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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 롬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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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롬 15:13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이웃 여러분, 구주대망 2004년 새해 첫 주일 예배에 나아오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복된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삶의 최고의 가치인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간이 예배마다 있기를 바랍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에 미국 잠수정 한 척이 본국의 기지에 도착했습니다. 항구에 도착할 즈음에 심각한 기계적 잘못이 생겨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긴급구조대가 파송되었습니다. 배 안에 타고 있는 승무원들을 구하기 위해서 출동한 것입니다.

잠수부들이 잠수함 가까이 다가가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피려고 잠수함 주위를 헤엄치고 있는데 잠수함 안에 있는 한 승무원이 아주 기발한 생각을 했습니다. 망치를 들고는 모르스 부호로 교신을 시도한 것입니다. 옛날에 우체국에서 전보를 치면 그렇게 했잖아요?  짧은 음과 긴 음을 섞어서 의미전달을 한겁니다. 안 쪽에서 묻고 있는 그 메시지는 “희망이 있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의 중요한 질문입니다.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아직도 희망은 남아 있는가? 기대할 만한 것이 아직 남아 있는가?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이런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검진결과를 듣기 위해 찾아간 의사에게 “희망이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병실의 환자용 침대 곁에 서 보면 찾아오는 사람들이 “희망이 있습니까?”라고 속삭입니다. 몇 달째 부부 문제로 갈등하면서 속으로 “희망이 있을까?”라고 묻기도 합니다.

사업이 부도로 치닫는 상황에서 “희망이 있을까?”라는 불안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어린아이를 찾지 못한 채 밤을 새운 부모들은 “희망이 있을까?”라고 두려워합니다.  내일 어디로 치달을지 모르는 불안한 정국을 바라보며 우리나라에 과연 “희망이 남아 있을까?”하고 국민들이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지 않고 40일은 살 수 있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고도 사흘은 견딜 수 있습니다. 숨을 쉬지 않고도 8분을 버틴다고 합니다. 그러나 희망이 사라지면 사람은 한 순간도 버티지 못합니다. 희망이란 우리의 삶에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희망이 사라지면 인생이 끝납니다. 어떤 상황 속에도 우리 모두에게는 버틸 희망이 필요합니다.

세계 제 2차 대전 중 미국 어떤 의과대학에서 희망이 실제로 사람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25,000명의 포로들을 대상으로 희망이 그들에게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를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25,000명 가운데 한 조그마한 그룹의 전쟁포로들은 수용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구타, 고문, 독방에 가두는 것을 비롯해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별다른 영향을 입지 않았습니다. 전쟁포로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마음도 몸도 모두 건강했습니다.

그들은 일상적인 여전히 평온하게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구팀은 이 그룹을 면밀히 조사를 해보니 그들 모두가 다른 그룹에 비해서 모두 희망지수가 탁월했습니다. 희망은 이와 같은 놀라운 차이를 만듭니다. 생의 위기를 극복하는 엄청난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그래서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희망을 가지면 엄청난 스트레스와 잔인한 고통도 견디어 낸다. 그러나 희망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무너져 내린다. 감정적으로, 심리적으로, 영적으로도 파괴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삶의 근본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지를 연속적으로 살피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필요한 도움과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서 어디를 바라보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새해에는 여러분 모두 주일마다 복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귀한 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희망을 갖지 못하면 주일마다 연속적으로 살필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역사하실 것에 대한 희망을 반드시 가지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형편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을 꼭 믿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는 새해에 희망을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는 희망결핍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후천적 면역 결핍증이라고 해서 에이즈라고 하는 질병이 얼마나 무섭게 우리 사회에 파고 들고 있는지 여러분들은 들어보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질병이 희망 결핍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높은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던지고 자기도 뛰어내리고. 한강 그 차가운 물에다가 자식을 던지는 아버지. 어제도 열차 철도길로 뛰어드는 사람들, 모두가 심각한 희망 결핍증으로 인한 문제들입니다. 거짓 희망에 집착하는 병적인 현상들도 심각합니다. 특별히 우리 복산동 주위를 살펴보면 곳곳에 점집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저 대나무 꽂은 집들이 사라지길 바라고 있는데 오히려 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거짓 희망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전화통을 붙잡았다 하면 끝없이 얘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 접속을 하지 않으면 불안한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내려가는 계단에서부터 누군가에게 연결을 시도하는 청소년들은 모두 병적인 현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가면 절대 그렇게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전화한다고 바빠서 담임 목사가 앞에 서 있지만 눈길을 줄 여유가 없는 청소년들을 볼때마다 제가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건강한 희망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희망의 원천이십니다. 우리 번역에는 소망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그 말을 일반적인 말로 바꾸면 희망입니다. “희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희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바울이 왜 로마에 사는 성도들에게 희망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역설적으로 그들이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 네로의 미친 짓으로 인해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앞날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희망의 하나님. 하나님의 그 많고 많은 모습 가운데서 희망의 하나님이라고 그들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희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렇다고 하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 말로 정월 첫 주일 나온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그가 여러분에게 평안과 기쁨과 희망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저는 요즈음 가끔 스스로 너무 기뻐하고 있습니다. 제 집사람이라도 붙들고 “나, 요새 행복해” 하고 말하고 싶은데 느닷없이 붙들고 얘기하면 ‘나이가 들어가더니 이상해졌나’ 하며 쳐다볼까 싶어 말은 못하죠. 그러나 괜히 알지 못하는 사람 붙들고 “나는 기쁩니다”하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이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통해 희망을 잃고 사는 이웃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한글 번역에는 잘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만 시편 52편 NIV 번역판을 비롯한 영어번역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시편 시52:9)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면 그 희망 때문에, 주의 이름이 주는 희망 때문에 우리가 기뻐하는 것입니다. 

저도 주의 이름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면 나도 염려 걱정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요새 걱정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는 큐티 제목이 있더라고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걱정하는 것은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아들하고 큐티하면서 그랬더니 아들 하는 말이 “아들 때문에 걱정 되시겠죠.” 하는 말에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그래도 남은 못 들어가는 대학 들어가서 좋은 성적에 졸업해서 백수로 남아 있는데, 사실 아들 얼굴 쳐다보면 난들, 아버지로서 왜 속 안 상하겠읍니까? 그렇지만 나는 아들 얼굴만 바라보며 속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아들을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 이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버지로서 그 아들에 대해서 할수 있는대로 최대한 돌봐줘야 됩니다.

그렇게 결심하고. 어렸을때에 그 아들에 대해서 희망을 가졌던 대로 지금 나이 27,8이 되어 가지만 그 아들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고, 좋은 아버지가 할수 있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실수할 수도 있죠.

어제 저녁에 교회 내려오려고 하는데 따라오겠다고 합니다. 아마 아빠 방의 컴퓨터가 잘 되니깐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나오면서 한 두마디 하는데 둘이 다투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내 자신의 실제의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요 몇 달을 지내면서 나는 평안과 기쁨이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깊은 밑바닥에는 어쩌면 나도 뭔가 관계에 있어서...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어요. 화해하고. 그러지 않고는 내가 여러분 앞에 설수가 없겠더라고요. 

이름에 희망을 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 이름이 보여주는 그 분의 인격에 대해서 희망을 거는 것입니다. 고대 문화에서는 이름은 한 사람의 인격을 규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늑대와 춤을’ 보셨습니까?  거기에 보니깐 인디안들은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의 특징을 가지고 이름을 짓지 않던가요? 고대는 그러했습니다. 

지금은 멋진 이름 가지고도 추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전에는 그 사람의 특징을 나타낼 수 있는 이름을 짓는 것이 어느 문화건 일반적인 문화였습니다.

그래서 성경 곳곳에는 여러 가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여호와 샬롬” 무슨 의미입니까?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면 놀라운 평화를 허락하십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평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를 하나님은 허락하십니다.

“여호와 이레”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수양으로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리면서 불렀던 이름입니다. 말이 그렇지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100세에 낳은 아들을 바치려고 할 때 순종하기로 결단했지만 그 아버지의 마음이 여러 아버지의 마음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었습니까?

“아버지, 여기 불이 있고 나무도 있는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할 말이 없으니깐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 그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양이, 지정하신 양이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아버지가 그렇게 답하는 순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순간에 아들을 묶어 놓고 치기 위해서 칼을 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시대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 내가 내 아들을 묶어서 제단에 올려놓는 심정으로 살면 세상은 희망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 준비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면서도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우리 아이들의 내일을, 거기에 기대를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은 우리에 대해서 감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면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기 위해서는 내 자식도, 내 가정이라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결단을 가지고 살면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반드시 개입하십니다. 칼을 들어 올릴 때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게 달라졌겠습니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급히 아브라함을 두 번을 불렀습니다. “됐다.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보았다” 그러고는 수양으로 대신해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내려 올 때의 그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는 것. 무딘 사람이라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그런 문제가 없겠습니까? 정말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아들, 딸의 모습들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는,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믿으면 나는 좀더 좋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아들에게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 삼마”

에스겔서 맨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이름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디에나 있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그 분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과거에, 여러분의 현재에, 여러분의 미래,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기쁠 때와 슬플 때, 잘 될 때와 어려울 때, 좋은 장소든, 나쁜 장소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이것은 엄청난 의미를 가집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와 언제나 계신다면, 우리가 그 분의 임재를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나 혼자 버려 두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여호와 삼마,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면 어떤 위기에서도 우리는 극한 행동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도록 붙드는 희망의 닻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에 가장 밑바닥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의 삶에 희망을 주십니다. 새해에는 희망의 하나님 모시고 사는 평강과 기쁨, 즐거움을 체험하는 나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없습니다.  아는 것만큼 여러분은 그 이름이 주는 복을 받습니다.

왜 희망의 하나님이 되십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언제나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성도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삶이 우리의 수중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성도들은 삶이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배워야 나이 값 하는 성도입니다. 게다가 새해 365일,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하며 안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처리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희망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무슨 일이 일어나도 여러분과 저는 홀로 대처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붙들 수 있는 삶의 확실한 부분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붙잡을 때 여러분은 희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삶에는 여러 가지 불확실한 것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이 우리를 떠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친구들이 이사를 갈수도 있습니다. 평생 헤어질 거라고 생각도 못했던 목사도 떠나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떠나서 8년을 여기 와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사랑했던 성도들에게 전화를 한 두번 하는데 절대로 나에게 전화를 안 하더라고요.

수년이 지나도록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저는 몰랐어요. 세월이 한참 흐르니깐 그들이 나를 떠나보내면서 가졌던 상실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별 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사는 날 동안 함께 하리라고 믿었던 배우자마저 떠나가는 일이 드물지 않는 슬픈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슬픈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까? 세상이 워낙 그러니깐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조그만 어려움이 있으면 이혼을 대안으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대안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대안으로 생각하면 여러분은 언젠가 그 대안을 찾아서 가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대안이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을 주례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생사간에,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 까지는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했고 여러분은 “아멘”이라고 답했습니다. 살다보면 기대했던 그 남자가 전혀 바람막이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느낄 때도 있겠죠. 그런 느낌이 들 때도 있겠죠.

정말 이 아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는 느낌도 왜 안 들겠습니까? 행복하게 살다가도 어느 날 회오리바람이 불어오듯이 우리를 사로잡는 절망감, 이 여자와 더불어서 더 이상은 힘들다는 느낌이 왜 안 들겠습니까? 목사는 예외라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느낌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내게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누구 말처럼 데리고 사는 것만으로도 나는 천국에 가서 면류관 받을 것이라는 각오를 가지고 살면 왜 헤어집니까? 사람에게는 그 어떤 대상에 따라서 우리가 희망을 때로는 가질 수 없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진리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떠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목회현장에서 특히 장례식장에서 말없이 쳐다보는 눈 빛 속에서 “어떻게 살지 막막해요, 어떻게 다음 발걸음을 옮겨 놓을 수 있지요?” 말은 하지 않지만 그 눈빛을 통해서 그런 질문을 받을 때에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별의 자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다보면 만약에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요? 

거기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이란 진리입니다. 함께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살피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32:8) 우리 갈 길을 안내하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말을 주십니다.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가야 할 길을 내가 너에게 지시하고 가르쳐 주마. 너를 눈 여겨 보며 너의 조언자가 되어 주겠다.”(시32:8, 표준새번역)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미래를 아시고 미래를 주관하십니다. 미래를 아시고 주관하시는 분께서 우리에게 갈 길을 안내하고 도움말을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새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가 모르고 그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우리는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을 아시고 다루시는 하나님을 믿기만 하십시오. 우리의 삶을 아시고 이해하시고 인도하시고 도움말을 주실 하나님과 함께 새해를 살아갑시다.  여기 그 분의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다.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가3:21-23)

여기 새해 첫 주간을 희망 가운데 펼쳐갈 놀라운 약속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한번 붙잡으시기만 하면 , 손대시기만 하면 절대로 놓지 않으시겠다는 겁니다. 그의 자비는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그의 긍휼은 아침마다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 새 희망으로 하루를 열어 가십시오. 이 새 희망으로 올해를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왜 희망의 하나님이 되십니까?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이 없습니다. 좋은 일, 나쁜 일, 힘든 일, 괴로운 일 그 어떤 일에도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수용하기도 극복하기도 어려운 일을 우리는 만납니다. “왜 하나님, 제게 이런 일이.....?”라고 질문합니다.

살다보면 어떤 흐름도 이유도 발견할 수 없는 엉뚱한 사건이 터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건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면 견뎌낼 희망을 가집니다. 엄청난 힘을 공급 받을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거기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상황은 나빠지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로 한, 하나님의 마음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한 번 더 여러분이 잘 아는 구절을 살핍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어려움을 겪을 때 여러분이 이미 잘 아시는 사실을 다시금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 진리는 여러분이 상상하거나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하나님, 그 분은 온 우주의 설계자와 시공자요 유지 보수하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만사를 주장합니다. 결코 요행이나 재수가 여러분의 새해를 주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장하십니다. 여기에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패도, 실직도, 파산도, 이혼도, 사별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한 어리석은 실수조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일을 맡은 사람이 밀쳐놓은 그 무관심 때문에 내가 당하는 엄청난 손해까지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체 그림을 그려가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그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맛있게 구운 빵을 잡수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굽기 전에 재료 하나하나는 맛이 없을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설탕 말고는 별로 먹을 만한 재료가 없을 것입니다. 베이킹파우더가 맛있겠습니까? 밀가루가 맛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넣고 굽고 나면 맛있는 빵으로 변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하나의 사건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들을 통해서 당신의 작품을 이루어가십니다. 요즘은 처녀들이 시집을 간다 해도 수를 안 놓더라고요. 저는 어렸을 때에 누님들이 시집 갈 때는 불을 켜놓고 열심히 수를 놓습니다. 어떤 때는 초록색 나뭇잎으로 한다는게 하늘색으로 해 놓기도 하는 실수도 하데요.

수를 놓을 때 위에는 보고 놓기 때문에 한 뜸 한 뜸이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만약에 수틀 밑에서 쳐다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양탄자도 마찬가집니다. 위에서 보면 좋은 문양이지만 거꾸로 뒤집어 놓고 보면 거기에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겁니다. 십자수도 마찬가지고 동양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위에서 우리 인생의 수를 놓아 가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밑에서 그것을 쳐다 보고 있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 왜? 왜? 왜? 이런 일이 내 생애에 부딪힙니까? 하고 질문을 합니다. 연결해 보지 못하고 밑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의미 없는 일들도 때로는 일어납니다. 그러나 믿으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어두운 색실과 밝은 색실로 섞어가면서 수놓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지금 밝은 색실로 수놓고 계시면 찬송하십시오. 어두운 색실로 수놓고 계시면 기도하십시오. 그의 기쁘신 뜻 안에 들어온 당신의 자녀들의 삶에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운명이 우리를 가지고 놀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뜻대로 사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오시긴 했지만 너무나 힘든 처지에 계신 분은 없습니까? 여러분의 느낌이나 감정에 따라서 결론을 내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표준새번역이 좀 더 쉽게 말합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으로서,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렘29:11, 표준새번역)

지금 고통스런 자리에 있습니까? 아무런 쓸모없는 고난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으로서, 우리의 미래의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움이 극한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 때입니다.

너무 멀리 떠나와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조차 보이지 않습니까? 여기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무언가 선한 일을 시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아름답게 결론 내리실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희망의 원천이 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언제나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해는 돌아가십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거기 희망과 평안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특집방송에만 시간을 보내시면 더 희망을 잃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묻습니다. 왜 희망의 하나님이 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복된 장소를 마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도무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느껴집니까?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습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은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1-2) 예수께서는 하늘이란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거할 장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의 세계, 니르바나의 세계가 아닙니다. 몸도 없고 영혼도 없고 나도 없고 너도 없는 세계가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요 주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서 준비한 곳입니다. 하늘나라는 평안과 안식이 주어지는 곳입니다. 두려움이 없고 고통이 없고 문제도 갈등도 없는 곳입니다.

성경 마지막 책에서 잠깐 잠깐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계21:4)

거기에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마지막 판정은 바로 거기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을, 장례식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일이 잘 될 때는 누구라도 콧노래 부를 수 있습니다. 찬송도 부를 수 있고 가스펠도 흥얼거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삶의 종착역인 장례행렬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거기 둘러서 있는 여러분의 눈빛 속에 절망이 자리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있어서 장례식은 축제입니다. 그래서 영결식이라고 부르는 대신 우리는 천국환송예배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성도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그가 어디에 갔는지를 알기에 내심 기뻐합니다. 모든 고통에서 이젠 풀려났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슬퍼하는 이유는 떠난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다시는 그 사람을 여기, 산자의 땅에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우리가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이 땅에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결국 가게 될, 더 좋은 곳을 갔기에 그를 위해서 우리는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희망을 갖지 못한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을 잃고 혼자 아이들을 키운다고 하는 것은 결코 사소한 불편이 아닙니다.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충격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런 와중에서도 놀라운 평화를 누립니다. 어디서 오는 평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아는 사람만이 누리는 평화입니다.

새해 첫 주일 예배에 나오신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 가운데 희망이 다 사라진 것처럼 느끼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심하게 돌보시고 있는지를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에 휩싸이지 말고 말씀을 붙잡기를 바랍니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사46:3-5)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었어요. 선민 이스라엘,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포로 되어서 수 십 년을 생활하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들 중에서는 초창기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도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날이 지나면서 불평하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다 들으시고 참다 참다 못해서 지금 말씀하시는 겁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 찌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사46:3-4)”

시련이 오래되면 장사 없이 믿음에도 장사가 없어 보이더라고요. 어떤 때는 마지막 하나 남은 희망의 줄마저 끊어진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기로 창세전에 결심하셨고 때가 되매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뒤뚱대다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우리의 모습과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드러내기에 너무나 부족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이 기록된 말씀이 여러분의 삶의 감동의 말씀이 되시기 바랍니다.

파탄으로 치닫는 부부생활로 인해서 고민합니까?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좌초하고 말았습니까? 희망이 없는 암으로 인해서 발버둥칩니까? 이 회사 저 공장으로 뛰어다녀도 아무데도 자리를 얻지 못하고, 어디에도 여러분에게 적합한 곳은 보지지 않습니까?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인해서 절망하고 있습니까? 빗나간 자녀로 인해서 아무런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경제생활이 절망적입니까? 빚을 갚기보다는 더 많은 빚 속으로 빠져들기만 합니까? 한 달 한 달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불안감이 여러분을 엄습합니까? 극복하기에는 너무 무력하고, 희망조차 모두 사라진 처지에 혼자 있다는 느낌을 가지신 분은 없습니까?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새 희망이 여러분의 삶에 자리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새 희망이 가득할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0).

죽음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려낸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다면 여러분의 결혼생활도 다시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죽어버린 꿈도 사라진 희망도 되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 분은 우리의 삶에 희망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들은 진리를 붙잡으십시오. 한두 가지라도 붙잡기만 하면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됩니다.

왜 우리는 희망의 하나님을 믿습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여러분을 버려두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하나님이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함께 계시고 돌보시고 도우십니다.

새해를 살아갈 때 여호와 삼마- 언제나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십시오. 아무 때고 혼자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 우리는 희망의 하나님 믿습니까?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살피시고 채우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의 보살핌을 우리는 어떻게 체험합니까? 저는 우리의 220여 구역이, 그 구역에 속한 어려운 성도들에게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역에 속하시고 구역을 통해서 성도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나타내 보이길 바랍니다. 이렇게 예배에만 참석하면 구경꾼으로 남기가 쉽습니다. 바라보기만 해서는 교회가 주는 유익을 다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함께 하는 소그룹에 속해야만 합니다. 어려울 때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래서 가정 같은 구역, 동고동락하는 교회가 이 땅에는 더욱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 되시는 이유는 우리를 위해 준비한 하늘나라 때문입니다. 거기가 성도의 마지막 희망의 원천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임재는 여러분을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영원한 안식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희망을 가지고 살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31). 여러분, 희망을 가지고 살면 그 영광의 힘을 좇아서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실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힘든 관계 속에서도 넉넉히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부르셨고 이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낙심과 절망에 빠져들지 마십시오. 포기하는 대신에 앙망하십시오. 세상을 보고 절망하는 대신 하늘을 보고 희망을 가지십시오. 한탄하는 대신에 간구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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