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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디서 생수를? [요 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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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어디서 생수를? <요 4:11-14>
 
□ 어디서 생수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
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
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장 11절-14절)

미국 오클라호마 대학의 한 연구팀이 동물의 지능 한계를 알아보기 위하여 침
팬지에게 수화(手話)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온갖 노력 끝에 140개의 단어를 가르치고 이 단어들을 제 생각에 따라서 결합
할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침팬지가 맨 처음으로 표현한 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Let me out" '나를 좀 놓아달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짐승도 갇혀 있는 것, 잡혀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두말할 것 없이 자유를 갈구하는 존재입니다.
자유가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우리의 고향 (B. 프랭크린)과 같기에,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패트릭 힐리)고 말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자유 없이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 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와 노예가 공존하지 않듯이(A.링컨) 우리는 죄의 종노릇을 하면서
참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실 줄 믿습니다.
새해 벽두에 우리는 모두 자유 함에 이르는 존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 자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 함이 있느니라(고후 3:17)"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죄로부터의 자유 함을 받은 한 여인의 기록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 여인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었
을 것입니다.
인생의 갈증을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섯 번이나 결혼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다섯 번씩 결혼을 하게 되었다면, 여자가 남편을 바꾸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
니다.
더 더욱 중동지역에서 예수님 당시의 남성 우위의 사회적 형편에서 어찌됐던
다섯 남자와 살게 된 이유는 불행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뭇 남성들에게, 아니 사람에게서는 인생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
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1. 그러면 어디서 생수를 얻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의 현실은 언제나 갈증의 현실입니다.
갈증의 현실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가지 못하는 현실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평화를 갈망하지만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테러와, 전쟁과, 자연 재해
들은 끊일 사이가 없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와 새해 벽두에서도 테러는 일어났습니다.
우리 나라도 매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노숙을 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단돈 몇 푼이 없어 쪽방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40대 가장들이 얼마
나 힘든 현실이면 목숨을 끊는 경우가 생기겠습니까!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갈증이 해결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형식적으로 반복해서 주일 예배는 참석하지만, 아직도 생수는 얻지 못한 상태
인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몇 년 동안 나왔는데도 뭐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말씀을 들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 기도회도 참석하고 부흥회도 참석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증은 여전합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의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 나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남에게 말할 수 없어서 그렇지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명예, 권력, 지위, 향락이라는 것들에게서 상처를 받고, 또 그런 것들로 인
생의 갈증을 면해 보려고 헤매였던 존재들인지도 모릅니다.

어디에서 생수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여인이 주님을 향해 던졌던 질문입니다.
(Where can I get it?)
주님을 한갓 남성으로만 대할 때는 이런 질문을 계속하게 됩니다.
"당신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큰 인물입니까?"
"물길을 그릇도 없고, 그런 물이 어디에 있다고 내게 주겠다고 합니까?"
"어디 그런 물이 있으면 내게 그런 물을 주어 다시 물 길러 오지 않도록 해 주구
려" 철저하게 인간적으로만 주님을 대했습니다.
그러나, 다음순간 그의 닫혔던 속 마음의 눈이 열렸습니다.
"네 남편을 데려 오라"
네가 지금껏 갈증 해소의 대상들이었던 그 남편을 내게 데려오라고 하였습니
다.
그럴 때 "남편이 없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다. 네가 다섯 남자와 살았으나, 지금 살고 있는 사
람도 네 남편이 아닌 줄 안다"고 할 때, 흠칠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영적 교훈을 얻게 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 소망을 품고 시작하지만, 내가 지금 소망하는 남편이 어떤
존재라고 보십니까?
그에게서 과연 인생의 갈증을 해결할 것이라고 믿습니까?
금년 한해 동안에 얼마나 또 다른 남편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무엇인가 새로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하여 오늘 말씀 속에 임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내 겉 사람의 자존심들이 깨져 나가야 합니다.
인간적인 욕망의 자존심들, 신앙 없이도 살수 있다는 그런 자존심들이 깨져 나
가야 합니다.
주님을 내 부끄러운 현실의 우물가에서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그런 주님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의 우물가에서 만나야 합니다.
말씀이 임하는 우물가는 바로 예배를 의미합니다.

2. 예배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배는 주님과의 만남의 현장입니다.
<말씀>속에 임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두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성령의 감동감화로 우리의 닫혀진 마음을 두드립니다.
예배를 통하여 나의 마음이 주님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사진으로만 주님을 보고 있습니다.
갈증을 만난 사람에게 사진으로 보는 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신앙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아직도 나의 신앙이 그림으로만 느껴지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런 변화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을 만나려는 <갈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실제의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직시하는 자기 성찰입니다.
자기를 바로 성찰하면 할수록 구제 불능의 무능을 느낄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가를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 부끄러운 모습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예배가 달라져야 합니다.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예배는 준비된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의 준비하는 것만큼 은혜는 채워집니다.
우물가에 여인처럼 갈급한 마음으로 내 잔이 비어 있어야 합니다.
비어있는 잔이라야 채워집니다.

3. 그러므로 예배는 주님과의 만남의 시간이 더 즐거워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시계를 보는 것은 다른 것을 더 그리워하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한번 보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지는 시간을 약속하고 만나는 일이 있습니까?
"자기, 오늘 우리 30분만 만나자" 그러는 경우가 있습니까?
결코 없을 것입니다.
만나는 시간만 있을 뿐입니다.

☞ 저도 옛날 우리 집사람과 데이트 할 때 만나자는 시간만 약속했지, 헤어지
는 시간을 약속하고 만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 몇 일전 지하철에서 보았습니다.
대학생 커플인 듯 한데,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을 밀착하고 있는 것을 보았
습니다.
그저 만나면 좋으니까 만납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심정입니다.
☞ 그런데 문제 있는 부부를 보기 바랍니다.
문제 있는 부부가 함께 있게 하는 것이 제일 부담입니다.
함께 있는 시간이 제일 힘들다고 합니다.
왜냐? 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화가 없는 사람들끼리 함께 있는 것처럼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라면 예배시간이 제일 지루할 것입니다.
얼른 끝나고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뿐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젠 끝날 때가 되었는데...하고 시계를 들여다봅니다.
예수님 보다 애인과의 약속이 더 그립고, 예배하는 것 보다 스키 타는 시간이
더 그립습니다.
그런 신앙생활 속에 무슨 주님이 보이겠습니까?
지금도 예수가 한 사람의 유대의 남자로만 보이는 사람들이라면, 생수의 근원
을 모르고 목말라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말씀 속에 임하시는 주님을 만나려는 갈급함이있어야 하겠습니다.

프랑스 어느 마을에 새로 부임한 목사가 교인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목사가 다녀간 후에 남편이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내가 말했습니
다.
"오늘 새로 오신 목사님이 다녀가셨어요."
"목사님이 뭐라 하셨는데?"
"목사님은 제게 묻기를, '이 가정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까?' 하시는 거예
요. 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이 말을 들은 남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그럼 우리가 점잖고 훌륭한 가문의 자손이라고 말하면 되잖아."
"저도 처음엔 그러려고 했지만, 목사님이 물으신 것은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아, 그러면 우리 식구들은 매일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책을 읽고 있다고 그래야
지."
"그렇지만 여보, 그것도 목사님이 질문하신 것은 아니잖아요?"

남편은 점점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당신은 우리 식구들이 매주일 항상 교회에 출석한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
았단 말이야?"
"그것도 목사님은 묻지 않으신걸 어떻게 해요. 단지 그리스도께서 여기 이 집
에 거하시느냐고 만 하셨단 말이에요."
이 부부는 여러 날 동안이나 목사님이 하신 이 심상치 않은 물음의 의미가 무엇
일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부부는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되었고, 죽으신 분이 아니라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금년 새해 동안 우리 상도교회 교우들은 그림으로 보는 예수, 영상으로 대하는
예수, 교리로, 학습으로 알고 있는 예수가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나에게 찾아오셔서 생수를 주는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현
실에서 만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거기에서 인생의 근본적인 갈증이 해결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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