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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날 새 언약 (렘 31: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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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31:31-34                                                   
새 날 새 언약                                                 

새해가 되었습니다. 해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이 결심을 하곤 합니다. 인터넷을 통해 한국 신문을 보니까, 올해도 새해를 맞이하여 결심하는 내용들 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있습디다. 그건 뭔고 하니, 금연하는 것이었습니다. "올해부터는 꼭!" 하고 금연을 결심하고 시행하고자 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하는 내용도 제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래 전에 책에서 본 금연법을 하나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옛날 오래 전, 한국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어떤 사람이 담배를 좀 끊고 싶은데, 잘 안되어서 고생하고 있는데, 옆집의 개똥 아버지는 금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담배를 끊었냐?"고 말입니다. 개똥 아버지가 대답하기를, "약 좀 먹었지." "그래, 무슨 약인데 그렇게 효과가 좋아?" "근데, 그 약은 좀 오래 먹어야 돼. 그렇지 않으면 효과가 없어." "그래. 나도 좀 소개해 줘.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이럴 때 도와주는 게 친구지." "그 약은 교회에서만 파는데, 구약과 신약이야."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서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린 책을 구약(옛 약속)이라 하고, 예수님과 그 후 교회 시대의 내용을 신약(새 약속)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신약이라는 말이 생기게 된 배경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에 있습니다: 31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그래서 오늘 본문을 "구약 속의 신약"이라고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하신 이 새로운 언약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시작이 되고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떡을 떼신 후 잔을 가지시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고전 11:25)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오늘은 이렇게 귀한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이 말씀에 깊이 귀를 기울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이 나에게도 임하도록 하게 하여야 할 줄 압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 새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크게 두 가지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언약이라고 해서 내용이 달라진 어떤 모습이 아니라, 방법이 달라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새 언약은 첫 번째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을 우리 인간의 마음에 기록하시겠다는 것"입니다: 33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의 말씀일까요?

우리가 이 말씀을 살펴 볼 때, 옛 언약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 언약 곧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돌 판에 새겨졌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 법이 돌 판에 새겨졌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의 결과가 바로 32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옛 언약을 말합니다)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이 지키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이제는 인간의 마음 판에 하나님의 뜻을 새기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지킬 수 있는 마음까지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는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면서 살 수 있는 모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새 언약의 특징을 34절의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이러한 표현은 33절 하반 절에도 같은 모습으로 나옵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기서 우리는 공통적인 표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다 나를 알게 될 것이다. 혹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 언약과 옛 언약의 차이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차이입니까?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그것은 "'될 것이라'와 '되라'의 차이"이고, 또 "'알리라'와 '알라'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되라, 알라"라는 표현은 명령형입니다. 하지만 "되리라, 알리라"라는 표현은 미래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미래형을 성경 문법에서는 "신적 미래형"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심으로 이루어지는 미래형이라는 뜻입니다. 그저 자동적으로 시간이 가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지를 갖고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실현되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명령형"으로 "알아라, 지키라, 되어라"라는 표현이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새 언약은 "알게 되리라, 지키게 되리라, 될 것이다"라는 식의 표현이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아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사랑하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보기도 합니다만, "사랑하라"는 말씀은 요한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사랑하리라"는 말로 더 많이 표현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네 이웃을 사랑하리라" 라든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등등입니다. 또 사도행전 1:8에서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데에서도 볼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되라"와 "되리라"는 상당히 의미가 다른 말입니다. "되라"는 율법이요, 옛 계약입니다. 실패한 방법입니다. 인간이 이룰 수 없는 계약입니다. 그러나 "되리라"는 성령의 법이요, 새 계약이요, 이 모습만이 실패할 수 없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방법이 나와 있는 표현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내 증인이 되리라는 바로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억지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변화하여 그렇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가장 싫어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수많이 요구하는 것 중에 두드러진 것이 무엇입니까?  "간섭"입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간섭을 우리는 받기도 하고 또 받은 만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으로는 이루어질지 몰라도 실제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호세아도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그를 알자" 아무리 외쳐 보았건만, 사람들은 코방귀도 뀌지 않았습니다. 이런 인간의 모습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새 언약을 말씀하면서,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고 새 계약의 모습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실질적인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지난번에 섬기던 교회의 어느 장로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 설교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장로님께서는 제가 했던 설교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고, 또 새롭게 느껴지는 귀한 말씀이라고 생각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느낌이 들면서 한 편으로는 또 이런 생각이 드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느끼고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이해했을까?" 하는 염려가 들더랍니다. 장로님은 거기까지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로님, 장로님께서는 거기까지 염려하지 마시고 이제는 이렇게 해 보십시오, 장로님께서 은혜를 받으면 받으신 대로 그저 다른 사람 상관 말고 기쁘고 감사하게 그리고 새로워지세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장로님의 바로 그 모습을 보고 예수를 믿고 은혜의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저는 이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 34절의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의 내용이라고 봅니다. 이 말은 물론 우리로 밖에 나가서 전도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도에 관해 어떤 분이 말씀한 이 말씀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전도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 자체는 수치이다.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생활 자체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녀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해야 한다"는 말씀을 말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받아들이고 이를 간직하는 모습을 지닐 때 가능해 집니다. 그것은 34절 하반 절의 말씀에서 발견됩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러한 모습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용서를 받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꼭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사한다"라는 말은 Heb. "살라흐"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반드시 하나님에게만 쓰는 단어라는 사실입니다. 즉, 죄를 사하고 그 죄가 용서받았다는 권한과 선언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용서의 방법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의 죄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갖게 된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저는 이렇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의 모습을 하나님과의 수직 관계가 분명해진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의 수직 관계가 분명해진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면, 하나님과 자기 자신 사이에 다른 무엇을 끼워 넣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간섭하거나 침범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충실히 감당하는데 최선을 다하게 되는 새로운 인간이해가 그에게 마련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의식한다든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간섭하고 강요한다든지 하는 이러한 모든 모습은 사실상 자기 게으름이나 자기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거나 회피하는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인간 관계의 모습을 아무리 선하게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령께서 어떤 사람에 직접 임하게 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변화 받는 것, 그리고 그 삶을 그저 사는 것 -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받은 은혜대로 감사히 살아가는 바로 그 모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알아라, 되어라, 하라"가 아니라, 성령께서 임하시면 "알게 되리라, 그렇게 되리라, 하게 되리라"고 믿고 나는 내 은혜 받은 대로 살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않는 모습"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삶을 맞이할 수 있는 비결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며, 또한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변화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인격의 변화란 우리의 의지의 결단이 아니라  신비로운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언약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란 하나의 국가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약의 당사자(Partner)로서의 의미입니다. 교회가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의 약속의 새로운 대상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창립 28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신시내티 한인 장로교회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계약의 공동체로서의 자세와 모습과 내용을 간직하는 복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교회에 속한 우리 모두가 바로 이러한 새 계약의 모습의 사람들이 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날을 교회 창립주일로 맞이하는 우리 신시내티 한인 장로교회는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변함없이 간직하는 교회가 되도록 늘 새로워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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