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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 슥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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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성경말씀 : 스가랴 4:6

스가랴는 주전 520년경에 활동했던 선지자로서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을 격려해서 중단된 성전 건축을 완공케 했습니다. 그 당시 귀환한 유대인들은 불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시작했으나 주변에 사는 이방인들의 방해 공작에 힘을 잃고 무려 14년 동안이나 성전 공사를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여러 가지 피치 못할 이유를 나열했습니다. 총독 스룹바벨은 주저앉은 백성을 독려해서 공사를 계속하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보내셔서 스룹바벨에게 본문 말씀으로 격려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 사람의 힘과 능으로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될 수 있었듯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힘과 능으로 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되는 것입니다.


첫 번 째로, 구원은 오직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한평생 살면서 할 일이 참 많습니다. 공부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자녀 양육도 해야 하고, 부모 공양도 해야 하고, 친구도 사귀어야 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보다 우선해서 관심을 갖고 해결해야 할 일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누구나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길 줄 압니다. 일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건물더미에 매몰된 사람들을 찾느라고 구조대원들이 여러 날 동안 수고했고, 온 국민이 자기 일처럼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습니다. 한 사람씩 구조될 때마다 손뼉을 치면서 기뻐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목숨이 그처럼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 8:)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유물론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하면서 살아생전에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마는 그것은 사람의 본질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이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성이 있기에 사람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반면에 짐승들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발전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유물론자들은 이와 같은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만 인간은 뇌 구조가 탁월하게 진화한 결과라고만 말합니다.

사람의 본질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 곧 산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생기는 단지 호흡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 생기가 호흡만을 의미한다면 죽어가는 사람에게 산소를 공급해서 얼마든지 목숨을 연장시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생사는 그 영혼에게 달려 있습니다.

성경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서 2장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몸이 죽더라도 영혼만으로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진정한 우리 자신이므로 몸이 죽어도 우리는 독립된 인격체로서 존재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되어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 보면, 부자는 죽어 음부 불속에 떨어졌고 나사로는 죽자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 곧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그러나 부자의 요청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자는 말하기를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청도 거절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말하기를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하였지만, 아브라함은 대답하기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은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정상적으로 느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 몸은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죽은 몸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그 날,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의인은 영생에, 악인은 영벌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의인은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산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의롭게 된 사람을 말합니다. 같은 이치로 예수 믿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착한 행실을 많이 했더라도 악인으로 분류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롬 3:20).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같이 말씀합니다.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5-16)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은 분명히 축복된 일입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섬겨왔고 메시야를 갈망해 왔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구원과 관련해서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것 같으나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을 생각을 갖게 하신 이가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신 고린도전서 12장 3절 말씀이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전도를 받으면 ‘나도 예수님을 믿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육이나 성격이나 생활환경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가서 어느 안식일에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 있는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주 옷감 장사를 하는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에는 이같이 증언합니다. “14)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5)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여러 사람이 전도를 받았으나 오직 루디아만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도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족이 있으십니까? 기회가 닿는 대로 열심히 주님을 전하시되, 지속적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 저들의 마음을 열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할 때 성령님께서 불신 가족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영접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성령님께서 이 첨단과 광주 일원에 거하는 수많은 불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우리 교회를 사용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두 번 째로,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감화를 받아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한 동안 갓난아이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게 됩니다. 설교를 들어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때로는 믿은 지 십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신앙의 초보를 면치 못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 예수 믿는 것이 분명한데, 또 어떻게 보면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다른 신자들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를 보아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고린도교회는 그리스의 고린도라는 도시에 있었던 교회로서 사도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 중에 세웠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는 타락한 이교 문화가 지배하던 도시였으므로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지켜나가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더구나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은 오랫동안 우상숭배와 타락한 습관에 젖어 살던 이방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기독교인이 되고나서도 지난날의 폐습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로 문제가 생기기도 했고, 성적인 범죄가 드러나기도 했으며, 파당을 짓고 다투는 일도 생겨났습니다.

이 교회에는 그리스도인 같기도 하고 불신자 같기도 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 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같이 썼습니다. “1)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2)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

비록 고린도 교회가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많은 문제를 갖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였으며,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사도는 그들을 향하여 “1)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라고 책망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되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고 귀여워합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아이들이 없고 어른들만 있다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그러나 여러분, 나이가 들어도 철이 들지 않고 늘 어린아이 노릇만 한다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지금 사도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한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이와 같은 부조화는 지난날 고린도교회 뿐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들 역시 안고 있는 문제점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치고 성숙한 성도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갖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주님을 열심히 섬겨야지” “주일 성수를 반드시 해야지” “나도 봉사해야지” 결심합니다. 그러나 작심삼일이라고 어느새 옛 상태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다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게 되어 “나는 할 수 없어” 라고 자포자기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면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과 같은 분도 한 때는 자신의 무능에 대하여 절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는 탄식하기를 “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무슨 좋은 방도가 없는 것일까요? 은혜롭고 활기찬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하신 대로,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때 우리는 모든 연약함과 침체를 벗어나서 창공을 날아오르는 젊은 독수리같이 생명력이 넘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삼년이 넘도록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았고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시험이 닥치자 여지없이 쓰러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심문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절망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신앙을 고백했던 시몬 베드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셔서 당신이 살아나신 것을 보여주셨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숨어지냈습니다.

부활 후 40일 되던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감람산에 모였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묻기를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시고는 저희 보는 데서 승천하셨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 질문은 그 때까지 제자들이 주님의 뜻을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관심을 가질 것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해답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확실하게 나와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제자들과 성도들 도합 120여명이 마가 요한의 다락에 올라가서 마음을 같이하여 주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에 보니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기도 제목은 오직 하나, 약속하신 성령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들이 기도를 시작한 지 열흘째 되던 날, 드디어 그들 위에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행전 2장에는 이같이 증언합니다.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 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케 된 제자들과 성도들은 더 이상 유대인들을 두려워 떠는 나약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순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여온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날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성령 받은 사도들과 성도들에 의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전파되었으며 드디어는 로마 세계 전역에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도들과 초대교회 당시에 활약했던 성도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핍박을 겁냈으며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으며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나자 두려움을 모르는 담대한 복음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그의 자녀들에게 성령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성령 받기 위해 고행을 해야 한다거나 무슨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성령 받기 위해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하)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성령을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이미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와 계시는데 우리는 이를 성령의 내주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세례는 다른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거듭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위한 것입니다. 거듭남은 우리가 거듭나고 싶다고 거듭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거듭난 성도들이 구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열심히 기도하여 모두 다 성령 세례를 받아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 째로, 교회에 부흥을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목회자치고 교회의 부흥을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속한 교회가 부흥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 마다 전도에 힘쓰고, 제자 훈련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서 시행합니다. 어떤 교회는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사람을 불러다가 간증 집회를 하는가 하면, 기독교인 가수나 탈렌트를 초청해서 집회를 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슨 흥미로운 프로그램이나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광고로 인해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부산의 어느 교회는 토요일 저녁마다 팝 가수들을 불러다가 공연을 하는데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든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교인수가 많아졌습니다. 단지 사람을 모은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괄목할만한 부흥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성경이 말씀하는 부흥일까 하는 데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벳세다 해변에서 기적의 떡을 얻어먹은 사람이 장정만 5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합치면 2만명이 넘을 것입니다. 요즘은 워낙 인구가 많다보니 무슨 공연이나 정치 행사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만 2천년 전에는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라는 미국의 과학자는 주전 1세기에 시저가 로마를 다스릴 적에 세계 인구는 약 1억 5천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손바닥만한 팔레스틴에서 그것도 갈릴리 해변에 2만명이 모였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단지 호기심으로 또는 떡을 얻어먹기 위해 온 사람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가를 가지고 성공, 실패를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아무개 정치인의 유세장에 몇 명이 모였는가, 아무개 가수가 공연을 하는데 관객이 얼마나 모였는가, 어느 대학에 신입생이 얼마나 지원했는가, 이런 일에는 물론 수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일에 모이는 신자가 몇 명인가를 가지고 그 교회가 성공했다, 또는 실패했다고 평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거듭난 신자가 얼마나 되느냐,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얼마나 되는가가 중요합니다.

대홍수 당시에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 구원 받은 사람은 노아를 포함해서 겨우 여덟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하늘로서 내린 불과 유황에 의해 소돔, 고모라 성이 불탈 적에 건짐 받은 사람은 롯을 포함해서 겨우 네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사람 수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수를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수적으로도 부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수적인 부흥은 반드시 질적인 부흥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께서 교회의 부흥을 주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2장 12절로 13절에는 “12)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은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거듭난 성도라야 주님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될 수 있다고 할 때, 교회의 부흥은 성령님의 주도적인 역사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 나갈 때 성령님께서 우리 교회에 부흥의 불길을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하박국처럼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듯이 우리의 갈급한 심령 위에 성령의 단비를 내려주옵소서”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맡겨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파악해서 활용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은사는 사용하지 아니하고 묻어두면 소멸되지만 그것을 열심히 활용하면 더 큰 일을 감당하도록 더 큰 은사를 부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초대교회 당시에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능력이 필요했다면, 말세지말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성령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살았다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형식적인 신앙을 내던지고 진실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 늘 성령님을 인정하고 사모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실 때 성령을 소멸치 말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합시다(살전 5:19). 그리할 때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어 어떠한 사단의 시험도 능히 이기게 될 것입니다(엡 3:16).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헤매는 사단을 대적하고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일은 우리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으로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성령 충만하여 활기찬 신앙생활을 영위하실 뿐 아니라, 능력 있는 복음의 증인이 되시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덕을 세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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