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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를 전하러 왔노라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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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전하러 왔노라
일시 : 2003.12.25 성탄절
본문 :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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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예수님의 나심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이 많은 요셉 총각과 처녀 마리아가 약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을 했습니다. 때에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났습니다.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이미 요셉의 마음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다 압니다. 요셉도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만히 파혼하고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사는 이 대단한 일은 우연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잠에서 깨서 아내(약혼자)마리아를 데리고 온다는 기록입니다. 천사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답답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합니다. 불신의 벽이 너무 높습니다. 다 자기 눈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색안경을 끼고 봅니다. 지금 정치도 경제도 다 바닥입니다. 2003년 성탄절은 화해와 용서 기쁨의 성탄이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는 사랑과 화평이 이 땅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수많은 물질문명의 뜨거운 혜택을 받고 삽니다. 겉으로는 화려합니다. 껍데기는 부요하고 찬란한 색깔은 분명합니다. 인간 기생충이 범람하는 시대 공허와 불안 속에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밤별만 반짝이고 만물은 더욱 고요에 잠들 때였습니다. 당시에 시대적인 상황은 눈물겹도록 처참했습니다. 민족적으로는 자유 없는 몸, 온갖 서러움과 곤욕 속에 눈물지었습니다. 이 정도로 유대인의 아픔은 대단했습니다. 다만 그 언젠가는 오실 메시야만 목이 아프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때에 천사의 음성이 나타났으니 “이를 전하러 왔노라.”



모두가 아쉬운 시대, 모두가 못마땅한 때 진실과는 거리가 먼 때입니다. 정로가 어닌 어두운 옆길로 가는 때지요. 영과 육을 동시에 만족하겠다는 지나친 욕심을 부리고들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넘치는 기쁨을 전해 주셨습니다.

Ⅰ.살려주신다.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러기에 사람에게 산다는 것 보다 참된 것도 없습니다. 살되 영생한다는 기쁨보다 넘치는 행복은 없습니다. 이 구원에의 소식은 환상이 아닙니다. 전설도 아닙니다. 시간 속 즉 2003년 전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영 죽을 멸망에서 영생을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분노가 주님 나심으로 사랑의 화해가 결정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제약에서 은총을 죄에서의 용서를 약속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의 소식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떠들썩한 축복 속에 나시지도 않았습니다. 흔해빠진 방 한 칸 빌리지 못하고 이름 없는 시골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나마 결혼을 약속만 한 처녀에게서 났으니 두려운 탄생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의 이상한 주목을 받게만 됐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섭리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첫 번 크리스마스의 한 모습이지요.



예수님은 오늘날과 같은 번거로운 모임에 초대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늘진 세계, 외로운 인생에게 기쁨을 전해 주시려고 오셨던 것입니다. 부조리한 오늘 부정으로부터 맑은 마음을 어둠에서 광명을 혼란에서부터 질서를 흐트러짐에서 마음 같이 한 뜨거운 모임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의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고도 죽음을 느끼지 못하는 오늘인 것입니다. 비참한 오늘 아기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구원을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인류에게 구원은 최대의 약속이자 선물입니다. 우리는 에덴을 잃곤 실향민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증오를 심었다면 거둬야 합니다. 아픔을 주었다면 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화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해를 청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화해의 손짓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결심을 하신 것입니다. 외아들을 희생 제물로 내 놓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혼란이 아닌 혼돈입니다. 대통령 선거 때 불법으로 선거자금을 기업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다 고해성사(천주교에서 회개기도)하듯이 털고 용서하고 넘어가자고 합니다. 시민단체에서는 안 된다 차제에 벌 받을 사람은 받아야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고 합니다. 글쎄요. 과연 정치가 있는 한 이런 부정이 있지 않은가... 정도의 문제이겠지요. 특검을 해서 다 파헤치자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를 위해 오셨습니다. 네 잘못을 내가 떠안는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시기 위해 2003년 전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부터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는 천하고 가난한 아버지 요셉의 목수 일을 30년 말없이 배웠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기에 앞서 그는 더욱 가난했습니다. 우리가 억울하기에 앞서서 그가 먼저 억울한 고생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아픔을 이해 못합니다. 그 누구도 그의 쓴 잔을 맛보는 이가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배를 위해 돌로 떡 하나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떡을 통해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의 기대 밖에 그는 고난을 즐기셨습니다. 부자나 지배자들과 흥청대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저택에 편히 주무시지도 않았습니다. 어디까지 섬기는 종으로 사셨습니다. 가난한 아들과 계시기를 좋아하셨습니다. 병든 이들의 아픔을 고쳐 주시고 죄인의 벗 죄인의 메시야로 만족하셨습니다. 물론 능력이나 지혜가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그는 높은 지위에서 낮은 자를 훈계하지 않았습니다.

의인으로써 죄인에게 설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친히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죄인들과 먹고 마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고난을 위해 우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죄인과 함께 있기를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사자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이 엄청난 사실 하나만으로도 구원의 열쇠는 넉넉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칭호를 생각해 보시렵니까? 랍비, 예언자, 다윗의 자손, 인자, 주, 하나님의 아들, 말씀, 머리, 구주, 제사장, 어린양, 대언자, 선한목자, 화목제물, 중보자, 만물의 근원, 생명의 주, 심판 주, 메시야, 길, 진리, 생명...



이 메시야 임마누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주목합시다.

마가는 “내가 그니라.”

마태는 “네가 말하였느니라.”

누가는 “내가 그인 것을 너희가 말했느니라.”

이상에서 그리스도의 칭호는 처음 팔레스타인 유대인 교회에서 예수님의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복음이 이방에 전파되자 그 개념의 성격과 내용 때문에 크게 반성되면서 동시에 차츰 기독교화하면서 결국 고유 명사화했습니다.(롬9:3, 고전1:6, 고후2:12, 빌1:25, 살후3:5)



주님은 타인을 위한 존재입니다.(본 훼퍼)

이게 사랑의 본질입니다. 아버지가 어진 아버지일수록 불쌍한 아들은 더욱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고통의 사랑입니다. 이게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하게 엿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고독, 괴로움도 상관없습니다.




맺은 말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입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약혼자는 보통 처녀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 몸에 구세주를 품고 있다고 합니다. 그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합니다. 그가 인류를 살리시는 분이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대단하십니다. 우리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시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은 푸대접을 받으셨습니다. 남의 집 말구유에 나셨습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나시자마자 헤롯 임금의 시기와 질투로 이집트로 피난을 가셨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다만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예수님을 예언했습니다. 결코 화려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지금 크리스마스는 화려합니다. 백화점, 음식점, 술집이 성탄절을 더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더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교회가 더 조용합니다. 우리에게 성탄의 기쁨이 식어버렸습니까? 해마다 맞다보니 시들해졌습니까? 구원의 기쁨이 빛이 바래졌습니까? 속으로야 너무 기쁘고 좋지요. 그런데 우리는 정말 사랑, 용서, 화해의 성탄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런 기쁨을 같이 나눕시다. 가난한 자, 헐벗은 자, 고독한 자, 병든 자, 갇힌 자를 생각합시다. 우리만 좋아하는 그런 성탄절이 아닌 정말 더불어 기뻐하는 성탄절이 됩시다.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이 이 성탄절에 믿음의 가족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003년 성탄절에 박 충 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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