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생명을 보았노라 (사 49:13 ~ 16)

  • 잡초 잡초
  • 392
  • 0

첨부 1



  생명을 보았노라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49: 13 ~ 16

  하늘아, 기뻐하여라! 땅아, 즐거워하여라! 산들아, 노랫소리를 높여라. 주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또한 고난을 받은 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그런데 시온이 말하기를 "주께서 나를 버리셨고,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는구나.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보아라, 예루살렘아,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을 늘 지켜 보고 있다.

서신서의 말씀: 요한1서 1:1 ~ 4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태초로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자세히 살펴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 본 것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선포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본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고 이 글을 써 보냅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2:19 ~ 23

  그 헤롯이 죽은 뒤에, 주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일어나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그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하였다. 요셉이 일어나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요셉은, 아켈라오가 아버지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 지방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서,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가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씀하신 바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오늘이 금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을 돌이켜보고, 깊은 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나간 시간들은 흘러간 시간이 되었고, 우리 각자의 역사의 한 부분이 됩니다. 참 아쉬운 것은, 지나간 날들은 재생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복할 수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나간 삶 속에서, 우리의 사회와 가정의 여러 가지 사건과 일들 속에서 썩은 냄새가 났던 것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기쁨의 찬양을 받았던 것들도 계속됩니다. 사건은 반복되지 않지만, 사건에 담긴 향기, 냄새, 혼, 이것들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우리들 가운데 있습니다. 무엇을 단절하고 무엇을 지속시킬 것인지 오늘 한번 우리를 돌아보면서 결단해 보십시다. 그 결단에는 어떤 눈으로 어떤 시각으로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볼지, 그것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일반적으로 다 맨발로 다닙니다. 길이 부드러운 흙이나 모래인데다 날씨도 차지 않아서 신발 신을 필요가 없을 듯도 합니다. 도시에도 맨발이 많은데 시골 가면 거의 맨발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도 맨발로 다녀서 발바닥이 두껍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신발회사가 실제로 사원 두 사람을 아프리카에 파견했습니다. 파견해서 아프리카에서도 신발을 팔 수 있을지, 현장에 가보고 보고서를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보고서를 냈는데, 한 사람은 아프리카 사람들은 신발을 아예 신지 않고 있으며 불편해 하는 것 같지도 않으니, 신발 판매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보고였습니다. 판매 불가 보고서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정반대로 아프리카 사람들은 신발을 안 신고 살아왔기 때문에 신발을 판매할 수만 있다면, 엄청나게 많은 신발을 팔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를 냈습니다. 이 보고서로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판매 불가를 보고 했던 사람은 은퇴할 때까지 그 회사의 평사원으로 살았고, 그와 다른 보고를 한 사람은 그 신발회사의 사장이 되어서 많은 신발을 아프리카에 수출했다고 합니다.

같은 현실을 보아도 어떤 안경을 끼고 보는가에 따라서 다르게 이해됩니다. 좀더 옛날로 무대를 옮겨 보십시다. 교회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일을 이루었다고 생각되는 분, 그래서 추앙받는 분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기의 낡은 껍질을 깨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내세우게 되었으며,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가 타파되고, 세속 문명이 유입되며, 국민국가가 등장하는 등, 세상을 뒤바꾼 많은 일들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루터 혼자 한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이런 엄청난 세계 변화와 교회 변화를 주도했던 사람은 성격이 굉장히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낙관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쓴 자기 생애에 관한 글을 읽고서 루터도 역시 나약한 인간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세 때에 대다수 학생들은 등록금을 스스로 마련하는, 이른바 고학을 해야 했는데, 고학할 수 있는 방법이 대개 남의 대문 앞에 가서 찬송이나 다른 노래를 부르고 도움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노래를 잘하면 집주인이 푼돈을 많이 주고 잘 못하면 적게 주기 때문에, 고학생들 간에 노래를 가지고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루터의 노래에 대해서는 평가가 좋지 않았습니다. 목소리가 나빴기 때문입니다. 노래를 하면 늘 핀잔을 들었기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루터가 한번은 어느 집 앞에 가서 찬송을 불렀는데, 창문을 확 열더니 뚱뚱하고 인상이 험상궂은 남자가 소리를 꽥 질렀답니다. “거기 서 있어!” 루터는 이제 맞아 죽었구나 생각하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따위 노래를 어떻게 부르느냐고 마구 화를 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도망을 가다가 결국 어깨를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너 노래는 지독히도 못 부르던데, 못 부르는 노래를 듣다가 크게 감동을 받았다.” 하면서 봉투 하나를 건네주는데, 그때까지 그렇게 두꺼운 봉투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두꺼운 봉투였습니다.

이런 개인적 체험을 하고서 루터는 생각했습니다. “두려움과 좌절이라는 안경을 끼고 봤더니, 세상은 추악함과 좌절, 염려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망과 믿음이라는 안경으로 바꿔 꼈더니, 세상에 어쩜 그리 감사할 일이 많습니까? 하나님의 손길이 안 닿는 곳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내 행실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루터는 그때부터 신부가 될 마음을 가졌고, 이후에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안경 때문에 삶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안경은 바로 믿음이라는 안경, 희망이라는 안경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이 안경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안경을 줄 테니 이 안경을 쓰고 세상을 다시 한번 보라고 하십니다. 불안, 무질서, 좌절, 혼돈, 정말 기억하기도 싫고 눈에 보기도 싫은 것들이 현실적으로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물론 그건 과감하게 자르고, 과감하게 단절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역사의 발전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안경을 쓰고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속에서 모든 생물 가운데서 울려나는 하늘의 영광이 보일 것입니다. 쓰레기 같은 곳에서도 장미는 핍니다. 그 가능성을 볼 수 있다면, 그 희망의 씨앗을 모아서 2004년에는 다시 심고 거름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안경, 희망의 안경, 생명의 안경을 쓰라는 것은 어둠까지도 다 좋게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끊을 것이 무엇이며, 지속시킬 것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라는 뜻입니다. 이 안경을 쓰고 보면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희망이 어떤 모양으로 우리 가운데 있는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귀중하다는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는 건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일 예배가 이 눈, 이 희망을 다시 한번 찾을 수 있는 눈, 이 안경을 찾는 주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서 말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생명을 창조하고 생명의 안경을 너희들에게 준 창조주로서, 한 가지를 약속한다. 나는 절대로 너희를 잊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사야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세상에 어머니가 젖먹이를 잊어버리는 것 보았느냐? 어머니가 자기가 낳은 자식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수가 있느냐? 그런데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어버리는 극단적인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그대들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며,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어머니가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없다는 건 인지상정입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제 자식을 잊겠습니까? 어떻게 자기가 낳은 자식을 버리겠습니까? 이건 인륜입니다. 그런데 21세기 오늘,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이 자기가 낳은 자식을 잊는 것은 물론이고, 내다버립니까? 심지어 자식을 죽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어머니가 자식을 잊고 버려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양자로 삼고 양녀로 삼은 너희들은 아무리 보기 싫어도 아무리 죄악에 찌들어 있어도 나는 버리지 않는다.” 이것 하나를 믿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절대로 잊지 않는다. 나는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가 살고 네가 잠자는 집을 나는 잠자지 않고 늘 지켜보아 주겠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저는 성서를 읽으면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말씀을 깊이 생각합니다. 이 말씀으로 설교도 많이 했습니다. 오늘 제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식을 낳으면 사람들이 묻습니다. 아이가 엄마 쪽을 닮았는지, 아빠 쪽을 닮았는지, 아니면 둘을 모아 포개다가 반씩 닮았는지? 닮았다는 말은 얼굴 모양이 닮은 것을 가리킵니다만, 아이는 얼굴 모양이 많이 담지 않았더라도 분명히 엄마와 아빠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형상이란 말은 이미지입니다. 흔히 성격, 사람 됨됨이 등이 자기 자식에게 이어지지 않습니까? 자식에게는 낳아준 어머니와 아버지의 형상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젖먹이를 잊겠느냐는 말은 자기 형상을 투여한 젖먹이를 어떻게 잊겠느냐는 말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버린다면, 자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자식 속에 담긴 자신의 분깃, 자기 자신의 인간성, 자기 자신의 삶, 자기 자아를 함께 버리는 겁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 이웃을 미워하면 살인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식을 버리면 살인, 곧 남을 죽이는 일일뿐만이 아니라, 자식에게 투영된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자살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다는 것,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것,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현실을 많이 본 것 같습니다. 하기야 21세기, 최고도로 문명이 발달했다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버리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짓밟고 학대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죄악 더 큰 불행, 더 큰 좌절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자신의 형상을 입은 인간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늘 요한일서를 보면서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인간에게 자기 형상을 부여하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오면 인간은 생명체가 됩니다. 생명이 왜 생깁니까? 사랑 때문에 생명이 생깁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생명은 사랑의 작품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잊는 것은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사랑의 끈이 끊어지면 버리는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데 어떻게 버립니까? 자기가 채찍을 맞을망정 사랑하는 사람은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당신의 영을, 당신의 형상을 부여하셨으므로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죄악으로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회개시켜서 새로운 생명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사랑의 화신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는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이 사랑으로 살아왔는지, 사랑의 끈을 끊고 살아왔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러시아에 아주 유명한 신학자 한분이 계십니다. ‘니꼴라이 베르자예프’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이런 내용의 글을 썼습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에 쉬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 일수는 7일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끝나면 창조는 완전히 끝난 겁니까?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날을 어떻게 말할까요? 베르자예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창조는 7일 동안에 완결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피조세계가 죄악이 물들면 회개시켜서 새롭게 만들고 새로운 생명을 주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이것은 창조의 제8일입니다.”
창조의 8일째 날, 상징적인 언어입니다. 창조의 8일째가 되면 사람들은 회개하고 구원을 얻고 새 생명을 얻습니다. 오늘 다른 말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주일을 우리는 첫 요일로 삼고 토요일을 마지막 7일로 삼습니다. 한 주간은 7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 요일마다에는 또 하나의 요일이 있습니다. 제8요일! 죄 가운데 빠져서 허덕이는 사람에게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주는 요일, 제 8요일이 있습니다.
이 8요일은 토요일 다음에 있는 날이 아니라, 모든 날에 덤으로 주어진,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는 그 날입니다. 그날에는 생명이 항상 새롭게 거듭납니다. 옛것은 심판을 받아 죽습니다. 새것이 태어납니다. 옛것이 죽고 새것이 살아나는 역사 속에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이미지가, 그런 하나님의 형상이 작용합니다.

2003년을 마감하면서 우리는 한번 어떤 것을 끊어야 하는지, 내년에는 무엇을 다시 연결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형상을 염두에 두고서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어머니가 제 자식을 잊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나는 너희를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 약속을 믿고 오늘 회개와 구원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