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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있는 사람 / 시 1:1-6, 눅 6: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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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복있는 사람
성경본문 : 시 1:1-6, 눅 6:20-23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새해를 가리켜서 ‘로시하샤나’라고 하는데 두 가지 뜻이 담겨있습니다. 심판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하면 먼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것은 없었는지 진지하게 반성합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허물을 스스로 살피면서 사람들과 화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대사람들은 새해를 세상의 생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새로워집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새로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는데 이 모든 것은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영성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 새로운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모든 것은 예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 밖에서는 이루어 질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사람은 머리나 지식으로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은 예수님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기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변한 사람이 새로운 사람입니다. 전도서 1장 9절 10절에 보면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오래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새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새것으로 변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불안이 평안으로 변하고 절망이 소망으로 변하고 미움이 사랑으로 변하고 자기중심적 삶이 예수님 중심적 삶으로 변합니다.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날만 새날이 아니고 우리들도 새사람입니다. 진실로 새해에는 우리 모두 새로워져서 새로워진 사람으로서의 삶을 삽시다. 우리는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복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연하게 생각하는 복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한 진정한 복을 생각하고 알어야 합니다.

먼저 환경적인 복이 있습니다. 나는 나대로 있고 환경이 좋은 여건으로 전개 될 때 그것을 복이라고 생각해서 일반적으로 그런 복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내가 복된 사람이 되지 못할 때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다음에 상태적인 복이 있습니다. 나의 삶의 상태, 나의 건강상태가 좋으면 그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자세와 건강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참복이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음에 영적인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보장 받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진실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복이 진정한 복입니다.

시편 1편과 예수님이 말씀한 복은 다 영적인 복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편에 보면 무엇을 가져야 복이 있다 무엇을 알아야 복이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복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복된 일과 복되지 못한 일, 선과 악을 완전히 나누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선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한 사람으로서 악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선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이 복이 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악한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영향을 끼칠지언정 영향을 받지는 아니해야합니다.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소금은 모든 것에 영향을 끼쳐서 짜게 만듭니다. 그러나 자신의 짠맛은 변하지 않습니다. 나침반은 어디에 갖다 놓아도 북쪽을 가리킵니다. 사람에게 길을 열어 줍니다. 그렇다고 나침반이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향력이 중요합니다.

1절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사람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한다는 말은 히브리원문대로 보면 악인의 꾀를 따라서 걷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말은 죄인과 함께 가지도 않고 죄인과 함께 서지도 않는다는 말이고 오만한 사람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는 말은 오만한 사람의 무리에 섞여 앉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복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복이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자기가 받은 복과 자기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 충만하기 때문에 악한 사람의 꾀를 따를 까닭이 없습니다. 가끔 스스로 속았다고 탄식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내가 속았다고 해며 억울하고 분하다고 하는데 억울할 것 없습니다. 속인 사람도 잘못이지만 속은 사람도 잘못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욕심이 있기 때문에 속았습니다. 매력에 끌렸으니까 속았습니다. 유혹에 빠진 것은 소극적으로 말해서 거기 빠지게 될 수밖에 없는 허점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내가 넉넉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으로 충만하다면 악인의 꾀를 따를 이유가 없습니다. 성향도 없고 관심도 없으니까 유혹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 행복으로 충만한 사람은 악인의 꾀에 빠질 필요도 없고 오만한 사람과 같이 앉아서 이야기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악인의 꾀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에 빠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한 사람의 꾀에 빠지지 않습니다.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넉넉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만족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선다는 말은 망설인다는 말입니다. 갈까 말까 망설입니다. 그런데 망설일 것 없습니다. 잘못된 길 인줄 알았으면 망설일 것 없이 단호하게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바로 이 자세 이 미온적인 자세가 불행의 이유입니다. 좀더 확실하게 관계를 끊었드라면 좋았을 것을 망설이다가 함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사람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오만한 사람이 잔치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서 앉아서 같이 먹습니다. 오만한 사람이 오만을 떨고 있는데 거기에 앉아서 먹고 오만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나는 선하기를 원했고 악과 타협하지 아니한다고 하면서도 오만한 사람의 자리에 앉았던 것만으로도 상황이 바뀝니다. 같이 앉았다가 어려움을 당한사람들이 있습니다. 앉아서 들었다가 어려운 입장에 처한 사람들 많이 보았습니다.

중국에 재미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라가 좀 잘못될 때 허유라는 재상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세상을 귀찮게 여겨 다 접고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왕이 허유를 좋게 여겨 사람을 보내어 다시 돌아와서 벼슬을 하라고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소리를 들어서 귀가 더러워졌다고 냇가에 가서 세수는 안하고 귀만 여러 번 씻었습니다. 아는 친구가 소에게 물을 먹이려고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왜 자꾸 귀를 씻느냐고 물었습니다. 허유는 듣지 말아야할 말을 들어서 귀를 씻는다고 했습니다. 그랫더니 소에게 물을 먹이려고 왔던 사람이 소에게 물을 안 먹이고 소를 끌고 그냥 갑니다. 그래서 왜 그냥 가느냐고 물었더니 그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가 없어서 그냥 간다고 했습니다. 참 멋진 이야기입니다. 오만한 사람이 앉아있는 자리에 앉아서 안 들어야 될 이야기 들을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오만한 사람의 자리에 앉아서 무엇을 얻을려고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2절 복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 즐거운 마음으로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무엇을 즐거워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즐거워하느냐가 운명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이 진실로 진실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 설교 듣는 것, 예배드리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가장 귀한 복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루가 다른곳에서 천날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직장에 나가지 아니하는 날에 가고 싶은데가 많이 있으시지요. 그러나 그곳에 가는 것보다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이 더 즐겁고 어디에 가는 것보다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더 행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꿀송이보다 더 달게 느껴지고 이 행복을 알고 체험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꼭 지옥에 갈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앞을 막고 묻기를 너 지옥 가기를 원하느냐 천국 가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 듣고 너무 너무 감사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자기보고 천국과 지옥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천국을 선택하면 될 것인데 묘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베드로 사도에게 말하기를 자비를 베푸실 바에는 좀더 베풀어주어서 천국과 지옥을 다 한번씩 구경 좀 하게 해주시면 다 구경하고 선택하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허락했습니다.

그리하여 천국에 갔더니 천사들이 찬송을 부르고 성도들이 흰옷을 입고 찬송을 부르는데 한참 앉아있었더니 따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 보았더니 거기에는 카지노도 있고 술집도 있고 아가씨도 많고 꿍짝 꿍짝 노래를 부르는데 재미가 있고 참으로 그게 좋게 생각이 되어서 천국보다 여기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베드로에게 가서 저는 아무래도 지옥체질인 것 같으니 지옥으로 가겠습니다. 베드로가 그러면 네가 원하는대로 지옥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옥에 막상 가서 보니까 아까 본 곳이 아니었습니다. 깊은 굴속 뜨거운 곳에 가서 일을 하라고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조금 전에 내가 왔던 곳과는 천지차이인데 어찌된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천사가 설명하기를 그때에는 관광비자로 왔지만 이번에는 영주권으로 왔기 때문에 다르다고 했습니다.

노래가사대로 천국은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체질이어야 천국에 갑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부르기가 싫고 듣기도 싫으면 천국 가서 지루해서 앉아있기가 어렵습니다. 술집이 좋고 아가씨들이 부르는 세상 노래만 즐겁다면 천국에 갔다 놔도 재미가 전연 없을 것입니다. 천국분위기에 익숙해야 천국에 가서 즐겁고 행복하고 잘 적응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생활이 천국생활의 예표이고 예배분위기가 천국분위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빠지지 아니하고 많이 많이 참석하고 찬송을 부를 때 기쁨으로 목청껏 부르고 설교시간에 속으로 아멘 아멘 하면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단 마음으로 듣고 또 들어야합니다. 베다니에 살었던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다른 것 다 제쳐놓고 예수님의 말씀 듣는 것 만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공부하는 것이 즐겁고 하나님의 말씀 묵상하는 것이 즐겁고 찬송 부르는 것이 즐겁고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고 예배드리는 것이 즐겁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너무 너무 즐겁고 하나님의 말씀 준행하는 것이 즐거워서 감사 감격하는 것이 바로 천국 체질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묵상한다는 말은 깊이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하고 딴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묵상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그 외의 일을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억울한 마음도 분한 마음도 슬픈 마음도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깊이 집중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근심과 걱정이 다 사라집니다. 묵상 속에서 영원한 세계가 환하게 보입니다. 그뿐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내가 소중해집니다. 내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로 인하여 기뻐하고 나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까이 가까이 들려오고 그렇게 느껴지고 체험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 여기서 지혜가 생기고 능력이 생기고 소망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꾀에 빠질 필요도 없고 죄인의 길에 설 필요도 없습니다. 이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디에 가도 복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보면 다 나그네로 살고 종으로 살았으나 주인에게 신뢰를 받고 비록 감옥에 있어도 죄수들에게 존경 받고 한 평생 나그네로 살아도 모든 사람으로부터 높은 존경과 신뢰를 받았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살면서 악의 영향을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악으로부터 자유 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살고 그 매인 바를 기뻐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영향을 끼치며 살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한다고 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매 마른 땅에 심겨진 나무는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월등하게 잘 자랍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아래로 뿌리가 잘 뻗어서 나무를 견고하게 하고 위로는 나뭇가지가 하늘을 향해서 쭉쭉 뻗어나가고 옆으로 가지가 잘 자라서 열매를 주렁주렁 맺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때를 따라 열매를 맺게 되고 그리고 행사가 형통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때를 따라 열매를 맺고 하는 일이 형통합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참으로 복되고 귀합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6장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에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했으나 누가복음 6장 20절에는 그냥 가난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일부 특권계층을 제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가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후대 유대교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경건한 사람을 뜻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루터는 자기는 거지라고 선언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도둑맞을 걱정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죄를 덜 범합니다. 현대 사회는 돈이 있으므로 범하는 죄가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5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사람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한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하다고 불평하지 말고 나는 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는 복을 주시지 아니하였다고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세기 때 유명한 대 주교가 천국에를 갔습니다. 그 사람은 대성당을 비롯하여 많은 건축물을 지었기 때문에 의기양양해서 천국 문을 들어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대주교가 묻기를 나를 모르겠소. 나는 어느 성당을 건축한 아무개 대주교란 말이요. 천사가 대답하기를 그렇게 좋은 집을 지었으니 거기에서 사세요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은 진짜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21절 “이제 주린 사람은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 이제 우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주린 사람입니다. 예수 당시 유대 나라에는 주린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장차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장차 웃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에는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는 사람이라는 말은 소리를 내어 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가난하고 주린 사람은 곧 우는 사람입니다. 우는 것은 슬픔을 뜻하고 웃는 것은 기쁨을 뜻합니다.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진실로 복된 삶의 주인공이 됩니다.

22절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임할 핍박을 가리킵니다. 예수 당시에 예수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미워하고 멀리하고 소외시키고 말로 욕을 하고 터무니없이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회당에서 추방하고 사회에서 매장했습니다. 초대교회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이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핍박을 받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면서 살아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금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미리 걱정하지 마십시요. 지난날에도 그랫듯이 금년에도 깜짝 깜짝 놀랄 일들이 계속 될 것입니다. 금년에도 조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금년에 어떻게 되든지 스스로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힘써서 복 있는 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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