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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찾아오시는 마음 (눅 1: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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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찾아오시는 마음
누가복음 1장 13-17절/ 

<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 >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험난한 파도를 헤쳐 간신히 목적지의 해안까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그 친구가 오지 않았습니다. 어둠과 함께 염려도 깊어집니다. 그때 누군가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웠고, 누군가의 입에서 갑자기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그러자 모두 따라 노래했습니다.

"쿰바야! 마이 로드!(kum ba yah, My Lord) 쿰바야!/ 쿰바야 마이 로드 쿰바야/
쿰바야 마이 로드 쿰바야/ 오 로드 쿰바야."
"여기 오소서! 내 주여! 여기 오소서!/ 여기 오소서! 내 주여! 여기 오소서!
여기 오소서! 내 주여! 여기 오소서!/ 오! 주여! 여기 오소서!"

"쿰바야!"는 "여기 오소서!"라는 뜻이고, "마이 로드"는 "내 주여!"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한참 노래하는데 마침내 보이지 않던 친구가 해안에 당도했습니다. 다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머지 친구들이 그에게 달려나가 얼싸안고 기뻐합니다. "기다림이 그토록 꿀맛 같고, 하나됨이 그토록 감격적인 것인가?"를 그들은 난생 처음으로 체험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강절 넷째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은 험난한 파도 속에서 도착하지 않은 친구를 기다리는 마음보다 더합니다.

옛날에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신대륙에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너무 삶이 힘들어서 주님을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캄 바이 히어! 마이 로드!(Come by here, My Lord!, 이곳에 오소서! 내 주여!)" 그런데 노예였던 그들의 언어 능력이 부족해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발음이 "쿰바야 마이 로드"로 변하면서 그 노래가 대표적인 흑인 영가가 되었습니다. 그 노래를 부르면서 흑인 노예들은 주님의 오심과 해방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 흑인 노예들의 마음과 같습니다. "주님! 이 험한 세상, 이기적인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주님은 그 사람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고 2천 년 전에 아기 예수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얼마 후에는 왕의 권세를 가지고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현재도 우리 마음 가운데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찾아와 주실까요?

오늘 본문은 주님의 오심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마음가짐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이 필요할까요?

1. 기도하는 마음

세례 요한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습니까?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원래 잉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7절). 그래서 그 문제로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세례 요한을 주셨습니다(13절). 그처럼 주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면 무엇보다 기도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요셉의 아내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요셉은 마리아를 돌로 칠 수도 있었지만 성경은 요셉은 의인이어서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기록합니다(마 1:19). 그 말씀을 보면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큰 문제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말이 줄고 조용해집니다. 목소리가 큰 것은 대개 기도 부족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결국 기도하는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다"라고 말을 해줍니다. 그 말을 임신하기 전에 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도 "미리 양을 준비했다"라고 말씀하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한 번 돌자마자 여리고성이 무너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보통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충분히 기도하고, 믿음으로 행동할 때까지 기다리시고 가장 적절한 때에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갈등 속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걱정 말라.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내가 다 줄 테니 너는 롯에게 좋은 곳을 양보해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이 조건 없이 먼저 양보하고 롯이 눈에 좋아 보이는 땅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떠나고 나서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다 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주에 종탑을 설치했다가 몇몇 아파트 주민이 반대해서 교회가 주민과 싸울 수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종탑을 철거했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비용 문제를 생각해도 마음이 아팠지만 막무가내로 설치를 막으면서 "교회가 왜 그래!"라고 하고 말하는 그 말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도 '양보의 은총'을 믿기에 그 문제에 대해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때는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하나님은 계속 침묵하시지 않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너무 일찍 오는 법도 없고, 너무 늦게 오는 법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난 다음에 당장 어려운 일이 해결되지 않고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안심하십시오. 눈앞에 절망적인 상황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고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희망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둠을 탓하지 말고, 어둠 속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처럼 고난 중에 묵묵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와 가장 선한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2.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

본문 14절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은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줍니까? 슬퍼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남에게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남에게 기쁨을 줍니다. 주님은 언제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까? 우리에게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주님은 우리 마음에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군 천사들이 찬송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구에게 평화가 찾아옵니까?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사람에게 평화가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돈 많이 벌고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너무 어렵다고 절망해서 두 자녀를 한강에 빠뜨립니다. 그러나 절망은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대해 반항하는 큰 죄입니다. 때로는 살기 힘들어도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넘치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 삶의 가치'를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감사는 내가 바라는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별천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각만 바꾸면 우리는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쁜 일이 있을 때에는 당연히 감사가 나오게 되지만, 반대로 "감사할 때에 기쁨이 오고 기쁜 일이 생긴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분이 평소에 술 먹는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어느 날 밤늦게 누가 대문을 두드리는데 나가 보니까 남편이 엉망으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남편을 간신히 집에 부축해 들이고 나니까 자기 신세가 참 처량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신세 한탄을 하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데 갑자기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것이 있나?" 하고 생각해 보는데, 감사할 것이 전혀 없을 것 같던 남편으로부터도 감사할 것이 생각났습니다. 아무리 속썩이는 남편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감사하고, 그렇게 술에 만취되어도 사고 당하지 않고 꼬박꼬박 집에 찾아오니 감사했습니다. 또한 술을 그렇게 먹어도 건강하니 감사하고, 본인은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나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니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감사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렇게 감사하니까 시름이 덜어지고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옆에 누워 자던 남편이 목이 말라서 눈을 뜨고 보니 아내가 사랑스런 눈길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보! 무슨 좋은 일이 있어?" 이 분이 "너무 감사한 것이 많아서 그래요!"고 하면서 조목조목 감사한 것을 말하자 남편이 "예수 믿어줄 테니 걱정 말라!"고 말하고 다음주부터 교회에 나왔다고 합니다.

감사는 문제 해결 뒤에 하고, 축복 받은 후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어려운 때 감사하면 더욱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발자국'이란 그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해 주심으로 내 인생의 발자국이 네 개가 나게 됩니다. 그러나 아주 힘들고 어려운 때에는 그 발자국이 두 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업고 걸어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너무 고통스럽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런 때일수록 하나님은 나를 더 생각하시고, 나와 더 가까이 해주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고 어려워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감사는 감사거리가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좌우합니다.

어떤 분은 놀라운 간증을 합니다. "제가 며칠 전에 차를 타고 가다가 고속도로에서 차가 굴렀는데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참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감사한 것입니까? 사실 우리가 숱하게 고속도로를 다니면서 한번도 사고가 나지 않은 것이 더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약아서 꼭 죽을 뻔해야 감사합니다. 그래서 평범한 삶에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죽을 뻔한 경우를 더 당하게 됩니다.

여러분! 특별한 것 좋아하고, 너무 기적 좋아하지 마십시오.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은 기적이지만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라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닙니다. 기적은 아니지만 해가 변함없이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이 믿음을 더해줍니다. 어떤 목사님은 1999년에서 2천 년 새해가 되었을 때 사람들이 종말을 얘기하고, 새 천 년을 얘기하니까 해가 동쪽에서 뜨지 않고 서쪽에서 뜰 줄 알았는데, 변함없이 동쪽에서 뜨는 것을 보고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굉장한 체험이 따로 있어야만 감사하지 말고 평범한 가운데 주어진 은혜를 더 크게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와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3. 헌신하는 마음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세례 요한은 주님을 위해 자기 몸을 드려 자기를 거룩하게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주 앞에서 큰 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헌신하고 자기를 깨끗하게 지키려는 사람을 '주 앞에서 큰 자'로 여겨주실 것입니다.

3무(3無)의 악이 있습니다. 무관심과 무감동과 무책임입니다. 관심도 없고, 감동도 없고, 책임도 지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오래 믿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 자신을 다 드려 헌신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동방박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 먼길을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찾아온 목적은 축복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3가지 예물을 드리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 교회에 오면 은혜가 없을 수 없습니다. 목회자의 설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 드리러 오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은혜 받으려고 교회에 오는 마음도 귀히 보시지만 받은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교회에 오는 마음을 더 귀하게 보십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는 뺏고 뺏기는 관계가 아닙니다. 뺏고 뺏기는 삶은 저주받은 삶입니다. 투쟁하고 쟁취하는 삶은 결코 바람직한 삶이 아닙니다. 인간관계는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받는 삶도 복된 삶이지만 주는 삶은 더욱 복된 삶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은혜 받는 삶도 복된 삶입니다. 그러나 그 받은 은혜를 되돌려 드리기 위해서 헌신하는 삶은 더욱 복된 삶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계산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10개의 사랑 중에서 2개를 주어 보십시오. 그러면 8개의 사랑이 남아있어야 계산이 맞는데 나중에 결산해 보면 오히려 2개가 더 늘어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의 비밀입니다.

며칠 전에 찬수 군의 아버지인 목진훈 목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주었습니다. 찬수 군의 백혈병이 재발하여 서울 중앙병원에 다시 입원해서 골수이식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차라리 종탑 비용으로 찬수나 도울 걸..."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목진훈 목사님 형편과 사정이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많이 도왔지만 조금 더 헌신의 손길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산적인 사람들은 헌신을 어리석은 일로 봅니다. 그러나 헌신만큼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은혜를 받을 때보다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헌신할 때 더욱 행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꾸준한 진국신앙을 원하십니다. 조그만 불편도 참지 못하고, 조그만 고난도 참지 못해서 복된 자리를 포기하면 하나님은 그런 모습에 축복을 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떤 분은 교회 근처에 차를 주차했는데 누가 스티커를 붙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안 나오겠다고 합니다. 잘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시 나오기 시작했는데 몇 주 후에 교회 나오다가 신호 위반으로 걸렸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교회에 나오면 일만 생긴다!"고 하고 더 이상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조그만 일이 생겨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선한 결심을 포기하면 어떻게 그 사람에게 축복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고난 중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때 더욱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4. 전도하는 마음

본문 16-17절 말씀을 보면 천사는 "세례 요한이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할 것이다"라고 말해줍니다. 세례 요한은 많은 사람들을 전도해서 주의 오심을 예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런 전도하는 마음을 가질 때 주님은 우리를 찾아와 풍성한 은혜로 우리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성탄절은 어떤 날입니까? 어떤 분은 말합니다. "성탄절은 하얗게 재로 변한 인간의 희망이 다시 불타오르게 된 날이다." 그처럼 불타오르지 않으면 진짜 불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골방에서 세상으로 나아가 주님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어떻게 더 많은 사람에게 알게 할까?"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영어 공부를 할 때 오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맥을 잡고 공부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처럼 인생의 맥을 '주님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삶'에 두어야 합니다. 그처럼 항상 주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주님 중심적으로 살 때 우리의 삶은 가치 있는 삶이 되고, 능력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가장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삶의 핵심을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떤 문제도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사소한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인생 전체를 바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문제는 다 그냥 지나칠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어떤 고난을 당해도 "나를 통해서 주님을 드러내겠다"는 선한 결심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를 모르는 교회는 병들게 됩니다. 전도를 모르는 영혼도 병들게 됩니다. 어떤 분은 전도의 목적을 교회 성장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꼭 전도해야 되느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런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새 전도방법이 너무 공격적이고, 너무 상업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전도하지 않는 사람이 전도하는 사람을 비판할 때는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교만과 허영을 나타내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우리가 목격하는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일을 안 하는 사람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드러내어 비판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상한 일은 전도하는 사람이 전도 안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 안하는 사람이 전도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도하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는 바른 방식을 가지고 전도에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아예 전도에 관심이 없으면서 남 전도하는 방식만 어떻다고 한다면 큰 자기 모순입니다. 요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자기 모순에 빠진 비판자가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욱 증거할 수 있을까?"를 최대한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선을 심지 않는 비판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주 부끄러운 삶입니다. 그런 인생은 작품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판에 공들이는 시간을 많이 줄이고, 주님을 증거하는 시간과 좋은 일을 행하는 시간이 많이 늘릴 때 주님은 우리의 삶에 찾아와 더욱 크신 은혜와 축복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마음,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 헌신하는 마음, 전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주님의 축복을 예비하며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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