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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적에 이끌려 사는 성도 (고전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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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에 이끌려 사는 성도
(고린도전서 10:31)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이 시는 월파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전원생활에서 느끼는 만족을 삶의 여유와 관조로 엮은 시입니다. 이것은 문학입니다. 절제된 미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전원생활을 통하여 얼마든지 자유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산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삶을 묻는 이에게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면, 즉 삶의 의미를 모른다면 그보다 불쌍한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첫 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삶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무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올 한 해 동안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삶의 의미를 모르기에 대답 못해서 웃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희열이 넘치기에 시인처럼 관조의 웃음을 흘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에 대한 물음은 대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갈 건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로부터

인간이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보다 더 사람을 혼란하게 만드는 질문은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원숭이로부터 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도 자기 할아버지가 원숭이라는 말에는 기분 나빠 합니다. 그럼, 원숭이는 어디서 왔습니까? 철학자들은 제1원인자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 무신론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제1원인자를 하나님과는 다른 존재로 이야기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입니다.

본질을 빗겨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하나님 밖에서 인생을 논하는 논의는 사람을 더욱 수렁으로 몰고 갈 뿐입니다. [욥12:10]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모든 것이 그분 손 안에서만 의미가 있고 그럴 때 제대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 과자는 겉봉지에 그 성분을 밝힙니다. 그걸 모르고 먹을 때는 그저 달면 설탕이 들어갔다는 정도밖에 모릅니다. 성분을 읽어보면 정확히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 만드신 분의 말씀을 통해서만 무엇으로 왜 만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매뉴얼이 바로 성경입니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보다 더 명확한 연구결과가 있으면 전 그것을 믿겠습니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골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너무도 명확합니다. 사람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존재가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원숭이니 제1원인자니 떠들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는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사생아입니다. ‘사생아’라는 말은 법적으로 부부가 아닌 남녀에게서 태어난 아이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부모가 아이를 버립니다. 그래서 아이는 불행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여러분의 원래 부모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소유하신 그분이 바로 여러분의 아버지 되십니다. 이보다 더 신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

그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왜 이 세상에 내셨을까요? 자신을 위하여 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이걸 모르면 결코 삶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하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도록 하게 위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먹어도 좋고 마셔도 좋은데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목사가 되도 좋고, 평신도로 살아도 좋은데 하나님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도, 춤을 추어도, 운동을 해도, 밥을 먹어도, 직장 생활을 해도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왜요? 그러라고 만들어 놓으셨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신 것이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게 아닙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이를 오해했기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바로 안 신앙의 거장,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빌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지금 죽어도 좋지만 예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기 위하여 산다고 합니다. 삶의 목적을 정확히 파악한 사람은 당당합니다. 여러분도 바울처럼 당당하게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삶이 목적이라는 면에 초점을 맞춰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이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인생을 가르치는 책이나 현자들은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그른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어디로

그렇게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가는 길이 다릅니다. 사람들이 흔히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적과는 아주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걸 맞춰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게 성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도록 부여한 목적을 완성하는 게 성공입니다. 이런 논의가 바로 우리가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삶이 성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만족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걸 이루고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이야기입니다. 존경하는 분으로부터 꽃병을 선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사 꽃병이 아니라 귀한 도자기였습니다. 외출했다 돌아오니 어머니께서 들에서 꽃을 꺾어다 거기에 꽂아 두었습니다. 저는 그게 꽃을 꽂으라고 있는 게 아니고 선반 위에 놓고 감상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게 어디 있느냐면서 의아해하시던 어머니 표정이 생각납니다. 결국 그 꽃병은 계속 꽃을 꽂다가 잘못 관리하여 깨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고귀한 사명을 위해 부름 받은 것을 잊고 살다가는 깨진 조각만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았다면, 돌아갈 곳은 오직 한 곳입니다. [전3: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육신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은 이는 이것밖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산 사람은 다릅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영원한 생명이 그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라 말해도 좋습니다. 천국이라 해도 좋습니다. 흙에 묻히는 육신의 일 말고 영의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처량합니다. 갈 곳이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스데반의 평안한 죽음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7:59,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1년입니다. 탄생을 회의하지 마시고, 올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고민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내셨다면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발버둥칩시다. 그리고 스데반처럼 편안한 안식을 기대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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