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의 손과 발이 되자 / 마 9:27-31

  • 잡초 잡초
  • 816
  • 0

첨부 1



성경: 마9:27-31
제목: 주님의 손과 발이 되자


금년에도 국내외적으로는 많은 행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지구촌의 행사는 아마도 아테네 올림픽일 것입니다. 이번 올림픽은 올림픽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1896년 1회 올림픽이 아테네에서 시작되었고,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지구촌의 축제와 화합의 한마당인 이번 올림픽을 통해 세계가 다시 안정과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올림픽의 하이라이트는 '마라톤'입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마라톤은 올림픽 때마다 진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 나라도 손기정, 황영조, 이봉주와 같은 선수들이 암울하고 힘들던 때에 민족에 활력을 주었는데 좋은 일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마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완주를 위한 '목표'입니다. 마라톤은 자기와의 싸움이기에 마라토너들은 '다른 사람을 쫓아 달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달린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이 뛰기에 경쟁과 기록을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완주'라는 분명한 목표로 자기 페이스를 따라 처음부터 힘과 호흡을 조절해야 좋은 성적을 올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라톤의 기본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마라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달려가는 인생 길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목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자신의 삶을 '푯대를 향하여'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푯대'가 바로 '목표'입니다. 예수 믿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목표를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푯대를 향해 달리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목표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의 인생은 목적이 삶을 이끄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금년 우리 교회의 목표를 '주님의 손과 발이 되자'라고 정했습니다. 오늘 신년주일에 이 표어의 깊은 의미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와 같으신 분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이 보이셨던 손과 발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이 시대를 살고, 2004년을 계속 달리는 인생의 마라토너로서 주님의 손과 발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은 이것을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주님의 손은 사랑의 손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가운데 소경 두 사람을 고쳐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있었던 소경들은 예수님이 가실 때 따라왔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만지셨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 감격의 장면을 마음에 그려보십시오. 예수님이 지금 소경의 눈을 만지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만지셨을까요? 바로 주님의 손입니다. 주님은 지금 그의 부드러운 손으로 그들의 눈을 만지며, 그들을 고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만지는 사랑, 터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바라보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만 하지 않았습니다. 소리만 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만지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여기 소경들과 같은 한 사람의 소경을 고치는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시 아주 특이하게 고쳐주었습니다.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흙으로 소경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평상시 병자를 고치는 방법과 비교하면 아주 특이한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상식적으로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이렇게 소경을 고치셨을까요? 바로 '터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말에서, 손으로 전해지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를 때, 그의 눈만 만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얼굴을 만지시고, 그의 온 몸을 껴안으며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전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일본의 뛰어난 신앙의 사람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님이 바로 그런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평생 빈민을 위해 몸을 바치기로 헌신했습니다. 당시 빈민들에게서 가장 큰 고통은 변비였다고 합니다. 변이 차돌처럼 굳어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목사님은 변비로 고통스러워하는 빈민의 항문에 자기의 손을 넣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되지 않으면 침으로 녹여서 빨아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자신의 항문에 손을 대기도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자신의 손과 입으로 이렇게 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일본 기자가 '당신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 때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배운대로 합니다. 나의 피를 닦아 준 스승님처럼, 어려운 사람을 따뜻한 손으로 만져주신 예수님처럼...'

'미다스 터치 (Midas Touch)'라는 것을 아십니까? 미다스는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프리기아의 국왕입니다. 어느 날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그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미다스는 자기가 손으로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으로 만들어달라고 주문합니다. 소원을 이루게 된 미다스는 처음에는 참 좋았습니다.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이 금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점점 그는 슬프게 됩니다. 먹을 음식과 물까지 금으로 변해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의 딸까지도 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깨닫고 후회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이야기, 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미다스 터치'입니다. 미다스의 손은 한마디로 욕심의 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은 사랑의 손입니다. 그분이 만지시면 모든 병이 떠나갔고, 그분이 만지시면 모든 사람이 힘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랑으로 늘 만지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4장 40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더라"

주님의 손은 사랑의 손입니다. 먼저 그 분이 나를 만지셔야 합니다. 그 분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 여러분과 저를 만져주실 줄로 믿습니다. 상처받고, 쓰리고, 아프고, 괴로운 우리의 마음을 주님이 만져 주십니다. 바로 그때 모든 마음이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복음성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주 자비 강같이 흐르고 주 손길 치료하네 고통받는 자녀 품으시니 주밖에 없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주님의 손은 사랑의 손입니다. 우리가 이 한해동안 주님의 손과 발이 되자는 것은 주님처럼 사랑하며 살자는 뜻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곳, 우리가 미치는 곳에 항상 손을 뻗어 주님처럼 진실하게 사랑을 실천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주님의 발은 섬김의 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예수님의 움직임입니다. 그 움직임을 표시하는 동사를 잘 보십시오. 27절에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나가사..." 28절에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라고 말합니다. 모두 예수님의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 관점에서 마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은 무척이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9장 1절에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9절에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19절에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25절에 "예수께서 들어 가사...", 35절에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동안 편히 쉬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온 땅을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갈릴리로, 예루살렘으로, 사마리아로, 가이사라 빌립보로, 베다니로, 예수님은 계속해서 움직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찾아 섬기고 봉사하셨습니다. 그렇게 다니기 위해 필요한 것이 예수님의 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발은 바로 섬김과 봉사의 발이었습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가는 길에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봉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예나 이익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한 알이 밀이 되어 자기의 몸을 불살라 희생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본받기를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수염을 기르고, 누더기 옷을 입는 것일까요? 예수님처럼 샌들을 신고 다니는 것일까요? 주님을 본받는 것은 바로 그분의 삶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 믿고 빨리 하늘나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에 남겨 두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처럼 남을 위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세계와 열방을 위하여, 쓰임을 받는 존재가 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가 존재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여기에 남아 있습니다.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르게살기 위해 우리가 예수를 선택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유익한 사람이 있고 무익한 사람이 있습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 있고, 쓸모 없는 쓰레기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이 있고, 거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 있고, 힘을 빼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나는 유익한 사람입니까? 나는 쓸모 있는 사람입니까? 나는 꼭 필요한 사람입니까? 나는 사람에게 힘을 주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요한처럼,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에, 정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1997년에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뉴스의 초점은 같은 해 일주일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두 여인의 죽음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영국의 황태자비였던 다이애나였고, 다른 사람은 테레사 수녀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두 세계적인 여인의 연이은 죽음 때문에 큰 충격과 함께 무성한 화제에 휩싸였습니다.

다이애나는 귀족의 가문에서 출생한 사람입니다. 일찍이 황태자와 결혼하여 가장 화려한 궁전에서 살았습니다. 거기에서 그녀는 호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정 불화로 다섯 번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늘 대식증과 우울증에 시달려 왔습니다. 국적을 초월해서 수많은 남자들과 연애 행각을 벌였습니다. 결국에 그녀는 애인과 함께 파리에서 광란의 질주를 벌이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테레사 여사는 1910년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나 이미 12살 때에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18세 때에 가족과 고국을 떠나 인도에 있는 로레토 수녀원에 들어갔습니다. 그 곳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지내다가 1948년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돕는 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그녀는 수녀원을 떠나 '사랑의 선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선교회를 통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들에게 고침을 주고, 집 없는 자들에게 잘 곳을 제공하였습니다. 테레사는 캘커타에서만 3만 6천명의 부랑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어린이집을 세워 버려진 고아들과 미혼모들, 그리고 불구자와 정신박약아를 돌보고, 나환자촌을 세워 많은 환자들을 섬겼습니다. 이 일로 테레사는 1979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런 뒤에도 그녀는 겸손히 자기 일에 묵묵히 충실하다가 8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당시 세계는 두 여인의 죽음을 대비시켰습니다. 더 없는 축복과 선망 속에서도 끝내 불행했던 한 여인과, 온갖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과 평화를 베풀며 행복했던 한 수녀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메시지를 남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어떤 집안에서 출생했는가보다 어떻게 살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살았는가보다 어떻게 죽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다이애나의 발은 자신의 욕구와 만족을 채우는데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테레사의 발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자신을 포기한 채, 가난과 병으로 버려진 사람들에게 온몸으로 섬기며 봉사했습니다. 어떤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까? 어떤 자의 길을 걸어야 합니까? 어떤 자의 발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자는 것은 주님처럼 자기의 이익을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하여 섬기고, 봉사하고, 희생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여기에서는 우리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 다 얻는 길입니다. 내가 잘되고 후대가 복 받는 길입니다.

이제 한해동안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사랑하고, 섬기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공동체에 꼭 필요한 사람, 쓸모 있는 사람, 유익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