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령으로 행하라 / 갈 5:16-26

  • 잡초 잡초
  • 486
  • 0

첨부 1


설교제목 성령으로 행하라
성경본문 갈라디아서 5:16-26

설교내용  공항 대합실에 가면 여러 시설물이 있습니다. 출국장 맨 구석에 가면 유리로 만든 방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흡연실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사람들이 북적북적 됩니다. 가끔 보면 아주 딱합니다. 저기 들어가서 왜 담배를 피우면서 살아야 되나? 마치 동물원의 우리안에 갇혀 있는 동물을 보듯이 사람들이 힐끗힐끗 봅니다. 분명히 그 방은 푸대접받는 방입니다. 흡연자들에게 좋은 장소의 흡연장을 안 만들어 줍니다. 남의 말로 듣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금년 마지막 주일을 맞이해서 가만히 돌이켜 보면 우리도 별것도 아닌 것에 얽매어 가지고 일년 동안 질질 끌려 산 모습이 우리 모두에게 다 있습니다. 해로운 줄 알면서도, 푸대접하는 줄 알면서도 그 흡연실을 찾아가서 흡연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우리도 이것이 아닌데 하면서도 일년간 끌려서 여기 이 시간까지 왔는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싸움이다

  문호 빅토르 위고는 인생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오늘의 문제는 생존과 싸우는 것이다. 내일의 문제는 이기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생은 마지막 날에 다 죽음으로 가는 것이다.“ 이 문호가 관찰했던 것은 인간이 사는 것은 전부 생존싸움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승자와 패자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승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인생의 패자가 됩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 죽음으로 갑니다. 이겨봐도 별 것 아니고 져봐도 별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겨도 후회하는 이김이 있고, 패배해도 당당한 패배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는 승리도 패배도 평가를 받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금년에 한국의 10대 뉴스를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를 했습니다. 그 중에 8개는 다 부정적인 뉴스입니다. 매미 태풍, 대구 지하절화재사건 등 8개가 전부 부정적이고, 8개가 전부 비극적인 뉴스입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 우리가 일년을 살아왔습니다. 지구촌을 보아도 끊임없는 테러가 있었고 사스를 통해서 온 지구촌이 몸살을 앓았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전쟁이 없는 곳은 또 지진이 있고, 광우병, 조류독감 등 그야말로 우리 지구촌은 얼룩진 한 해를 살아왔고 우리도 그 속에서 뒹굴면서 연말을 맞이했습니다. 우리가 좀더 철학적으로 설명을 해 본다면 인간은 자연과의 싸움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지진, 홍수, 태풍, 질병과 같은 것은 전부 자연현상입니다. 아무도 대항을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끼리의 싸움이 있습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을 가만히 보면 그것이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가정 안에도, 부부간에도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과의 싸움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는 싸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사실은 가장 무서운 적은 나 자신이고, 가장 가까이 있는 적도 나 자신입니다. 나와 싸워 이긴 후에 타인과의 싸움이 있어야 되는데 내 자신에게는 패배자가 되어 있으면서 자신의 싸움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환경과 타인과 싸우려고만 하는 이런 잘못된 싸움이 인간에게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많은 적이 있습니다. 욕심이라는 적이 있습니다. 나의 욕심을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나약함이 있습니다. 그 약함을 싸워야 됩니다. 우리 안에 게으름이 있습니다. 이 모든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기 승리자가 된 다음에 다른 싸움을 싸워야만 하는데 자기 패배자들이 싸우겠다고 나서서 싸움판을 오히려 망쳐 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으로 이긴다

  오늘 성경말씀 16절에 보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두 영의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과 육신의 사람입니다. 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에 우리가 거듭나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입니다. 믿는 자 안에 계시는 성령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안에는 욕심의 사람이 있습니다. 날 때부터 원죄를 타고난 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은 항상 대립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소욕이 이기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갑니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이 이기면 인간의 욕심을 따라서 좇아갑니다. 이 싸움이 우리 안에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름에 횃불을 켜 보면 하루살이들이 날라듭니다. 그런데 어떤 곤충들은 불가에 너무 가까이 와서 타죽습니다. 참 어리석습니다. 죽는 줄도 모르고 불가에 오는 하루살이들.

  로마서 7장19에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죄성은 원치 않으면서도 나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건 나쁜 짓이다’ ‘이것은 악이다’ ‘이것은 해로운 것이다’ 라고 알면서도 끌려가는 것이 인간의 죄성 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 안에 하나님의 법과 다른 법이 싸우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려는 법과 죄를 따르려는 율법의 이 두 법이 싸운다, 그래서 바울은 외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법에서 나를 건져내랴” 내 안에 일어나는 이 싸움에 대하여 누가 이기게 하겠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육체의 법을 이긴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우리의 욕심을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교의 가르침은 전혀 다릅니다. 자율적 종교들은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욕심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정복할 힘이 없습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확실히 말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의 극렬한 싸움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가시 때문에 그는 자신과 싸웠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그 질병을 붙잡고 그는 영전을 했습니다. 그는 우리 앞에 아주 실감있게 가르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노라“ 바울은 자기 자신을 친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복종시키는 상태로 KO시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육의 사람이 KO가 되어야 복종이 됩니다. 바울은 그때까지 자기를 친다고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와 우리의 욕심을 전부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 자신을 칠 때 자기를 정복하는 능력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네 가지 실패원인

  사회학자들은 인간의 실패를 이렇게 분석합니다. 실패한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네 가지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욕심을 부렸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부리다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실패의 밑바닥에는 이 욕심의 찌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잘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어떤 일로 감옥에 갔습니다. 그래서 재판도 하고 결국 감옥에서 얼마 간 살다가 나오셨습니다. 그 후에 우연히 만나서 말하는 중에 그 목사님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내가 감옥 안에서 생각도 해보고 기도도 해보는 중에 모든 것은 내 욕심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재판을 할 때에는 온갖 변명을 했는데 결과를 부둥켜안고 하나님께 가만히 자기를 비춰보니 “이것은 내 욕심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실패의 요인은 목적이 잘못되었을 때입니다. 이 목적 설정이 잘못되면 실패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이 목적이 잘못되면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실패한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성취하고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공해 가지고 실패합니다. 그것은 성공의 목적이 상실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공한 후에 실패하는 것은 목적 설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대가없는 성공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값을 지불하고 열정을 부어야 되는데 적당히 하면서도 결과는 대승을 기대하는 이런 실패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영적인 교훈입니다. 모든 실패자들은 자기과신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히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전문 지식을 듣고 겸손히 일하지 않고, 남들이 하는 것 난들 못하겠느냐고 덤비는 사람들은 다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19절 이하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여기에 나오는 이 죄목들은 우리 안에 꿈틀거리는 욕심의 실체들입니다. 인간 속에서 꿈틀거리는 이 죄성을 분석하면 이런 것들이 거기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투기만 하고 어떤 사람은 당만 짓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이 모든 죄성이 오늘도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다스리는 힘

  우리의 욕심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스리는 유일한 길, 절대 대안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아홉 가지 열매가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아홉 가지 은사입니다. 욕심의 열매도 하나뿐입니다. 성령의 열매도 하나뿐입니다. 욕심이라는 열매 안에 온갖 죄가 다 포함되어 있고, 성령의 열매 안에 아홉 가지 은사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이 아홉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사과 안에 여러 가지 성분이 있는 것과 같이 성령 안에 아홉 가지의 은사와 덕목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사랑의 은사를, 때로는 화평의 은사를, 때로는 인내의 은사를 그때 그때마다 발휘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고 자기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은 승리케 하시는 영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은 우리가 자기 승리자로 살 때에 우리 안에서 우리를 사용하시고 우리를 쓰십니다. 자기 패배자는 성령도 쓰지 못합니다. 자기 승리자로 내가 서야 성령이 나를 붙잡아 쓰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현상들은 매우 경험적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우리 안에 발동하는 욕심은 대단히 강렬합니다. 그러나 이 욕심은 없어서는 안됩니다.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소욕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악을 범하지 않고 죄를 범하지 않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내 안에 계신 성령이 나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나를 놓아 버리면 우리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런 사실을 두고 다음과 같은 사람공부를 해 봅시다. 성경은 역사 속에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 앞에 실물로 보여 주셨습니다. 아담, 아벨, 가인, 노아 등 그 사람들 가운데는 ‘차라리 나지 않은 것만 못하였도다’ 라는 사람도 있고 ‘그가 죽었으나 아무도 기억지 아니하더라’는 사람도 있고 온갖 형태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분류하면 세 가지로 나옵니다.

  세 부류의 사람

  첫째는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살기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기 위해서 산다는 사람들입니다. 먹고 마신다는 측면에서는 우리 모두 같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10%가 생존을 위한 절대 극빈자들입니다. 그 분들은 먹고 마시는 것이 채워지지 않고서는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인도는 5억의 인구가 먹는 문제 때문에 생존하고 있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5억이라는 인구가 그렇게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공을 해도 자기 치장만 합니다. 돈을 벌어도 출세를 해도 무엇을 얻어도 그 사람은 자기 치장만 합니다. 자기 밖에 모릅니다. 그 사람들은 변명을 합니다. “나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도 않고 남을 간섭하지도 않는다”고.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만 채우는 사람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치장하는 것, 내가 내 돈을 가지고 내가 쓰는 것을 누가 무엇이라고 하겠느냐고 하겠지만 사회현상학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남의 것을 침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돈 내가 쓰는 그런 논리라면 네 나라가 가서 살아라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내 것이지만 이 돈을 쓰는 공간은 내 공간이 아닙니다. “내가 내 돈을 쓰는데 누가 무엇이라고 하느냐”는 그 변명 자체가 철학적으로 틀린 존재입니다. 네 돈이 네꺼라고 하면, 네 돈도 네꺼 라고 하는 백화점에서 쓰라는 것입니다. 왜 남의 백화점에 와서 네 돈을 쓰느냐는 것입니다. 네 골프장에 가서 치라는 것입니다. 왜 남의 골프장에서 치느냐는 것입니다. 안 맞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치장하는 인간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남을 위한 사람입니다. 남을 섬기다가 가는 인생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자

  어떤 사람이 성공적인 사람이냐 하면 자기가 해보고 싶어하는 일을 하고 가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거기에 우리의 성공과 영광과 행복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뜻만 이루고 우리를 빈 껍데기 인생으로 폐기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높은 뜻을 이루는 사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그에게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섬기는 그것에 인간을 섬기고, 우리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도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그런 인간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가끔 병원 중환자실이나 장례가 나면 영안실에도 갑니다. 중환자실에는 불경기가 없습니다. 갈 때마다 병실이 다 차 있습니다. 그곳에 즐비하게 누워 계시는 분들은 그곳에서 마지막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중환자실에서 나와서 잠깐 서 있는데 하나님이 이런 생각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다 거쳐야 될 중간역이야” 중환자실이 가는 사람만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거쳐야 되는 중간역이라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중간역에 안 간다고 마음놓고 다 있을 수 있습니까? 중간역을 거쳐서 종점에 가는 것이나 바로 종점에 가는 것은 다 같습니다. 중환자실 거쳐서 영안실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환자실에 가기 전에 남을 위해서 살다가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다가 영안실에 가야 합니다. 빅토르 위고의 말처럼 이긴 자나 진 자나 죽음은 다 같습니다. 우리는 비겁하게 승자가 되면 안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승리자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으로 신년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패배자로 아무리 희망찬 새해가 열려도 소용없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마다 패배하는 일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승리자로 살아야 합니다.

  본문 16절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25절에 “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결론은 시작에 한 번 말씀하고 마지막에 또 반복하시는데 이것이 성경의 기법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시작이 무엇인가 하면 “성령으로 살라”입니다. 그리고 결론도 “성령으로 살라”입니다. 그 말을 다른 표현으로 “성령으로 행할지니“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성령을 받으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을 받으라는 이것을 그렇게 이념적으로 받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의 교훈처럼 “성령으로 행하라”는 것, 다시 말하면 성령은 우리가 행할 때에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받아 간직함으로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맺는 말

  육체의 욕심을 이기는 능력은 성령으로 행할 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승용차의 기름탱크에 아무리 기름을 가득 채워도 시동을 걸어서 차를 움직여야 에너지가 됩니다. 힘이 나타납니다. 그 기름은 차가 달릴 때에 기름이 아닙니다. 힘입니다. 굉장한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 성령은 행할 때에 에너지화됩니다. 능력화됩니다. 동력화됩니다. 나를 불태웁니다. 우리의 욕심을 소멸시킵니다. 우리 안에 아버지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남을 섬기는 능력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능력이 일어납니다. “성령으로 행할찌니” 이 말씀을 한 마디를 품고 누더기 같은 불신앙의 누더기를 벗어버리고 2004년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