊어도 술마시고 싶은 마음까지 끊어내지는 못합니다. 그런 죄인을 우리 예수님이 받아 주신겁니다.

이분이 술마신 것이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술 끊었다는 것이 성도의 믿음의 표식이 되고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술 못끊었다는 것이 믿음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없습니다. 외모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것을 내가 누구관대 판단하고 무시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롬 11:29).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 대해서 용납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란 이런 자들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에 따라서 자기 믿음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는 자입니다.

먹는 것도 어떤 것은 먹어서는 안되는 음식으로, 또 어떤 것은 먹어도 되는 음식으로, 또 어떤 날을 더 중요하게, 덜 중요하게 다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손없는 날을 찾아서 이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잔칫날을 길일을 골라서 해야 한다는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불상을 놓던 습관이 있던 분들은 그 자리에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라도 붙여놔야 마음이 편한분들도 있습니다. 절간에 새벽마다 예불을 드리러 가던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새벽기도를 꼭 나와야 맘이 편합니다. 새벽기도회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행시킨 것입니다. 그런식으로 자기 몸에 배어 있는 습관대로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해서 못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 부적을 떼어낼때 그냥 북 뜯어 내지 못하고 혹시 귀신이라도 올까봐서 목사님 모셔놓고 예배라도 드린 뒤에야 부적을 뜯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럴수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자라는 것은 반드시 어떤 대상이 정해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언제라도 믿음이 연약한 자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자라고 판단할 명확한 기준이 정해져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주일성수는 기본적인 믿음이고 십일조를 하면 더 나은 믿음이고 새벽기도회를 나오면 더욱 강한 믿음이고 아예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면 제일 강한 믿음이고 아예 교회에서 지내는 목사는 제일 강한 믿음이라는 식은 맞지 않습니다.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은 그런식으로 외모를 취하는 것으로 믿음을 따지는 율법적인 경향을 일컫는 것입니다. 내가 뭘 지키고 말고 하는 것으로 믿음이 달라진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술끊으면 좋은 믿음, 담배끊으면 좋은 믿음. 아직도 담배피우면 연약한 믿음, 술마시면 연약한 믿음, 이런식으로 외모로 믿음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4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5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6 우리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자도 없도다7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목사가 성도를 세우지 못합니다. 목사가 세워서 세워지면 성도가 아닙니다. 목사가 세우려고 했다면 반드시 넘어져 버려야 합니다. 누군가 어떤 인간이 세우려고 했으면 반드시 실패해야 맞습니다. 예수님이 세우시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서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선자는 자기를 세우신 분이 오직 예수님이라는 주장이 나올때 제대로 믿은 것입니다.

교회가운데 예수님의 돌보심이 미치지 못하는 구석은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돌보심이 미치지 못한다면 이미 예수님께 붙은 한몸이 아닙니다. 접붙임을 받은 가지는 원가지들보다 더욱 절실하게 압니다. 뿌리로부터 진액을 받아 사는 것입니다. 접붙임을 피차 입었으면서 원래부터 붙어 있었던같이 한다든지 혹은 저절로 자란것같이 하면 뿌리의 수고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실적이나 결과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중심을 보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인간이 통째로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께 드려진 몸인지를 봅니다.

믿음이 연약한자를 교회가운데 내시는 환경조차 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맞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것을 탓하게 비판해버리면 믿음의 본질이 흐려져 버립니다. 정작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이 엄연히 있거늘 그 사랑이 아니라 자꾸만 인간의 행위가 기준되고 표준되는 쪽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세우게 됩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자랑하고 쳐다보게 만들어 버립니다.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에 더욱 의지하자는 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그냥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그 부활의 능력으로 여전히 교회를 돌보시사 용납하시고 이끄시는 그 능력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을 해도 예수님 십자가의 의의를 훼손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그 정신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입니다. 뭘 해도, 무슨 생각을 해도, 무슨 일을 의논해도, 항상 그 중심에는 십자가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돌보심이 아닙니다. 결과에 치중하고 외모에 치중하는 것은 십자가의 정신이 아니라 세상풍조입니다. 육체의 정욕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교회가운데 부어지고 있는 예수님의 사랑을 훼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사랑만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는 유일한 믿음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14:10-12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없신 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10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11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2

어떤 목사님은 예수님은 돌보시고 돌봄을 받는 모습을 청룡열차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끄는 대로 이끌려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뒤에 목사칸, 그 뒤에 집사칸 식으로 매달린 기차는 아니고 예수님에 달린 칸이 한칸 밖에 없어서 그 뒤에 모든 성도들이 다 한꺼번에 타고 있습니다. 이 열차가 은혜의 열차이니 모두 같은 은혜안에 이끌려서 달려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앞에서 끌어 주시는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목사가 뒤에서 미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들이 뒤에서 미는 것 아닙니다. 그냥 모두 한칸에 탔는데 그 칸에는 아무런 에너지도 없습니다. 그냥 끄는 대로 이끌려 갈 뿐입니다. 그러니 피차 한칸에 타서 이끌려 가는 처지에 네 믿음이 어쩌니 네 믿음이 저쩌니 그런 비판을 할수 없는 처지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경험이나 판단을 심판의 기준으로 내세울수 없습니다. 심판자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이며 그 기준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거부하면 심판이요 그 사랑을 입으면 구원입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이만한 믿음 못보았다고 한 백부장의 믿음이 무엇이었습니까?(마 8장)

예수님의 일하심만으로 말씀이 그대로 됩니다 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하심이 놀랍습니다 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분입니다 하는 것을 증거한 것이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믿었습니다가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병든 하인이나 백부장 자신이나 사랑받아야 할 처지는 같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내 하인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나도 받아야 할 처지이니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이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이만한 믿음”이란 작대기처럼 긴 것 짧은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줄때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물론 예수님이 내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예수님 아니면 안되는 것입니다(고전 12:3)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 낫게 하는 기적을 일으킨 후에 믿음이 뭔지를 밝힙니다(행 4장). 성전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거지나 일어나 걸으라고 명했던 베드로나 다 예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는 일로는 다를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다가 구원받은 저 앉은뱅이 거지나 그 거지를 향하여 일어나 걸으라고 명한 자기자신이나 예수님의 사랑을 받기는 매 한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시는 능력으로 전도하고 예수님께서 내시는 능력으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하십니다.

사도행전 4:8-12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8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9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12

교회는 피차 비판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들이요 피차 업신여기는 자가 아니라 용서받는 자들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그런 모습을 체육관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체육관에 들어와 있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어느때 딴 생각하고 적응이 잘 안되어서 헤갈릴수도 있겠지만 결국 한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처지에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우유통에 파리가 푹 빠진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여러 똥파리가 한 우유통에 빠졌으니 지금 자기 믿음 좋은 것 자랑할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 비유가 지나칩니까? 예수님 높이는 것이라면 우리가 똥이 되면 어떻고 퇴비가 되면 어떻습니까? 예수 안에 있는데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남얘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인 것으로 들려옵니다. 그래서 죄를 싫어하게 되고 죄를 사해주신 은혜도 알게 됩니다. 은혜받은 자 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살면 살수록,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살면서 그 무엇도 죄아닌 것이 없는 것을 알아갑니다.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으로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 본질이 죄인됨을 인정하면서 나같은 죄인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은혜의 은혜됨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롬 7:24-8:1).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자기 육체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 하신 일만 자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르심을 입은자들 가운데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하십니다(롬 8:28). 성도들 가운데는 이런분도 계시고 저런분도 계십니다. 이런 일도 저런일도 일어납니다. 다 로봇처럼 기계처럼 사는게 아닙니다.  각각 은사를 주셔서 일하시는 주님을 제일 우습게 여기고 모욕주는 모임이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만 오면 사람을 기계처럼 만들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다 자기처럼 믿어야 하도 다 자기처럼 살아야 하는 식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의 불신앙에서 비롯되는 일이고 교회를 자기 사적인 조직으로 만들어서 주인 노릇하려는 데서 비롯되는 일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말하면 ‘사람이 로봇같은 기계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하는 짓은 결국 다 똑같은 기계가 되려고 발버둥 치는 꼴입니다. 꼭, 공산당같아요. 공산당이 뭐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붉은 완장차고 자기 인생살이 한풀이 하려고 설쳐대는 꼴입니다.

성도는 기계가 아닙니다. 주님의 큰 자비를 힘입어서 살아가는 인격입니다. 별별 죄악이 다 일어나도 그 상황속에서 율법의 완성이신 사랑이 나타나도록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큰 일을 높이고 증거하게 하십니다. 사나 죽으나 그렇게 살고 그렇게 죽도록 인도함을 받습니다. 믿음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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