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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김과 상 / 골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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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과 상 / 골3:24

성도는 누구나 일을 맡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물론 가정의 일이 있고 사회와 직장의 일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맡은 일을 감당할 때 섬김의 사역을 잘 감당하여 상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 것이며 유업의 상을 주께로부터 받을 줄 알고 이웃을 섬겨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3:23)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 3:24)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23절)는 근면하고 게으르고 나태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며 "너희를 그 관계에 두신 하나님의 뜻에 불평하지 말고 즐거웁게 하라"는 뜻입니다.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함은 섬김을 하나님께 하듯 할 때 그 섬김은 종의 일을 거룩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하듯 한다는 말은 그의 영광을 보고 그리고 그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사람에게 하듯 혹은 그들만 전심으로 섬겨서도 안 됩니다.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자는 표어로 한해를 살아왔습니다.

이 시간 한 해를 돌아보며 섬김과 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하며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마음을 다한 섬김과 상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라는 말은 성실한 태도로 일을 하는 자에게 상이 함께 하는 줄 믿습니다.

자기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선택한 그 직업과 노동은 (엡 4:7,11),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 수단이므로, 그것이 가장 종교적이요 가장 거룩한 행위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엡 4:7)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 4:11)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2)

교회의 직분은 하나님 앞에서 귀천이 없으며 사도나 목사나 교회의 청소자도 하나님 앞에서 다 성결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내에서 자신의 직분을 자랑해서도 안 되며,  남의 직분을 멸시해서도 안 됩니다. 모두가 자신의 직분을 소중히 여기며 성실히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교회직분 이나 직장일도 모두가 동등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활동임을 알아야 합니다. 각자 일하는 영역이 다를 뿐입니다.

흥미로운 일은,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엿새 동안 열심히 땀 흘려서 “일한다”라고 말 할 때와 안식일에 여호와를 “예배한다”라고 말할 때 같은 “아바드”동사를 사용하였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모든 일하는 행위는 바로 예배행위입니다.

우리가 잘못알고 있는 것은, 일하는 것이 인간의 타락으로 주어진 형벌과 저주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타락이전에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 복을 주셨는데 안식일제도, 결혼제도, 그리고 일하는 제도입니다.

그중 우주만물을 관리할 복으로 주신 것이 일이었습니다. 다만 인간타락 때문에 일이 고통이 극심해진 것뿐입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소개됩니다. 일하시는 하나님이 마지막 쉬기 전에 창조하신 인간은, 역시 일하는 존재로 창조되고 부름 받았음을 알게 합니다.

가정에서 부모의 일을 하든지, 혹은 교회에서 제직의 일을 하든지 그 일을 성실하게 마음을 다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일에 마음을 다하려면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사명감을 가진 일꾼과 그렇지 못한 일꾼을 구분하였습니다. 사명감에 불타는 일꾼은 자발적으로 일을 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합니다. 반면에 사명감이 없는 일꾼은 마지못해 일을 하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만 늘어놓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감에 대해 자신은 예수를 위해 결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안디옥에서 흉년을 예언한 바 있던(행 11:28) 아가보 선지자는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하게 될 고난을 예언했습니다. 아가보의 예언을 통해 바울의 고난을 알게 된 성도들은 염려와 슬픔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고난을 피하여 갈 것을 종용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눈앞의 고난을 두려워합니다. 베드로조차도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계획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만류했었습니다(마 16:22, 23).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이 십자가의 고난으로 완성되었던 것처럼 바울의 매임과 '이방인에게'넘겨 줌을 통해서 더 많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증거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성도들은 눈물을 흘리며 바울을 권하였지만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상반될 때 단호하게 거절 했습니다. 동시에 고난을 두려운 것으로 여기는 그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행 21:13)면서 고난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질 것을 촉구했습니다.

  주를 위한 바울의 각오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변화 이후 그의 전 삶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 증거의 목적이 아니면 자신의 생명조차 죽은 것으로 여겼고, 단지 복음에 합당한 도구로서만 살았던 것입니다(행 20:24 ; 갈 2:20).

바울은 성도들의 정성어린 권함을 받으면서도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라면 육체의 결박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각오하였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의 불타는 사명감을 본받아 마음을 다하여 섬기는 일꾼이 되어 예비하신 상을 누리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복음을 위해 헌신함에 있어 생활과 복음을 분리시키지 말 것이며, 상급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복음 전도에 진력해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자나 그렇지 못한 자나 모든 인간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서 이미 씨를 심었고 또 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리스도 심판대의 광경을 생각해 보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울이 구주 앞에 섰을 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바울아 너는 내가 네게 준 너의 생명과 지식과 재능으로 무엇을 하였느냐" "저는 주님께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는 40년 동안 주님을 위해서 아시아와 유럽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대답에 예수님은 크게 기뻐하십니다. "잘 하였도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

그 다음에 가난한 여공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자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는 많은 기회가 없었지만 너에게 주어진 기회로 무엇을 하였느냐?" "주 예수님, 저의 바로 오른쪽에서 일하는 소녀가 있었는데 저는 그에게 주님에 관해서 전해주어 구원 받게되었습니다. 저는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해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 여공을 칭찬해 주십니다. "잘 하였도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 이제 바울 곁에 서거라."

그 다음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레함이 심판대에 섰을 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나는 너에게 설교를 잘하는 재능을 주었으며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많은 군중을 주었는데 너는 이러한 은사들로 무엇을 하였느냐?" "주님, 저는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저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했고 그들이 주님을 위해 살도록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잘하였도다. 선한 전도자여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 가난하고 배우지도 못한 사람이 구주 앞에 섭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신다. "너는 많은 기회를 가지지 못했고 네가 태어난 곳에서 멀리 가보지 못했지만 너는 이 한정된 기회로 무엇을 하였느냐?" "저의 이웃에 살았던 사람이 잃은 양이었는데 저는 제 할 수 있는 만큼 그에게 주님을 전했고 그는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잘 하였도다 내 자녀야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 바울과 빌리 그레함과 모든 성도들 옆에 자리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실한 청지기 노릇을 한 사람이라면 큰 사람이든지 작은 사람이든지 상급을 받게 됩니다.

  주께 하듯한 섬김과 상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일을 하며 섬김에 상이 함께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는 말씀을 “문화명령”이라 합니다.

화가 밀레의 작품 중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만종”이 있습니다. 이 그림의 원제목은 “안젤루스”인데 그 뜻은 “기도”입니다. 농부인 남편과 아내가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일손을 멈추어, 밭 한가운데서 경건한 기도를 드리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태양광선이 비치는 곳은 농부의 머리나 교회의 종탑이 아니라, 광선은 농기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작가의 심오한 철학이 담겨 있어 밀레는 이 그림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함의 신성함을 담고 싶었던 것이라고 설명되기도 합니다.

일은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고 함께 하는 방법입니다.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직분 직업과 일은 매우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일이란 지극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대리 통치권”을 행사하는 수단입니다. 일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매우 위엄스럽고 거룩한 특권입니다.

인간은 일을 통해서 창조주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일하는 것은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하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나누게 됩니다. 일을 통해서 인간은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일은 매우 신성한 것입니다.

  사람은 겉모양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속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성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하며 예비된 상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얄팍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일을 했을 때 그 결과는 뻔합니다.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감시는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 중심적으로 일을 해야 하며 예비된 상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때로 자기중심적으로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이 때때로 부흥하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일은 영원하며 참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 일을 하나님 중심적이든 자기중심적이든지 결정하는 자유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 중심으로 일을 하면 진실하게 일하고 양심적이며 창의적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중심으로 일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일이란 모든 일에 있어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할 수 있는 재능과 시간을 물질을 바쳐서 복음을 위해 힘쓰고, 이 땅에 진리, 공의, 평화, 공평의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금식조차도 인간을 의식해서 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여 은밀한 중에 하라고 권면하시면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8)고 하셨습니다.

순 임금이 하루는 신하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들에게 망태기 하나씩을 줄 터이니 우물에 가서 물을 하나 가득 담아 가지고 오너라!" 열 댓 명의 신하들이 망태기를 하나씩 받아들더니 제각기 흩어져 버렸습니다. 망태기에 물을 담아 보았자 쏟아져 내릴 것이 분명하였는지라 아무도 물 담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한 신하만이 우물가로 가서 하루 종일 물을 퍼 담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으나 어찌 임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으랴 하는 마음으로 하루 종일 물을 퍼 담았습니다. 이윽고 해질녘이 되자 우물의 물이 다했는지 아무리 두레박을 내려도 물을 길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하는 허리를 펴고서 우물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닥 한 가운데에 황금덩어리가 빛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하는 얼른 그것을 올려다가 임금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수고했다! 내 말에 순종하는 자가 너뿐이구나. 그것은 순종하는 자에게 주려고 내가 마련한 상급이니라. 그것을 네가 차지하도록 하여라."(디럭스바이블-순종의 상)


유업의 상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지 진실하고 충성스럽게 해야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만약 성도가 한 일이 선하며, 하나님 중심적인 일이며, 그가 일에 마음을 다한 노력을 기울였다면 상급을 받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징계를 받게 됩니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물론 자연계의 법칙에서 얻은 선조들의 지혜이지만 이 안에는 그 자연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즉 육체를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심령으로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두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때문에 하나님 중심으로 일한 백성에게는 약속하신 상급을 주시고 악한 일에 마음을 쓴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루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인간에게는 그 일에 대한 보상이 따릅니다. 비록 성도들이 사람에 의해서는 그릇되고 속임을 받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공의로우신 보상을 해주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유업의 상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더욱 용기를 갖고 사람에게도 적절한 순종을 보여야 할 것이며, 생활 가운데서도 성실한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생겨진 이야기입니다. 흑인 교회인 성 시온 교회에서 수난일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이 예배 때 특별한 행사를 계획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정신을 본받아 누구든지 자기가 정말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의 발을 씻는 예식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예배에 백인 판사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존경을 받는 판사로서 대법원장에 내정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올리버 판사입니다. 시온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세족 예식의 광고를 듣고 그는 그 교회에 다니는 자기 집의 흑인 여종 마르다 포트윈의 발을 씻겠다고 신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흑인 여종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었을 뿐만 아니라 그 검은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예배당 안은 숙연해졌습니다.  올리버 판사는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마르다는 내 집 종으로서, 오랜 세월 내 아들딸들을 돌보았으며, 내 자식들의 발을 씻어 준 정말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 소식이 퍼지자 내정되었던 대법원장 자리가 취소된 것은 물론 판사직도 박탈되었습니다. 시온 교회 목사가 올리버씨를 위로하기 위하여 방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판사직도, 사회의 다른 지위도 무덤에 갈 때는 먼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먼지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감사가 더 중요합니다."(디럭스바이블- 먼지 털기)

세상에서는 판사직을 박탈당했을 지라도 하늘의 유업의 상은 확실 할 줄 믿습니다.

섬김에는 상이 함께 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섬기고 주께 하듯 섬긴 일에 유업의 상이 함께 할 줄 믿습니다. 한해를 돌아보며 혹시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상을 받도록 다짐하며 더욱 열심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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